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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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뿌리 의심 말고 진정코 믿고 들어가야
현대불교신문 연재 572호 길을 묻는 이에게
사계절 없는 봄의 마음이 되려면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마음은 나와 상대를 나누고 내 탓과 남의 탓을 끊임없이 해 가면서 나라는 관념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가 위험하다는 내용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자주 보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제 안에서 끊임없이 일렁이는 감정의 용솟음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스님, 제 안에 용솟음치는 의식들을 조복 받아 사계절 없는 봄의 마음을 한결같이 지닐 수 있도록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날씨가 따뜻해져 봄이 온 것을 보니 우리는 보이는 봄만이 아니라 안 보이는 마음의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칩이 되면 개구리 입이 떨어진다는데 여러분도 마음의 봄이 와야 입도 떨어지고 귀도 떨어지고 눈도 뜨이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마음의 도리라는 것이 천차만별의 이치를 다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보배인 것입니다.

내가 때로는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요만한 그릇을 가져왔다 하면 나도 요만한 그릇의 설법밖엔 못합니다. 여러분이 바다를 가져왔다면 나도 역시 바다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름도 모르고 먹어 보지도 않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것을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곧바로 관(觀)하라는 것밖에는, 기도가 아니라 관하라는 것밖에는 말을 할 수 없겠죠, 그게 제일 시급하니까.

그래서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해 드리기를 “오신통이라는 그 자체가 바로 시쳇말로 컴퓨터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것을 다시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진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거기에 새로 입력하는 대로 나오기 때문에, 그릇은 항상 차지도 않고 비지도 않습니다. 들이고 내는 그 구멍밖에는 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전에 얘기했죠? 몸속에 있는 모든 생명들과 모습, 의식들이 다 여러분의 차원에 따라서 주둔해 있다고요. 의식들이 말입니다. 유전성이나 영계성이나 세균성이나, 업보성이나 인과성이나 이 모든 인과가 다섯 가지가 주둔해 있는데, 그게 차례차례로 자기가 저질러 놓은 그때부터, 선한 일을 했으면 선하게, 악한 일을 했으면 악하게 입력된 대로 나옵니다. 조금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팔자 운명이라든가 이런 것이 붙을 자리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너무도 좋은 공부여서 부처님께서 “이 마음을 너로부터 깨달아라.” 하는 그 말씀과 더불어 사대 성인들이 다 “너부터 알고 너부터 믿어서 너를 깨달으면,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둘이 아니니라. 또, 하나로 돌아가는 이 우주의 섭류도 너희들이 다 알 수 있느니라. 그래서 하나로 돌아간다는 그 자체마저도 공(空)해서 없는 줄을 알 수 있느니라. 그거를 알면 그대로 여여한 줄을 알 수 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일거수일투족 하는 것이 생활인데, 생활 속에서 ‘나는 중생이 돼서 모자란다. 얼마나 업이 많고 죄가 많아서 이럴까.’ 하는 생각까지도 있어서는 아니 되죠. 물이 흘러갈 때에 나는 바람이 불어서 못 흘러간다, 파도가 쳐서 못 흘러간다, 구정물이 들어와서 못 흘러간다고 말합디까? 어떤 게 들어와도 대치하면서 가라앉히면서 여여하게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끝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공부를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생활이 부처님의 법이자 생활이지 우리들의 생활이 없이, 못났든 잘났든 우리들이 없이 부처님 법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우리가 못났든지 잘났든지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삼세를 초월함이 있고, 우주가 있고, 천차만별의 만물이 있고, 끝없이 흘러 도는 이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가지고도 왜 내 마음대로 못 사는가. 여러분은 여러분 육통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육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바로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한 치도 실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누적이 돼서, 집착에 누적되고 욕심에 누적이 되고, 바깥으로 살아나가는 것을 보고 끄달리거나 안에서 해 오던 습성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눈을 가리고 귀를 가리고, 한 다리로 절름발이로 걷게 되고, 애꾸눈이 되고 그러는 거죠, 다. 그래서 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신발 한 짝은 무(無)의 세계에 두고, 한 짝만 신고 나왔어요. 그 신발 한 짝을 내가 마저 신을 줄 알아야,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를 같이, 용무를 스스로 하게끔 돼 있는 것입니다. 즉, 평등공법(平等空法)을 그대로 여여하게 하시고 가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항상 말씀해 드려도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봅니다. 일거수일투족, 뿌리와 싹이 같이 붙어 있기 때문에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 이런 말도 붙지 않는다 이랬죠. 종자를 심으면 뿌리로 화(化)하고 뿌리로 화해서 싹을 형성시킵니다. 비유를 하자면 말이죠. 그래서 그 싹은 바로 제 뿌리를 믿어야 싹과 뿌리가 상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과거에 살던 나와 현재에 사는 나가 상봉을 해야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렇듯이 지금 그 싹은 뿌리에서만이 자기를 잘살게 할 수 있구나 하는 거를 의심을 갖지 말고 진짜로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진정코 믿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라면…


불교의 사상 중에 ‘공’ 사상에 대해서 질문 올리겠습니다. 불교 경전에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걸 이해를 잘 못하겠습니다. 세상에 항상 있는 법은 없는 것이라면 부처님 법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가 다 틀립니다. 그러니까 무상이니 무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틀립니다. 왜? 공했기 때문입니다. 공한 것도 공했는데 그런 언어가 붙을 자리가 없습니다, 본래는. 예를 들어서, 부처님이 한마음을 낼 때는 이 천백억화신이 털구멍을 통해서 찰나찰나 나고 든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영령이라고 그러죠. 영혼, 영령 뭐, 별 소릴 다 합니다마는 그것이 수천수만 개라도 한생각에 될 수가 있는 거고 한생각에 하나도 없어질 수도 있는 거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것도 그렇게 얘기할 것이 없고요, 단 하나, 누구나가 다 자기 자신부터 알고 믿고 거기에서 나오는 거는 거기에 맡겨 놓고 내 마음을 증득해서, 즉 말하자면 정신적인 과학, 정신적인 생활, 정신적인 문화 문명이 발전이 됨으로써, 전체가 화합 단결되고 또는 경제난에도 허덕이지 않을 거고 우리 지구가 수명이 짧아도 또 재료를 다 끌어 잡아 당겨서 다 쓸 수 있는 그러한 그 미묘한 광대무변한 법이, 그 능력이 누구에게나 다 주어질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깐 그렇게 내 마음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고해성사를 할 때도 내가 잘못해 놓곤 신부님한테 가서 고하거든요. 그러면 자기 마음은 순간 편안할지 모르지만 그게 지워지지는 않거든요. 자기가 아는 것 우주간 법계에서 다 알고 있는 건데, 그걸 속일래야 속일 수가 없는데 그게 지워지나요? 그러니 우주의 그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 근본에 직결이 돼 있고 또는 인간살이가 전부 마음에 가설이 돼 있는데, 구태여 내가 어느 사람한테 전가를 한다 그래서 내가 한 일을 잊어버리거나 또 지워버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부터 알아야겠다고 하는 겁니다. 잘못하는 일이 있다면 잘못하는 일을 미리 안 하면 될 거 아니냐. 인간이라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랬는데 그걸 안 하고 하는 건 자기 마음이 아니겠느냐. 그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데 왜 마음대로 못한다고 하느냐 이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 마음의 도리를 진실하게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진짜로 믿고 진짜로 행할 수만 있다면 첫째, 내 몸 안에 들어 있는 그 모든 수십억 마리의 의식 자체가 한마음으로 리드가 되고 조화를 이루고 둘째, 우리 가정이 화목하게 조화를 이루고 편안하고 또는 들이고 내는 데 있어서 조금도 걸림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그 모든 세상, 즉 말하자면 내 나라를 구원받게 할 수 있고 또는 더 나아가서는 내 몸과 같은 지구를 수명을 길게도 할 수 있고 짧게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얻는다는 겁니다. 인간은 지수화풍의 물질로써 생겼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명이 생겨서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진화가 됐습니다. 제일 나중에 된 겁니다. 인간이 되기까지 그 과정이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지수화풍으로 됐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이 재료가 주어져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전력이 나오지 않듯이, 인간에게는 지수화풍이 그렇게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히 재료가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재료가 있기 때문에, 아까 얘기했듯 다섯 가지의 시스템이 돼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 시스템을 자동적으로 굴리는 것은 바로 두뇌입니다. 그것을 일러 누진이라고 합니다. 그걸 시쳇말로 한다면 레이더망이라고 할 수 있죠, 정신 레이더망.

그러니까 이 시스템을 자동적으로 굴리는 데는 나를 발견해서, 나를 발견해 가지고 무(無)의 세계, 유(有)의 세계를 검토하면서 둘이 아닌 도리를 실험하고 공부하는 데서 다 알아질 수가 있는 겁니다.


화두 공부에 대해서


저는 몇 가지 종교에 대해 책도 보고 조금씩 다녀도 보았습니다. 선원은 『삶은 고가 아니다』 『생활 속의 불법수행』 『한마음요전』 이런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됐고 ‘푹 놓고 가자’ 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생활해 보니 정신 건강에 상당히 유익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과 한국의 수많은 선사들이 화두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화두 드는 구체적인 방법을 여러 권의 책에 기록해 놓았는데 선원에서는 왜 화두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이 태초요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이 화두예요. 그런데 그 화두마저도 공했다 했거늘,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라 했거늘 거기에다가 또 남의 화두까지 받아 가지고 ‘이게 뭣고?’ 하고만 있으면서 먹지 못한다면 그것은 십 년, 백 년을 가도 지금 시대에는 아니 된다 이겁니다. 왜냐. 전자에는 그게 씨가 먹혔지만 지금은 모두 머리로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아요. 천체물리학이니 과학이니, 또 지리학이니 의학이니, 천문학이니 이런 것이 전체, 머리에 알음알이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씨가 먹히질 않습니다. 밥 한 그릇 남이 준 거를 들고 ‘이 뭣고?’ 하고선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도 공했고 그것도 공했거늘 어찌 그거를 들고 끊어질까 봐 애를 쓰느냐 이겁니다.

또 좌선을 할 때는 내 안으로 관한다면 그게 같이 들리지만 바깥으로 끄달리면서 좌선을 한다면 그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왜냐. 시간과 공간이 초월돼서 모든 소용돌이가 찰나에 지금 이렇게 돌아가는데, 지구가 돌아가고 혹성이 돌아가고 우주가 돌아가고 사람도 돌아가고 사람의 마음도 돌아가고 고정됨이 없는데, 좌선을 하고 앉아 있으면서 하루 8시간을 앉았다 하더라도 단 5분 한 것만 못하다 하는 것은, 사람들이 좌선을 할 때에 관하라니까 화두를 들고 그것이 끊어질까 봐 애를 쓰면서 ‘이게 뭣고?’ 하는 게 관하는 건 줄 안다 이 소리죠. 새 물이 들어오면서 헌 물은 배출되고 이렇게 돌아가는 시대에, 만약에 그 물을 그냥 두고 있다면 그 썩은 물을 그냥 우리가 쓰는 거와 같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도 그랬죠. 선지식들이 ‘위로 눈을 뜨지도 말고 아래로 내려다보지도 말고 코끝을 내려다보고 아주 정연하게 관하라.’ 이런 말을 했거늘, 그것은 무슨 소리냐 하면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내다봐라. 그리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바로 중도에서, 중용에서, 중심을 잡고 모든 것을 똑바로 중도에서 보라.’ 이런 소리죠.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안 해요. 요새는 너무 아는 게 많아서 그런지 혼란을 일으키고 남의 소리나 듣고 그럽니다. 석가세존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석가세존의 몸뚱이를 믿으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 말씀을 믿고 따르되 진짜 믿는 것은 그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 속에 항상 서리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질을 보고 끄달리지 말고 그 마음을 뚫어보기 위해서 내 마음부터 뚫어봐라 이 소리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나를, 나라는 존재를 버려라 했습니다. 버리는 게 아니라 맡겨 놓으라는 것이죠. 아집을 버리고 말입니다. 그것은 왜냐. 여러분이 여직껏 살면서 고정되게 보신 게 있습니까, 들으신 게 있습니까. 또 말하는 게 있습니까, 가고 오는 게 있습니까. 먹는 것이 고정됩니까. 하나도 고정된 게 없어요. 그런데 자동적으로 이 사람 만나면 이 사람 만나는 대로 뜻과 행과 말이 나가고, 저 사람 만날 땐 저 사람 만나는 대로 뜻과 행과 말이 나가니 그건 무슨 연고냐 이겁니다. 그러니 나라는 게 어딨는가. 누구 만날 때 내가 만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는 없는 게 부처다’ 이런 말을 한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비밀스럽고 이렇게 묘한 이 도리를, 광대무변한 이 도리를 모른 채 그냥 가실 순 없겠죠?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려운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도리를 모르고 간다면 그것은 어떻게 합니까. 인간의 삶이라는 게 똥통 안의 구더기처럼 기어 나오려고 발버둥이 쳤다가 뚝 떨어지고, 발버둥이 쳐서 나올 만하고 살 만하면 뚝 떨어지고, 이런 게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이 독 안에서 벗어나야 하고 자기 몸 안에서 벗어나야 하고 구더기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러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대충대충 산다면 안될 말입니다. 그래서 관하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 마음의 도리를 깨닫고 알아서 모든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그 능력을 기른다면 우리는 아무 걱정 할 것이 없어요. 뭐든지 그대로 참,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그 믿음과 그 발심을 가지고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진짜 공부를 하실 겁니다.

어떤 사람은 주인공이 뭐 있느냐, 주인공도 세우지 말고 무(無)도 세우지 말라 이러지마는 여러분이 무(無)이고 여러분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나를 세우지 않는다면,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본래 세워져 있는 겁니다. 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주인공이 세워져 있지 않습니까? 색이자 공이고 공이자 색인 그 이름 없는 바로 그 주인공이 바로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화두를 또 갖다 붙이겠습니까? 그마저도 이름이 없는데 말입니다. 살아서 숨쉬고 움죽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그 실상을 다 알아보는 것이 여러분의 진짜 화두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다가오는 시련에 숨이 막혀요



끊임없는 숙제가 물밀듯 밀려듭니다.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공부의 재료로 삼아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고는 있지만 순간순간 속아 넘어가는 저 자신을 보면서 정말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다가오는 시련에 숨이 막혀 옵니다. 그렇지만 이 마음의 도리를 배워서 알기에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내가 피해서 도망갈 데도 본시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한발 한발 떼어 놓고 있습니다. 경계에 속지 않고 마음의 길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항상 그런 말씀을 드렸지마는, 여러분이 등에 잔뜩 무거운 걸 짊어지고 급해서 제게 오시면요, 급해서 죽겠는데 무슨 공부냐 이럽니다. 웬 말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짊어지고 지금 안고 갑니다. 그런데 이 짊어진 것부터 내려놔야 숨이 막히도록 다가오는 그것이 다 녹아버린다 이겁니다. 주인공이라는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서 공부부터 해야 하니깐, 자꾸 그 자리를 쥐고 나가면 봄이 와서 스스로 눈이 녹고 얼음이 녹듯이 슬슬 녹아버려서 그냥 줄줄줄 눈물이 비오듯 하면서 자기 자성(自性)의 발로(發露)가, 그때부터 싹이 나오기 시작을 하는 겁니다. 지금 현상이 급해서 안고 가는 모든 것이 스스로 물러나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모르고 그저 앞에 닥치는 것만 급해서 야단들을 하시는데 뒤의 것부터, 짊어지고 나온 것부터 녹이면서 가다 보면 뒤에 짊어진 것이 무쪽같이 뭉청뭉청 떨어지는 사람이 있고, 그냥 차츰차츰 떨어지는 사람이 있고, 한꺼번에 몰락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고난이 있는 것이 공부할 수 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고난 있는 걸 ‘아이구, 감사해라.’ 이렇게 나올 겁니다. 감사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때가 있습니다. “주인공 붙들고 나가니까 너무나 잘되고 좋습니다.” 하다가 “아이구, 요새는 아주 캄캄하고 막혀서 영 안됩니다.” 이럽니다. 그런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되다가 안되는 그 자체가 바로 공부입니다. 잘되기만 하면 그건 공부가 늘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안되는 것도 법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안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할 양으로 노력을 하고, 안되는 것도 법인 줄 알아야 ‘아, 안되는 것도 여기서 나를 다져서 공부시키느라고 이러는구나!’ 하고 감사하게 생각을 할 때에 그건 없어집니다.

그러한 단계가 없으면서도 있듯이, 여러분이 어떤 회의를 느끼지 마시고 그저 훌떡훌떡 넘어가야 됩니다. 이렇게 빠른 세상에 지금 심령학을 하는 사람도 물질로만 나가고 또는 소소한 무슨 잠재의식 가지고 이러고 그러는데, 잠재의식이라는 것은 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우리가 한 것대로 각본대로 감겨 있는 겁니다. 감겨 있는 걸 지금 우리는 송두리째 그냥 녹이는 겁니다. 요리를 해서 우리가 맛을 보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그러니까 요리를 해서 맛을 볼 때에 우리가 ‘주인공’ 하면 벌써 전체를, 이걸 이렇게 말을 할까요? 그릇을 말입니다, 그릇을 시장에 가서 사 왔는데 크고 작은 게 같이 들어 있는 한 세트를 사 왔습니다. 그 한 세트의 그릇은 우주 삼라만상의 전체 세트라고 봅시다. 그런데 이게 크고 작고 아주 조르라니 한 세트거든요. 그러면 내가 용도대로, 즉 말하자면 많은 걸 담으려면 큰 그릇을 꺼내야 하고, 적은 걸 담으려면 조그마한 그릇을 꺼내야 하고 그러죠.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 하면 한 세트이며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빼 쓰는 거는 각자 용도대로 빼 쓰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그래서 한 손에 쥐고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씀씀이에 의해서 용도대로 써라 하는 것은 용(用)만 있는 게 아니라, 모두 근본의 축으로 인해서 돌아가는 그 자체를 쥐고서 하나하나 나투면서, 자기가 큰 거든 작은 거든 즉, 우주의 섭리든 몸의 섭리든, 몸의 병고든지 업보든지, 죽어서 좋은 데로 갈 거를 생각하든지 이런 거 저런 것들을 다 놔버린 상태에서 그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걸 자기가 얼마나 더 잘 압니까? 그러니까 그대로 되는 겁니다. 그대로 스스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이구, 이건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 저건 저렇게 하면 안되는데….’ 하면서 안되는 게 너무 많고 되는 게 너무 많아서 안되는 겁니다, 정말. 되는 것 안되는 걸 다 놓은 사이가 아까 한 세트라는 얘깁니다. 되는 것도 놓고 안되는 것도 놔라 하는 거는 그 되는 것 안되는 것, 죽는 것 사는 것을 거기다 한데 합쳐서 내가 한 세트로 묶어서 모든 것을 근기 있게 축으로 가졌을 때, 그것은 자기 용도대로 다 꺼내서,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빼서 쓸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그걸 갖지 않고는, 그걸 계발 안 하고는, 용(用)의 숙달이 되지 않고는 도무지 안되는 겁니다.

바람이 불어와도 그것도 생명이 있는 겁니다. 바람도 생명이 있어요. 눈도 있고 코도 있고, 혀도 있고 다 있단 말입니다. 날름 집어먹을 수도 있어요. 사람도 그냥 날름 집어먹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 무서운 생명들이에요. 그런데 그 생명이 나와 둘이 아니라면, 그 모습과 내 모습이 둘이 아니라면, 그 용(用) 쓰는 거와 나와 둘이 아니라면, 그게 바로 나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 집어먹을 수가 없어요, 절대로 그거는. 또 그뿐입니까? 어떤 혹성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몰라서 그렇지 병고가 전 세계로 퍼지는 것도 그렇고 한쪽에만 퍼지는 것도 그렇고, 모두가 모습 없는 모습들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몸을 이끌고 가실 수 없다면 가정을 어떻게 끌어갈 수 있으며 어떻게 사회를 끌고 가며, 국가를 끌고 가며, 통일을 바라보며, 어떻게 세계를 조절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를 조절 못한다면 우주를 어떻게 조절하겠습니까? 이 한 점에, 한 점도 내놓을 수 없는 한 점 이 마음에 달렸다는 거를 여러분이 잘 아셔야 됩니다. 너무도 고차원적이라고 하지만 고차원적도 아니고 고차원적 아닌 것도 아닙니다. 이거는 인간의 섭리가 그대로 될 수 있게끔 돼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금(金)이 돼도, 빛을 내서 금빛으로 하여금 수천수만 개로 남들한테 전부 배부돼야 되고 전부 내가 돼야 되는데, 금으로 나와 가지고도 산에서 금방 캐 놓은 금이란 말입니다. 이 도리를 모르면 그거는 빛이 안 났기 때문에 이자도 붙지 않고, 금이 더 늘지도 않고, 빛도 안 나고, 광도 나질 않아서 그냥그냥 그대로 왔다가 그대로 가는 이치밖에 되질 않아요. 요다음에 또다시 태어난대도 좌천될지 올라갈지 덜할지 더할지 그것도 모르면서 우리는 쓰러져 가야 되는 이런 입장입니다.

우리는 그대로 여여할 수 있고 묘법을 그대로 갖고 부처 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생각에 달렸다는 얘깁니다. 한생각에 뛰어넘을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살아오던 습을 녹이기 위해서, 녹이기 위해서 나오는 자리에다 되놔라 이런 소립니다. 여러분이 각본대로 나오는, 팔자 운명대로 나오는, 죄업대로 나오는, 유전성대로 나오는 거기에다가 되놓을 때엔 말 못하는 사람, 귀로 못 듣는 사람, 뭐 별 사람 다 있지마는 서서히 풀려 돌아가죠. 여러분이 그렇게 진심으로써 할 때에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하는 그 결정체의 참뜻을 우리 스스로가 실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행 스님 | 한마음선원장
2006-04-05 오후 2: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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