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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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불교사 연구, 민족주의사관 탈피해야"
김상현 교수, 中 시안 국제학술대회서 주장
동북아 불교사상사의 전령사인 구법승들의 중국 내 활동과 업적을 한·중 교류사적 관점에서 조명하기 위해 한중 불교학자 및 역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사)한국불교연구원(원장 정병조)과 서북민족연구중심(주임 쪼우웨이쪼우) 공동주최로 중국 시안(西安) 섬서대학교에서 4월 1일과 2일 열린 ‘한중 불교교류와 서안’국제학술대회가 그것.

한중불교교류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서안에서 열렸다.


이번 대회는 동북아 불교문화의 핵심 지역인 서안에서 그동안 미진했던 한국의 구법승들에 대한 재조명과 학술적 정보교환을 했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번에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섬서사범대 뤼지안푸(呂建福) 교수의 ‘고려 왕조의 기양불교와 동진한 밀교’ 등을 비롯해 총 7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이중 이목을 집중시킨 2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 동국대 김상현 교수-‘중국의 해동구법승에 대한 처우와 인식(불교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김상현 교수
고승전을 비롯한 중국의 여러 불교사적에는 해동구법승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이것은 고대 구법승들의 활동에 국가적인 경계는 큰 장애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속고승전>은 신라의 <원광전>과 <자장전>, 백제의 <혜현전>을 정전에 수록하고, 부전으로 신라의 안승과 원승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실법사, 인법사, 지황 등에 관한 언급도 있다. <조당집>에는 무염, 홍직, 도윤, 현욱, 순지, 김대비 등 신라 말의 선승 11명의 전을 싣고 있다. 설봉의 법을 이은 재운화상 영조(870~947)는 절강에 살았는데, 전왕이 흠모하여 자의를 하사하고 진각이라 호하였다. 복청화상 현눌도 설봉의 법을 이어 천주에 살았는데, 천주의 왕태위가 화상을 흠모하여 자의를 하사할 것을 주청하였다. 혜철(785~861)과 홍직도 서당의 법을 이었고, 범일(810~889)은 염관의 법을, 무염(801~888)은 마곡의 법을, 도윤(798~868)은 남천의 법을 이었고, 순지(833~?)는 혜적의 법을 이었다.

삼고승전에서 해동승이나 서역승 등의 전기를 서술할 경우에도 십과 중의 어느 한 과에 편입할 뿐, 외국 출신의 승려라고 해서 특별히 별도로 분류하거나 차별하지 않았다.

물론 고승전을 비롯한 중국의 여러 불교서적에서 동이, 도이, 삼한이족, 변양, 동번, 번승 등의 용어를 가끔 사용한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이것이 해동승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승전의 분류가 국가적이고 문화적인 경계들을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중국에서의 활동했던 해동의 승려로는 경전의 번역에 참여한 경우도 있고, 학승이나 선승도 있었지만, 출신으로 인해 간경이나 수행에 제약을 받은 경우는 찾기 어렵다. 승랑, 원측, 혜초, 무상, 지장 등과 같이 중국에서 그 명성을 크게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출신으로 인한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동아시아불교사 연구를 위해서는 민족주의사관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섬서성 사회과학원 쳔친푸(陳景富) 연구원-‘9~12세기 중한불교교류의 각 시기별 특징’

진경부 교수
한ㆍ중 불교교류의 최대 전성기는 4~12세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또 △10세기 후반~11세기 △9~12세기 중엽(남종선 유포에 편중된 시기) △12세기 말로 세분화 시킬 수 있다.

10세기 후반~11세기 중국은 대략 북송시기로 한국의 구법승의 숫자는 예전처럼 많지 않았다. 이 시기 구법청익 승려의 대표적 인물로는 의통, 지종과 의천 등으로 그들은 모두 천태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나라에서 1년 남짓한 기간동안 의천은 화엄, 천태 양종의 고승뿐만 아니라 율종, 선종 방면의 대덕들과 접촉, 50여 명에 가까운 각 종파의 고승들을 광범위하게 접촉했다.

9-12세기의 긴 시기 동안 한ㆍ중 불교교류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바로 중국 남종선이 통일신라와 고려왕조에서 보급돼 잇따라 성행하였는데 구체적 시기는 9-10세기 전반이다. 이 시기 구법승들은 136명이며 그 중 73명이 선승이었다. 이 가운데 회양계통이 23명, 청원계통이 35명, 법계가 확실치 않은 선승이 15명이다. 이들 대부분이 중국에서 선풍을 공부하고 귀국했지만 선종 9산은 유일하게 한국불교 특정시기의 산물로 추정된다.

12세기 중말 중국은 대략 송나라 휘종에서 녕종 즉위 초 시기이고, 고려는 숙종에서 신종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 한ㆍ중 불교교류 활동은 12세기 초 1, 2차에 걸쳐 거란으로부터 요판 대장경을 받는 것을 제외하면 당시 중국 내 한국 구법승들의 활동은 ‘0’다. 이러한 원인은 송과 금의 대치 등 투쟁의 분란 국면에서 송, 금, 고려 3국은 서로 엄격히 방범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한ㆍ중 양국이 불교문화 교류를 이룩할 수 있었던 데는 양국이 정치상 밀접한 우호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며 경제, 문화의 광범위한 교류 또한 전제조건이었다.

결론적으로 당시 구법승들은 중국 내 불교의 새로운 정보 등을 주의 깊게 수집ㆍ흡수ㆍ전파해 다시 자국의 실제 상황과 결합시킨 한국 불교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중국 시안/글ㆍ사진=노병철 기자 | sasiman@buddhapia.com |
2006-04-06 오후 3: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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