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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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가르치신 그대로 자유롭게 사세요
현대불교신문연재573호 - 길을 묻는 이에게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여러 대덕 스님들께서 같이 한자리를 해 주신 데 대해서 더욱 감사함을 느낍니다.

부처님께서 49년을 설해 주셨지만 한마디도 한 사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어떠한 것인가? 삼천 년 전이나 삼천 년 후나,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 깊은 마음속에 항상 살아 계십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그 감사함을 어찌 말로 다 하리까. 부처님 봉축일은 찰나찰나 봉축일이며, 오신 것이 없기에 가신 것도 없이 영원한 우리 마음속에 깊이 계시어 무시무종 일승공법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신계의 50%를 모르면서 물질계의 50%만 가지고 살아나가시려니까 힘들고 얽매이고, 또 애고나 업보나 유전성 세균성 영계성까지도 타파를 못하면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한마음으로 일체 만물만생 어느 것이든 아니 되시는 것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가 원할 때에는 한 찰나에 응신으로서 관세음이 돼 주시고, 명이 짧다 하고 구원을 청할 때는 항상 칠성 부처가 돼 주시고, 좋은 데로 못 간다 하고 소원을 하면 지장이 돼 주시고, 물에서는 용신이 돼 주시고, 길에서는 지신이 돼 주시고, 독성이 돼 주시고, 산신이 돼 주시고, 아프면 바로 약사가 돼 주시고…. 이렇게 천차만별로 어느 거 하나 아니 되시는 게 없고, 어느 것 하나 응신이 돼서 나투어 주시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처님이 삼천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풀 한 포기만 살아 있어도 부처님은 항상 그 자리에 계신 겁니다. 물도 생명이 있고 불도 생명이 있고 흙도 생명이 있고 바람도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 어느 자리에든 어느 골골에든 부처님이 아니 계시다고 하겠습니까? 삼천 년 전이 바로 오늘이요 삼천 년 후도 오늘이요 오늘은 영원한 오늘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될 때에 내가 됐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이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한테 “내 자생중생부터 제도를 해야 바로 내가 제도가 되느니라.” 했습니다. 자생중생이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몸속에 생명, 의식, 모습들이 모두 있습니다. 그것은 엄마 아빠, 즉 말하자면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치고 자기 영혼과 더불어 그 업식이 그림자처럼 영혼에 딸려서, 바로 종합이 돼서 이 세상에 생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현실의 여러분 앞에 입력된 것만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한다는 소리가 나오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이렇게 하라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역대 조사들도 그랬고 현재 스님네들도 그러시고요. “나오는 자리에다 되놓아라. 나오는 자리에다 되놓지 않는다면 바깥으로 얽매이느니라. 길을 가다 엎드러지면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 일어나지지 허공을 허우적거린다면 일어나지지 않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것을 나오는 자리에다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집니다. 지금 현재의 물질 컴퓨터는 사람이 입력을 해야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름하는 까닭에 어떠한 행동을 했든지 어떠한 말을 했든지, 나쁜 일을 했든지 좋은 일을 했든지 자기가 한 것만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자기가 아는 것만치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과거에만 지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어저께도 과거고 한 시간 전도 과거고 일 초 전만 하더라도 과거입니다. 과거의 잘못이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나오는 것을 거기다가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이 몰락 녹아지느니라, 없어지느니라. 본래 공해서 붙어 있을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관습에 의해서 붙어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다시 한 번 거르는 수행을 해야만 되겠기에 부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신 겁니다. 모든 것을 나오는 그 자리에다 되놓는다면 몰락 없어지는 겁니다. 안에서 좋은 일 좋은 생각이 나오고 밖에서 좋은 일 좋은 행동이 들어오고 이럴 땐 감사하게 거기 놓고, 악한 마음이 생길 때는 ‘악한 마음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선한 마음이 나오게 하는 것도 네놈 아니야?’ 하고 거기다가 되놓는 작업이 필요한 겁니다. 가정에서 살아가시면서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닥쳐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타파하지 못한다면 살아나가는 데 얼마나 고초가 많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항상 말씀드리지만, 아프면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네 몸뚱이를 건강하게 끌고 다니면서 심부름을 시키려면 네가 낫게 해야잖아.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놔야 됩니다. 놓는 데도 또 못 믿어서 줬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믿는 사람한테 서류를 맡기고 심부름을 시켰다면 그대로 놔둬야 일이 되지 서류를 맡겼다가 못 믿어서 도로 뺏었다가 도로 줬다가 도로 뺏었다 이런다면 무슨 일이 됩니까? 그와 똑같습니다.

본래 집을 지으려면 기초를 튼튼하게 하고 주춧돌을 세웁니다. 그와 같이 우리 사람들에게는 지수화풍이 바탕으로 돼 있어서 각자에게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발전시키려면 용도에 따라서 자꾸 거기다가 되놓으면서,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 자체가 참선 아닙니까? 마음은 들끓는데 육체를 꿇어앉혀 놓는다면 그건 아무 소용도 없는 겁니다. 행선이나 와선이나 입선이나 좌선이나 모두가 참선인 것입니다. 이 모두가 참선이니까 참선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말을 하자면, 이 세상에 풀포기 하나도 스승 아닌 게 없고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와서 인연 따라서 봤으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했으면 행하게 되니까 모두가 스승 아닌 게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우리가 자기 자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로 돌아가서 씨를 찾으려고 한다면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화두를 들어서 많이 깨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밝게 돌아가고 빨리 돌아가고, 또 세상이 너무 많이 변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화두를 붙잡고 ‘이거 뭣고?’ 하기 이전에 바로 ‘과거의 씨를 올봄에 심었더니 내가 새 싹이 됐구나. 그러니 그 싹 속에 열매도 있고, 바로 그 싹 속에 씨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 속에서 찾아야지, 내가 낳기 이전을 과거에서 찾는다면 찾을 수가 있는가?’ 하고 뛰어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라는 존재는 모두가 시자일 뿐입니다. 내 마음의 주인의 시자일 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구합니다. 마음을 구해야 부처님의 마음도 알 수 있고 역대 조사들의 마음도 알 수 있으며 일체 중생들의 마음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내 마음으로 나를 뛰어넘고 다스려라 하는 것은 몸뚱이 속에 수십억의 의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중생입니다. “중생이 병이 나아야 내 병이 낫겠노라.” 하고 유마힐 거사가 말했듯이 부처님께서도 “너의 자생중생을 먼저 제도해야 네가 해탈을 할 수 있느니라.” 하셨는데, 똑같은 얘기죠.

그래 어떻게 해야 내 자생중생을 제도하나? 우리가 지금 지구에 매달려서 살면서 지구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사는 것처럼, 몸뚱이 속의 중생들은 우리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도 모를 뿐더러 좋고 나쁜 거를 스스로 판단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마음먹는 대로, 강도질을 하려고 한다면 강도질하는 대로 그냥 좇아 주고 착한 일을 하려고 한다면 착한 일로 좇아 줍니다. 우리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면 손이 쫓아다니듯 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니 어찌 마음으로써 다스리란 말을 안 하겠습니까?

그래서 행자들에게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행자뿐만 아니죠. 속가에서 사는 여러분이 다 부처이자 법신이니까요. 항상 부처님의 법에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되고, 가르치는 스님네들한테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되고, 자기에게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된단 얘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모든 게 자기 탓입니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상대성 원리가 어디에서부터 생겼습니까? 나로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내 탓으로 돌려야죠. 모든 거는 내 탓으로 돌린다.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부딪침도 있고 상대도 생겼고 세상도 벌어졌고 우주도 벌어졌습니다. 내 탓으로 돌리게 되면 화목을 도모할 수도 있고, 절대로 의리와 도의를 허망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저절로 말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행동과 부드러운 말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항상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돌아가는 것을 이름해서 계향(戒香)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내면에 자기 자성 선을 세우고, 즉 말하자면 선이 중심이 되고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공해서 돌아가니까 공입니다. 그래서 각자 여러분이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름은 여러 가지겠죠. 하지만 대체적으로 사회에서도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팎으로 나쁘게 생각이 나오고 나쁘게 닥치고 이러는 것은 ‘나쁘게 나오는 것도 너니까 좋게 돌려서 나오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자기 주인공에 놓고, 안에서도 좋은 마음이 생기고, 바깥에서도 좋은 행을 하고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고 이럴 땐 거기에 감사하게 놓으면서 그 깊은 내면세계를 떠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이름 해서 정향(定香)이라고 난 생각합니다. 계향 정향만 잘해도 공덕이 됩니다.

우리가 향을 피워 놓고 초를 켜 놓고 아무리 빌어 봤던들 공덕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진짜로 나를 이끌어 가고 진짜로 나를 이익하게 하며, 업보를 타파하고 번뇌, 망상, 생사, 윤회 같은 과거의 모든 것을 타파할 수 있는 그 에너지는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모두 가지고 있으니 일체제불과 일체 중생은 둘이 아니어서 모두가 마음으로 전달하고 통신으로 전달하고 말로 전달하는데, 이게 교(敎)입니다. 풀 한 포기도 바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근본이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불(佛)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한 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가 포괄적으로 돌아가는 진리를 불교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 어느 종교든지 막론해 놓고 불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마구니 소굴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종교도 있습니다마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짓는 대로 바로 악업도 정해지고 선업도 정해지는 겁니다. 아니라고 아무리 절레절레 머리를 흔든다 하더라도 자기가 바로 자동적인 컴퓨터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 놓은 것은 자기에게 입력이 돼서 슬슬 나오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조금 조금씩 떼어서 말씀을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마는 여러분이 다 납득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대중 박수) 얘기를 한 번 더 하겠는데, 왜 마음으로 다스리라느냐?

옛날에 어느 수좌 스님이 동짓날 팥죽을 쑤다가, 이 얘기 다 아실 겁니다. 팥죽 방울이 끓어오르니까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하고 쳤답니다. 여러분 몸뚱이가 팥죽 솥이라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 팥죽 솥에서 팥죽 방울이 나오는 거지 딴 데서 오는 것도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망상도, 또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그러니 거기에 속지 말라 이런 겁니다. 속지 말고 그냥 놔라. 미리 ‘어, 이것도 팥죽 솥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것도 너로구나!’ 하고 탁 눌러 놓고, 이것도 눌러 놓고 저것도 눌러 놓고 그러시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몸뚱이 속의 의식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거니까, 그 업식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나오는 거니까 나오는 대로 거기다 되놓는 것이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림이요, 바로 번뇌와 망상, 생사, 윤회 그 모든 거를 거기다가 녹이는 겁니다. 용광로에다가 헌 쇠든지 새 쇠든지 오락지든지 넣으면 다 녹는 것처럼 말이죠. 그 작업만 한다면 다 녹아서 저절로 생산이 돼서 나가는 거거든요. 그러니 ‘나중에 어떻게 될까? 잘될까 말까?’ 이런 거추장스러운 생각을 마시고 진실히 믿고, 용광로에 쇠를 넣듯이 ‘모든 것은 네놈이 하는 것이니까, 안되게 할 수 있는 것이 네놈이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놓아서 구정물이 나올 땐 맑은 물로 바꿔서 써라 이런 겁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놓아 가면서 체험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뭐냐 하면 혜향(慧香)입니다. 이름 해서 혜향이니 여러분이 그렇게 실천하시는 가운데 목적을 달성하시게 되는 겁니다.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내면세계와 물질세계 양면을 따로 보지 않고 같이 관찰하면서 체험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이름 해서 혜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첫번째에도 그 자리에다 놓고, 두 번째도 그 자리에다 놓고 보임을 해야 하고, 세 번째도 그 자리에다 놓고 보임을 해야 되겠죠? 그건 왜냐. 나를 깨닫기 위해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없다면 찾는 것이지만 본래 있기 때문에 발견하는 거죠. 그래서 ‘부(父)와 자(子)가 상봉을 하게 되면’ 하는 소리를 합니다. 그걸 견성이라고 하는데, 견성을 했다고 자만심을 가지고 ‘내가 견성을 했지.’ 한다면 미해져서 캄캄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두 번째는 둘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양면을 둘로 보지 않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체험하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혜향입니다.

계향 정향 혜향을 올바르게 한다면 이름 해서 해탈향(解脫香)입니다. 여러 부처님들이 다 그렇게 말씀해 놓으신 겁니다. 만물만생이 무명에 묶인 것을 푸는 것이며 또 여여하게 다스리고 나가는 것이 바로 해탈향입니다. 그 이름은 쑥 빼놓고 진실로써 그대로 작업을 하신다면 바로 해탈향입니다. 해탈향이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게 마음의 향이지 물질적인 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탈향을 그렇게 했으면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이름입니다. 삼라만상 만물만생을 느끼고 보살핌이 항상 밝아서 걸림이 없이 구족한 것이 바로 해탈지견향이라고 이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한 발 떼어 놓을 때에 한 발을 지고 갑니까? 여러분! 마음입니다, 마음! 금을 쥐었다면 좋은 데다가 깊숙하게 감춰 놓지만 걸레를 짰다면 걸레를 어떻게 놓으십니까? 빨아 가지곤 그냥 아무 데나, 세숫대야에 담아서 그냥 아무 데나 밀어 놓죠? 이렇게 좀 걸레 짜서 밀어 놓듯 하시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항상, 가고 오는 것도 보고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먹는 것도 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서 우리가 걸어서 여기 올 때도 짊어지고 온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랬는데 그 마음이 관습 때문에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라. 자유롭게 할 수 있느니라. 자유롭게 될 수 있느니라.’ 하고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쓰게끔 자유스럽게 줬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줄을 몰라요. 얽매여서 말입니다. 이사를 가도 날짜를 봐야 하고 삼재가 들어서 뭐가 어떠니 구랑신이 들어서 집을 못 짓느니 또는 혼인을 해도 날짜를 봐야 하느니, 이것도 관습에 의해서 그런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건 이 지구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거니와 문을 찾아서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문도 벽도 은산철벽도 지구도 다 문이 없는 겁니다. 땅속도 물속도 어디든지 말입니다. 그건 통과입니다. 그냥그냥 통과예요. 마음대로 하라고 마음을 가졌는데 마음대로 못하고 왜 얽매입니까? 왜 자기의 노예가 됩니까? 왜 항상 노예로서 살아야 합니까? 이 세상에 나와서 사는 것도 복잡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종교마저도 얽매이게 해서 되겠습니까?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대로 자유롭게 사세요.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습니다. 예전에 “거기에 집을 지으면 구랑신이 들어서 당신 죽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허! 아니, 쓰다듬고 만지고 그러던 이 몸뚱이도 언젠가는 다들 버리고 가는데 무엇이 그렇게 애틋해서, 죽을까 봐 겁나서 집을 못 지어?” 했던 거죠. 그런데 여직껏 아무 일 없어요. 하하하…. (대중 박수)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을 귀신으로 만들어 놓고 귀신한테 말려서 항상 얽매이는 것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옛날에도 어느 분이 이렇게 나한테 묻습디다. “귀신이 정말 있는 겁니까? 어디 가서 물어보니까 물귀신이 해친다고 물 있는 데 나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랬거든요. 그래서 절대 물에는 가지 않는대요. 그러면서 물귀신이 정말 있다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 물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바로 물귀신이요. 당신의 마음이 물귀신이기 때문에 당신의 몸뚱이는 물귀신한테 말리는 거야. 그러니까 정말 마음을 조심하시오.” 그랬어요.

아니나 달라요? 그 사람이 아주 높은 사람인데 누가 초청을 해서 갔거든요. 그 집에서는 귀한 분이 오신다고 층층 계단을 그냥 물로 닦아서 딱 해 놓았는데 그 층계를 올라가다가 그 물에 미끄러져서 그냥 곤두박질을 쳤단 말입니다. 그렇게 허리를 다쳐서 그 해 일 년을 일어서질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고는 그 후에 또 와서 말하기를 정말 물귀신은 있다 이겁니다. 하하하….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 마음이 물귀신이 됐기 때문에 물귀신한테 당신 몸이 그렇게 된 거지 당신 마음이 물귀신이 아니었더라면 그 몸뚱이가 그렇게 되진 않았을 겁니다.” 했습니다.

그런 것과 같이, 우리가 물귀신이 되느냐 물귀신이 안 되느냐 하는 게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일체 천차만별에 대한 것을 마음 하나로 다 타파할 수 있는 도리가 바로 부처님의 도리입니다. 여러분한테 이렇게 자세하게 ‘너를 깨닫고 너를 만날 수 있다면, 너를 볼 수 있다면 바로 나도 볼 수 있느니라. 너를 볼 수 있다면 자생중생을 천백억화신으로 화하게 다스릴 수가 있느니라.’ 하고 가르치신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그렇게 해야 이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도 다 자기가 마음 쓰는 대로 알아듣고 행하죠. 작용을 해 주고 행하고, 털구멍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다 작용을 하죠. 그렇게 돼야 맨 나중에 자기가 견성을 하는 것이고, 그게 아주 첨단의 공부입니다. 말로만 들어서 견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천차만별로 병풍 둘러치듯 한 삼천대천세계의 진리가 어떻게 책으로 다 엮어지겠습니까. 조그만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일일이 어떻게 경전에 다 싣겠습니까. 그래서 전자에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시길 “일체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마음대로 하라고 자유스럽게 줬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자유스럽게 못 쓰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도 여러분의 집에 뭐 뭐가 놓인 걸 지금 찰나에 다 가 보고 오실 수 있겠죠? 그런 거와 같이 지구 바깥으로도 벗어날 수 있고 어느 혹성이든지 한 찰나에 빛보다 더 빨리 볼 수 있는가 하면 행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3년 4월 24일 광주대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행 스님 | 한마음선원장
2006-04-12 오후 2: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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