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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5년(1729), 백매자(白梅子) 선사가 찬술한 <성덕산 관음사 사적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연기설화가 서술되어있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장님 원량(元良)은 홍법사(弘法寺) 금강불사를 위해 시주를 간청하는 성공 스님에게 하나밖에 없는 딸 홍장(洪莊)을 아무런 대가없이 시주한다. 지극한 효심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화주승을 따르던 홍장은 황후를 구하러 백제에 온 중국사신을 만나 황후가 된다. 장님 아버지를 잊지 못하던 홍장은 자신이 원불로 모시던 금동관음보살상을 고국으로 보냈고, 옥과 처녀 성덕(聖德)이 벌교 바닷가에서 모셔와 관음사를 창건한다” -송광사 목판본-
이 설화는 백매자 선사가 “젊은 시절 관음사에서 우한자라는 노스님으로부터 전해 듣고 기록할 뿐이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관음사 사적기는 백제가 불교를 공인했던 때(384년)보다 80여년이 앞서 백제 분서왕 (301년)때 창건됐다고 한다. 백제 최초의 사찰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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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연기설화는 1930년대 김태준의 <조선소설사>에 소개되면서 심청전의 원형, 배경설화로 국문학계에서 공인받고 있다.
17세기 말, 판소리가 정형화 되던 때에 백매자 선사의 관음사 사적기도 판각되었다.
이처럼 관음사에 전하는 효녀 홍장이야기는 호남지역에 널리 퍼지면서 판소리 심청가를 이루게 된다. 특히 곡성과 이웃한 남원의 광한루가 판소리 춘향가의 무대인 것을 보면 지리산 은 한국판소리 2대 명작이 탄생한 판소리 성지이기도 하다.
관음사는 곡성 검장산과 성덕산 사이 좁은 계곡을 타고 10리가량 거슬러 올라간다. 계곡 안에 자리한 사하촌도 ‘성덕마을’로 불리는데 연기설화에 등장하는 성덕보살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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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전, 홍장이 백제에 보낸 금동관음보살상(국보 214호)은 나라의 보물이 되어 관음사 원통전(국보 273)에 자리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전각과 보살상이 불타고 말았다. 기이하게도 잿더미 속에서 관음보살상 얼굴부위가 온전히 남아있어 옛 이야기를 증명하고 있다.
관음사 주지 지인 스님은 “관음사는 내륙에 자리한 관음도량으로 유일하게 고승대덕이 아닌 재가자가 창건한 사찰이다”며 “가난한 장님 원량의 선업공덕과 홍장의 지극한 효심이 널리 퍼져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곡성군도 2001년부터 매년 10월경 심청축제를 열고 효녀심청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축제기간에는 공양미 삼백석 모으기, 시력건강검진, 심청학술심포지엄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