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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고가 아니라는 것은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고정됨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고가 붙을 자리가 없어요.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떼어 놓는데,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는데 무슨 거기에 고가 붙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비행기가 날아갈 때 프로펠러가 돌아가는데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냥 이 생활을 하는 데 찰나찰나 화해서 자꾸 이것 보면 이것 보고 이렇게 돌아가는데 고는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고가 있는 거지 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업보도 없고요. 모두가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과거에 업보가 있어서, 팔자가 있어서, 운명이 있어서’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고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생각 할 때 고는 없습니다.
그 ‘없습니다? 하는 건, 얼른 쉽게 말해서 왜 없겠습니까마는 그 생각을 잘못해서 고라는 얘깁니다.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잘못되고 잘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집착하는 게 고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또 이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걸 아실 수 있다면 공한 걸 알 수 있고 공한 걸 안다면 고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현실의 나와 참나를 모릅니다. 나와 나를 모른다는 것은,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콤비가 돼서 돌아가야 하는데 항상 나라는 육신 때문에 콤비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내가 했다, 내가 벌었다, 내가 망했다? 이럴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말을 해도 내가 함이 없습니다. 함이 없이 그냥 하는 거죠.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닙니다. 몸뚱이를 내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내 몸뚱이는 생명들의 집합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말씀하시기를 ?네 몸이 허허바다에 떠 있는 배라면 그 배 안에 탄 승객은 네 몸 안의 생명들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들은 중생으로 비유를 했고 뱃사공은 선장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얼음판을 딛고 가는 것과 같이 인생을 한 철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심부름을 잘하면 되는 겁니다. 내가 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게, 내 몸 안에도 생명과 모습과 의식들이 천차만별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물 한 컵이라도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봤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가 들었다고 하겠습니까. 어떤 거 될 때 내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고 있는 한 개체인 것입니다. 그래야 정신계와 물질계가 콤비가 돼서 여여하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여여하게 돌아갈 수 있으려면 나와 내가 둘이 아니어야 되죠. 둘이 아니게 되면 스스로 여여하고, 여여한 줄 안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알며, 또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걸 안다면 걸림 없이 들이고 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못났든 잘났든 이 세상에 이 몸을 받고 나왔다면 내 나무는 내 뿌리부터 알아야 된다고 봅니다. 내 뿌리를 의존하고 나갈 수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것을 뿌리라고도 하고 자아라고도 하고 자불이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이름은 있지만 근본은 누구나 다 하나인 것입니다. 그 근본에는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만물 만생과 더불어 일체제불의 마음도 직결돼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고가 없다고 한 말이 어떠한 뜻인지 짐작하시리라고 믿습니다만,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보는 것이 고정된 게 있는가 하고요. 듣는 것도 고정되게 듣지 못하고 만남도 고정되지 않고 또는 움죽거리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했다 안 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나투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데,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한생각에 찰나 전으로 돌아가고 찰나 후로 돌아가고 현실에 공해서 돌아가고 이러는데 여러분이 한 게 따로 있습니까? 함이 없이 여러분은 여여하게 하고 가시는 겁니다.
근데 생각이 그렇게 되질 못해서 그게 콤비가 안되죠.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콤비가 돼서 여여하게 이끌어 갈 준비가 되지 않은 거죠. 부처님께서는 ?제일 먼저 네 마음부터 알라. 본래 네 마음은 부처니라. 부처의 근본은 체가 없어서 보이지 않으니까 육신이 없다면 무효고 또 육신은, 정신계를 무효로 본다면 물질계는 정신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효다.? 하셨습니다.
우린 공기주머니 안에 있어요. 근데 여러분이 생각할 때 ‘나’ 이렇게 하면 벌써 몸뚱이부터 말하는 줄 알아요. 그러지 말고 체가 없다는 거부터 생각하세요. 체가 없잖아요! 마음이라는 게 체가 없으니까 이 마음 저 마음 막 그냥 쓰잖아요.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이거든요.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만나는 거 가고 오는 거, 모두가 공했어요.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여기 올라올 때도 발자국 짊어지고 오지 않았죠?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죠? 한 발짝 들여 놓으니깐 그 앞서 걸어온 발자국은 다 없어졌잖아요, 과거로.
그러니 지금 현실에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는 건 뭐냐 하면 생각을 하는 데서 벗어나게 되는가, 그렇지 못하고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게 끄달리면 그 팔자나 운명이 주어지는 거죠. 팔자도 없고 운명도 없어요. 자기 생각대로 그냥 전진하는 겁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삶은 고가 없다는 소리가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니 앞으로 늙어 죽도록 또 자녀들을 낳아서 기른다 해도 보배를 넘겨준 것과 같은 이치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부 너무너무 전자에 끄달리고 있어요. 그런데 부처님 말로 해서 자기네들 보디가드는 자기한테 있습니다. 딴 데서 찾지 마세요. 얼른 쉽게 말하자면, 원자라고 비유한다면 원자에서는 입자가 나가서 다 조절하죠. 나쁜 거는 나쁜 것대로 처리하고 좋은 거는 좋은 것대로 처리해서 들이고 말입니다. 제각기 다 그래요. 그런데 자기가 모르니깐 그걸 부려먹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자기, 위대한 자기지만 친근하게 앉아서 ‘너만이 지켜 주고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잖아.’ 하고 그렇게 친근하게 둘이 아니게 해라 이 소리예요. 모두 자기네들의 전자에 살던 조상이, 과거의 그 조상이 자기 모습을 또 형성시키기 위해서 정자 난자를 빌려서 자기를 이렇게 형성시켜서 이끌어 가는 거니까요.
관하면 다 해결할 수 있나요?
질문: 스님께서 일러주신 마음 도리를 나름대로 실천하며 간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갑자기 어지름증이 와서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그런 일이 닥치니 큰 불안감이 들고 앞날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서 저의 편안하지 못한 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관하는 걸로 해결을 할 수 있을까 불안해 하는 이 중생심에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부처님의 광명이 온 누리를 비춘다는 것은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을 못하고들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광명도,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 그 재료가 여러분한테 다 충족하게 돼 있습니다. 바로 바탕이 지수화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병이라는 것은 병이 아니라 공부하라는 재료입니다. 그것도 생각을 ‘아이구, 내가 이 어지러움병이 생겼으니까 가서 보약이라도 지어먹고 이럭해야겠다.’ 그러고 바깥으로 떠도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안으로 ‘허허, 이 공장이 많은 세계’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즉 우리는 이 지구 안에서 무슨무슨 나라라고 그러지만 이 몸 안에서는 이 몸 안에 있는 중생들은 전부 그걸 세계라고 합니다. 아, 나라가 좀 많습니까? 위나라, 대장나라, 소장나라, 식도나라, 이장나라, 간장나라, 방광나라, 콩팥나라, 나라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한데 합쳐서 지배할 수 있는 대통령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이다 이겁니다. 내면이나 외부, 유생 무생, 무(無)의 법 유(有)의 법 모두 그 한마음으로 된 것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생이 천차만별이니까 말입니다.
주인공(主人空)이라는 게 한마음으로 된 하나의 기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의 개별적인 주인공으로만 알지 마시고 그 생각을 넓게 해서 포괄적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은 그 한마음의 주인공만이 모든 이 안의 모든 공장들을, 나라들을 지배하니까 내가 생각이 이렇게 난다면 그 생각하기 이전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법신들이 거기서 전부 통신을 합니다. 이것이 레이다망이라고 해도 되지만 불가에서는 누진통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세 가지, 판단력과 들이고 내는 작업과 통신력, 이것을 누진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누진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나를 보호하고 있는, 3미터 안으로 이 보호하고 있는 그런 보신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거기다가 모든 것을 맡기고 ‘아하, 내가 병이 걸린 게 아니라 내가 생각을 어떡하나 보려고 테스트하는 거로구나. 아이구, 그것도 거기서 나온 거로구나!’ 하고 딱 생각을 하는 동안에 바로 그 어지러움증은 없어질 겁니다. 왜? 속지 않으니까! 그냥 바둥바둥하고 속아서 애쓰면 재미있거든요. 무서워서 벌벌벌벌 기는 놈은 더 무서웁죠, 왜. 그러니 그거를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아마 당당하게 살 것입니다.
마음에서 모두 창조하나요?
질문: 스님께서 심성과학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모든 것을 갖다가 그 마음에서부터 나오고 마음에서 다 창조를 하나요?
답변: 그렇죠. 마음이 떠나고는 절대 이거는 허용이 안되니까요. 이 마음으로 인해서 보는 것도 보고, 동시에 보고 듣고 말하고 몸을 움죽거리고 이러죠. 근데 그 마음이 말입니다, 자유스럽게 살라고 그 많은 말들을, 그 많은 생각들을 다 자유롭게 줬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생각지 못하고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해요. 마음 빼놓고 뭐가 있을까요?
그래서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상세계, 지금 우리가 사는 데가 중세계, 하세계 이렇게 삼 세계가 같이 돌아가고 있죠.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높아지고 차원이 얕아지고 차원이 아주 저 밑으로 떨어지고요. 이렇게 해서 모습도 그렇게 나오죠, 그대로!
될 수 있으면 여러분도 각자 자유권을 얻기 위해서, 누가 그거를 말해주기 이전에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어야 되겠죠? 누가 대신 잠을 자 주고, 누가 대신 먹어 주고, 누가 대신 똥을 눠 주고, 누가 아파 주고, 누가 죽어 주고, 누가 깨닫게 해 주느냐는 얘기예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정수에 자동적인 컴퓨터가 다 있다고 얘기했죠? 그건 자기 차원에 따라서 입력이 되는 거니까요. 우리가 살면서 항상 ‘내가 산다. 내가 했다. 내가 만들었다. 내가 먹었다.’ 이렇게 말씀들 하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내 몸뚱이 속에도 생명체들이 잔뜩 들어 있는데 어떻게 물을 먹었는데 내가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더불어 같이 먹었죠.
그래서 이거를 먹으면 주는 거죠. 그런데 그 생명체들은 내게 또 작용을 해줘요. 그러니까 항상 더불어서 하지 에누리가 없습니다. ‘내가 주면 받는다.’ 이런 거죠. 그래서 항상 생각을 건전하고, 즉 말하자면 둥글게 좀 밝게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렇게 입력이 된 거니까 그대로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난 이거 할 수 없다. 나는 이거는 도저히 할 수 없다. 요거는 할 수 있는데 요거는 할 수 없다.’ 이런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하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한테 마음도 말도 생각도 자유스럽게 줬는데, 고등 인간으로서 자유스럽게 쓰라고 했는데도 여러분은 자유스럽게 쓸 수가 없죠.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 그걸 하느라구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몸이 움죽거리는 건 한계가 있는 거고 내 이 정신계의 보이지 않는 자기는 무한이에요. 그래서 자기 주인공에 ‘진짜 너만이 이 몸이 푸르게 살게 할 수 있다. 너만이 이끌어 줄 수도 있고, 너만이 해결사가 돼줄 수 있고, 아프면 의사도 돼줄 수 있다.’ 고 관하라는 것은 오직 자기 이 몸이 싹이라면 자기 뿌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하고만 통하는 게 아니에요. 날아다니는 새하고도 말을 할 수 있고, 꽃하고도 말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소를 건지는 데는 내가 소가 돼야, 내가 소 속으로 들어갈 줄 알아야 소를 건질 수 있다구요.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은 ‘소로 태어났으니까 소의 고기는 사람들이 먹어서 약으로 쓰고, 소의 영혼은 건져서 인간으로 형성시킨다.’ 이거죠. 갖은 각색으로 천차만별의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풀 수는 없고 한꺼번에 알 수는 없으니까 차차 하나씩 알아갈 수 있도록 노력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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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는 일이 잘 안됐든지 할 때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참 많이 생기고 남이 저를 괴롭힐 때 그 상대에게 어떤 잘못된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습니다. 그 마음이 좀 작아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변: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운전수한테 ‘차를 잘 끌고 다니게 하고 위로는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름을 잘 넣어가지고 다녀라.’ 이렇게 평소에 관하라고 늘 말씀드립니다. 운전수가 차를 끌고 다니지 차가 운전수를 끌고 다니는 것 보셨습니까? 그러니깐 차를 부서뜨리지 않고 조심해서 끌고 다니는 것도 운전수요, 또 기름을 떨어뜨리지 않고 넣어가지고 다녀서 사고 안 나게 하는 것도 바로 운전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 아주 악한 마음을 가지고 나한테 다가서더라도 ‘아, 저 사람하고 나하고도 둘이 아닌데 이 생명의 근본도 둘이 아니요, 마음을 내기 이전도 둘이 아니다. 그러니 마음을 밝게 해서 그저 한마음이 되게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맡겨 보세요. 그리고 증오심을 버리시구요. 그런 것도 거기다 맡기시고 그냥 편안하게, 알지도 못하고 자기 사량으로 생각을 하고 자기를 망하게 했다고 하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즉 말하자면 ‘나는 당신의 시자니까,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슨 사량으로 남을 오해할 수도 있고 그런데 그렇게 하는 거를 잘못됐다고만 할 게 아니라 또 잘할 수도 있는 문제가 생기니까, 하여튼 모든 것은 당신만이, 의합하게 같이 불이 들어와서 같이 밝은 데서 살게끔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맡겼을 때에 그 사람 가슴에 불이 들어옵니다. 뿐만 아니라 댁의 마음과 아주 또 맞아져서 나중엔 사과를 하고 더 절친해질 수도 있는 문제가 이 속에 다 있다는 겁니다.
누가 계속해서 괴롭혀요!
질문: 스님, 다른 어떤 사람이 나쁜 생각과 나쁜 에너지를 갖다 계속해서 내뿜으면서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계속되니까 몸도 좀 아프고 계속 그런 영향을 받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답변: 그거는 사람의 사량이에요. 사량에서 생기는 마음이에요. 우리 영령이라는, 체가 없는 내 마음은 이 허공과 같아서, 즉 말하자면 그쪽의 마음 내는 것도 영이고 내 마음 가진 것도 영이에요. 영에다 영을 넣으면 몇이 되나요? 수많은 영을 영에다 집어넣어도 하나도 없어요. 그게 없애는 방법이에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어떠한 말을 했든지 어떠한 에너지를 뺏어 가든지 정신력을 빼앗아 간다 해도 그건 못 빼앗아 갑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그 자기의 주처가 완전히 섰다면 절대로 빼앗아 가고 빼앗아 올 수도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마음이 물질이라면 되는데 물질이 아니고 형상이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어떠한 게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 형상이 없는 나한테, 모든 거를 공에다가, 즉 말하자면 공심에다가 모든 거를 거기다 놓고 ‘너만이 그렇게 안 하게 할 수 있어. 그 사람도 그렇게 안 하게 할 수 있어.’ 한다면 그게 그대로 무효가 돼 버려요. 그건 자기가 생각에 그렇게 올 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할 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대로 그게 반영이 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알고 본다면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구체적인 수행법을 알려 주세요!
질문: 보통의 절에 가면 절을 하라, 주력을 하라,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데 스님께서는 근본이 있으니까 근본에다가 모든 걸 몰락 놓고 믿고 거기 다 연결됐다고 말씀하시잖아요? 근데 보통 사람들이 그걸 들어 가지고는 이해하기가 힘들답니다. 그러니깐 만약에 절하는 거하고요, 앉아서 참선하는 거 하고요, 그런 거를 갖다 우리 선원에서도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묻고 싶습니다.
답변: 우정 앉아서 하는 게 아니라, 이게 사람이 살다 보면 앉아 있고 싶고 그럴 땐 앉아 있고, 서서 어디 가야겠다 그러면 서서 가고, 잠자고 싶다 그러면 잠자고, 그렇게 그냥 똥 누고 싶다 그러면 똥 누고, 배고프다 그러면 먹고 이러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며 그대로 삶의 근본이에요. 그러니까 누가 대신 내가 행복하게 살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누가 먹여 주고 살아 주는 사람도 없고, 잠을 자 주는 것도 없고, 또는 대신 아파 주는 것도 없고, 대신 죽어 주는 것도 없어요. 단, 내 힘으로써 내가 밀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밀고 나가는 게 법이에요, 그냥. 그게 공법이에요.
이 사람 몸 하나에 모든 모습과 생명 의식들이 하나 잔뜩 들어 있어요. 잔뜩 들어 있는데,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주인공!?하면 자기 뿌리를 말할 수도 있고 자기를 이끌어 가는 선장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선장! 너만이 이 배를 다 끌고 다닐 수 있어. 너만이 지켜 줄 수 있어. 너만이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어. 너만이 해결사가 돼 줄 수 있어. 너만이 아프면 의사가 돼 줄 수 있어.?이렇게 자꾸 거기다가, 뭐든 거기서 다 나와요. 이거는 실천이면서도 진리고 진리이면서도 삶에 우리가 지금 당면해 있는 자체예요.
그런데 참선은 이렇게 한다, 화두를 가지고 이렇게 해야 한다, 뭘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배우기 위해서 그거를 방편으로 쓰는 것뿐이지 그렇게만 배워서 그것만 해야 한다면 자기를 깨치기는 몇백 년 가도 깨칠 수가 없어요. 우리가 깨치고 못 깨치는 건 마음 한 번 먹기에 달렸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게 진리 속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 이것이 진리라는 것만 알면 되고, 우리가 그렇게 관하면 어디를 통하느냐. 대뇌를 통하고 사대로 통하고, 이건 심성의학도 되고 심성과학도 되고 심성천체물리학도 돼요. 그래서 이것이 여기에서 들어가면 벌써 사대로 통신이 되고 정수에, 자동적인 컴퓨터에 입력이 되게 돼 있어요. 입력이 되면 입력 된 대로 나오게 돼 있고, 전자에 입력된 건 없어지게 마련이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자에 악하게 사람을 죽였으니깐 이 업이, 죄가 많겠지.?하는 것도 이 요량에 달려 있어요. 내가 거기서 그렇게 나올 때에 바로 그것은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입력을 할 때 입력된 것이 없어지면서 새로 내가 입력한 것이 들어가거든요. 그러니까 새로 입력한 것이 그대로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내 불성 자체 근본만 있는 줄 안다면, 정신계의 자기가 있는 줄 안다면 여여하게 살 수 있고, 모든 걸 갖추어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 손색이 없고 걸림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또는 자유자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이것은 참 껄껄 웃고 정말 즐길 수 있고 영원한 그 자유권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뜻이죠.
똑같은 뜻을 달리 표현하시는 이유
질문: 스님께서 풀어 놓으신 ‘뜻으로 푼 금강경’을 보면 똑같은 표현인데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할 때는 응여시주이며 여시항복기심이니라.’ 이렇게 한 부분에 스님께서는 ‘내면의 자생중생들을 둘 아니게 다스려야 되고 내면의 한마음 없는 한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느니라.’ 이게 전부 다 ‘한마음의 자생화신보살’로 앞에는 표현하시고 ‘한마음의 자생응신보살’로 말씀하시고 또 그 다음에 ‘내면의 자생중생들’이라고 표현을 하시고 ‘내면의 한마음 없는 한마음을’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저희로서는 절대로 다른 의심 없이 믿고 있습니다만 이게 글자 풀이를 해서 결국 보이는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될 텐데 이러한 부분이 좀 이해가 될까 우려됩니다.
답변: 부처님의 말씀도 그냥 글로만 써 놓으신 게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동을 하게 했거든요. 그 말뜻이 이동을 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이해가 가십니까?
그것이 글자로만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말씀을 하시되 그 말의 뜻은 이동이 되게끔 했단 얘기죠. 남의 속에도 들어갈 수 있게끔 했다 이거죠. 글이 아니라 글이 아닌 말씀이다. 말씀 아닌 말씀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어느 사람 속에도 다 들이고 낼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깐 얼른 쉽게 말해서 예전에는 이런 말을 이렇게 했는데 지금 알기 쉽게 하려니깐 이런 말을 이렇게 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지금의 사람들이 부처님이 말씀해 놓으신 그 뜻을 다 알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공생이다’ 이러면 ‘아, 몸체 하나가 전부 내 생명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더불어 같이 사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죠.
부처님께서 설해놓으신 걸 옮겨놓은 책을 열심히 보다가 어느 병자가 병이 나았어요. 또 어떤 사람은 등이 굽어서 고생했는데 하루는 생시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그냥 작대기로 와서 치더니 등이 나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렇게 이 부처님의 말씀이, 뜻이, 하나의 말씀이 수천수만 개로 돌아가되 돌아간 게 하나도 함이 없이 돌아갔다 이거죠. 그러니깐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난다 이 소리죠. 이동을 하는 거예요, 찰나찰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동이 되는 거예요. 우리 눈이 이동이 돼서 보듯이. 이거 보면 이거 보고 이거 보면 이거 보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이거를 알기 위해서 그 수만 가지 모래알같이 많은 색색가지의 진리를, 순간순간 화해서 바뀌는데 그걸 어떻게 대치를 하느냐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마음공부 한 사람들은 대치를 딱딱 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니깐 ‘이 몸뚱이가, 내가, 이것을 내가 이렇게 했다’ 이것도 내가 함이 없는 거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내가 공해서 없는데 이걸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함이 없이 하시라. 내가 산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라. 내가 산다고 하지 말고 나 아닌 내가 그냥 사는 걸로 하라고 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이 껍데기는 마음에 따라서 따라다니는 거지, 에너지가 동하는 자체가 아니라는 걸 항상 생각하신다면 겉으로 보이는 걸로 뜻을 따지고 이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참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