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불교환경연대는 새만금사업의 대법원 판결과 관련 성명을 각각 발표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순 없다'는 제하의 성명에서 "식량안보를 위해 새만금 간척사업을 해서 농지를 만들겠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라며 "농지가 많고 풍년이 들어 수매가가 가장 낮게 책정됐던 지역에서 농사지을 땅이 모자라 바다를 막아 농지를 만든다는 것은 국민을 바보로 알고 전북민을 우롱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억울한 사람을 최소화하도록 시대정신과 세계관을 반영해야할 대법관들이 아직도 구태의연한 정치적 결정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통탄스럽다"며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대법원의 판결에 직격탄을 날렸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증명되지 않은 경제성만 기준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서 새만금 가치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대중의 공의를 모아나가겠다"고 천명했다.
불교환경연대도 3월 16일 '자연의 순리를 거역한다면 인류의 재앙을 초래한다'는 제하의 성명과 17일 발표한 수경 스님의 호소문을 통해 대법원의 판결을 자연의 순리를 인간의 법으로 강제한 반자연법적인 판결이라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불교환경연대는 "후대에게 상처투성이의 국토를 물려줘야 하는 오늘의 현실에 비통을 금할 수 없다"며 "새만금 갯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교환경연대는 "새만금 갯벌을 지키지 못한 우리들은 참담한 마음으로 제불보살님 전에 참회의 기도를 올린다"면서 "새만금의 평화와 뭇 생명을 살리기 위한 희망의 불씨를 더욱 키워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새만금 대법원 판결에 대한 두 단체의 성명서 전문.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성명서]
농사지을 땅이 없어 새만금을 막는다!
-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순 없습니다.-
“식량안보를 위해 새만금 간척사업을 해서 농지를 만들어야 한다.”
오래전 현대개발이 아산만을 막으면서 했던 말과 똑 같습니다.
현재 아산만은 도시인들에게 300평씩 나눠서 분양을 하고 있습니다.
행정도시 이전과 맞물려 아산만은 농지가 아니라 개발을 위한 투자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새만금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농민을 위해 농토를 개발하겠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새만금도, 아산만도, 결국은 개발업자와 돈이 남아돌아 주체하지 못하는 상위 20%의 사람들을 위한 투자처를 만드는 일입니다.
식량안보를 위한 것이라면 새만금 갯벌을 막아서 바다생명들을 무더기로 죽일 것이 아니라 FTA를 반대해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요?
지금도 남아도는 쌀을 창고에 쌓아두고 외국산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것처럼 모순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전북은 우리나라에서 농토가 가장 많은 지역입니다.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기원을 할 수 없다는 농민의 말처럼 농부가 풍년을 겁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농지가 많고 풍년이 들어 수매가가 가장 낮게 책정됐던 지역에서 농사지을 땅이 모자라 바다를 막아 농지를 만든다는 것은 국민을 바보로 알고 전북민을 우롱하는 일입니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위해 쏟아 부은 돈이 지금까지 4조원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그 넓은 갯벌을 메우기 위해 몇 백 개의 산을 허물어야 한다니 얼마나 더 많은 돈이 들겠습니까?
진정 농민을 위한다면 새만금 갯벌을 메울 돈으로 농민들이 맘 놓고 농사만 지을 수 있도록 농산물에 대한 보조와 지원을 높이고 농산물을 적정 가격으로 책정해 소비자와 생산자에게 골고루 혜택이 가는 정책을 펴야 할 것입니다.
새만금을 막아 농지를 만들면 바다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던 어민들의 생업이 거덜날 것이며 지금도 남아도는 농지를 더 만들면 농민들의 생업도 거덜날 것입니다.
인간은 일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때 사람답고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삶터로부터 사람들을 분리시켜 내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땅값을 다시 올리고 평생 바닷일과 농사일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을 그곳에서 쫓아내는 것은 그분들의 목숨줄과 뿌리를 흔드는 일입니다.
농민들과 어민들에게 삶의 터를 빼앗고 보상금이라는 명목으로 몇 푼 쥐어줘 도시로 내몰면 그분들이 결국은 도시 빈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런 삶은 대대로 되풀이 되는 것이 현재 구조적으로 드러나는 삶의 형태입니다.
‘이번 새만금 간척사업을 경제성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새만금 사업은 계속 하여야 한다’라는 결정을 내린 11명의 대법원 판사님들에게 대단히 실망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억울한 사람을 최소화하도록 시대정신과 세계관을 반영해야할 대법관님들이 아직도 구태의연한 정치적 결정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경제성이 있다는 사업주 측의 논거는 증명이 된 것입니까?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의 검토를 통해 사회통합과 시대정신이 반영되는 통찰력과 지혜로 내려야 하는 결정이 아니었는지요.
그런 와중에도 소신 있게 생명의 가치에 중점을 두어 새만금 사업 중단 결정을 내린 두 분의 법관님들로부터 희망을 읽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위해 애쓰는 모든 분들과 새만금 갯벌 보호와 주민들의 생존권을 위해 애쓰는 모든 분들이 이번 판결로 조금은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늘 반복되어지듯이 새만금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입니다.
새만금에 갯벌은 해수가 흘러야 하고 새만금 간척지 사용 계획은 다시 논의 되어야 합니다.
증명되지 않은 경제성만 기준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서 새만금 가치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대중의 공의를 모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우리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사회가 될 때까지 다양한 방법과 노력들을 모아 갈 것입니다.
2006(2550) 년 3월 17일
생명살림의 연대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불교환경연대 성명서]
화해와 상생의 잔치마당 새만금을 꿈꾸며
봄 바다에 노란 깃발이 올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붉은 만선의 깃발이 아니라 황사 자욱한 절망의 ‘SOS' 깃발, 선상 투쟁의 샛노란 깃발이 올랐다. 생명평화의 바다와 갯벌 위에서 꿈속에서라도 일어나서는 아니 될, 아비규환의 날들이 닥치고야 말았다.
2006년 3월16일 오후 2시, 마침내 대법원의 나무망치 소리가 선전포고처럼 울리고야 만 것이다. 눈앞이 캄캄하다.
어차피 대법원 판결로 새만금의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처참하다. 3년 전 ‘봄이 왔건만 봄이 아니라’며 그 누구를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참회하기 위해 시작한 삼보일배(三步一拜)의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렇다면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단 말인가. 정녕 그렇단 말인가.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된단 말인가. 21세기의 지성과 논리는 어디에 있으며 대의와 정치, 법과 정의, 화해와 상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공든 탑은 무너지고 또 다시 투쟁과 대립의 악순환이란 말인가.
그래도 진인사 대천명의 심정으로 행여나 고대하고 고대했건만 남은 것은 허탈감뿐, 목구멍 깊숙이 죽어가는 갯벌의 썩은 냄새와 신음소리만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저러나 당장 코앞에 닥쳐온 이 죽음의 냄새, 이 죽음의 신음소리, 투쟁과 대립의 아비규환을 어찌할 것인가. 생존권이 짓밟힌 연안 어민들은 애지중지 생계수단이었던 배에다 목숨처럼 깃발을 매단 채 방조제로 달려가고, ‘해수유통, 갯벌을 살리자’며 울부짖는 사람들은 꼬막처럼 꼬막처럼 몰려들고 있으니 이 아수라장의 전쟁을 어찌 피할 것인가.
마지막 물막이 공사가 재개되는 방조제가 끝끝내 ‘제2의 38선’이 되어 생명과 반생명의 끝없는 전쟁을 부추기니, 아찔하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도저히 무슨 엄두라도 낼 수 없으니, 차라리 모든 것은 내려놓고 지난 겨울 동안거에 들었던 조계종 특별선원 봉암사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다.
두 눈을 틀어막고, 두 귀를 틀어막고, 곡기마저 끊은 채 토굴에라도 스며들어 잠적하고 싶다.
그러나 또 어찌 하랴. 지난 겨울 수행자의 본분사로 선방에 들었지만,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니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 먼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산새들의 울음소리며 개울의 아침 물안개며, 열매와 잎마저 다 내어준 겨울나무들 모두가 ‘나 아닌 것’이 없었으며 또한 ‘너 아닌 것’이 없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 어찌 이 불화살을 피할 수 있으랴.
그동안 나의 법당은 해창 갯벌이 아니었던가. 내게 신도들이 있다면 갯지렁이와 꼬막과 백합들이 아니었던가. 그동안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수행자와 운동가라는 ‘말의 가시덤불’이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던가.
실로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수행의 실천이 곧 운동이요, 올바른 운동이 곧 수행’이라고 철저히 믿어온 신념과 불살생의 계율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단순히 반대만을 위한 운동가도 아니요, 종교라는 성역에 기대거나 성역을 함부로 빙자하는 운동가도 아니었다.
‘새만금 삼보일배’가 그러했고, ‘지리산 살리기 운동’이 그러했다. 그리고 당시 이미 많이 진행되었던 북한산 문제 또한 무조건의 반대가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꼭 지켜야할 국립공원을 오히려 국가가 앞장서서 파괴하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개발독재식의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인해 마지노선인 국립공원마저 무너지는 선례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북한산은 뚫리고야 말았다. 대통령은 애초의 공약을 어긴 뒤 슬그머니 불교계와의 야합으로 수도권의 허파에 거대한 구멍을 뚫고 말았다.
그리고 3월16일, 마침내 참여정부는 새만금 문제마저 법의 이름으로 야합을 하고 말았다. 대통령의 말 바꾸기, 그리고 정부의 조정능력과 정치력이 바닥나자 마침내 대형 국책사업을 행정부가 아닌 사법부에 떠넘긴 채 짐짓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이는 야합에도 못 미치는 직무유기이자 방조와 무책임이 아닌가.
일국의 대법원이 국책사업의 담당부처란 말인가.
그러나 부메랑은 언제나 다시 돌아오게 돼있다. 아니, 불행하게도 이미 엄청난 후폭풍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만금은 여전히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생명평화의 시대정신’과 직결되는 화두다. 2003년 당시 나는 <생명평화 실현을 위한 삼보일배 발로참회를 시작하며>라는 선언문을 통해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춘래 불사춘이라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닙니다. 지리산에 매화가 피고 산수유꽃이 피었지만 그 꽃들마저 불안하고 불안합니다. 한반도에 봄바람이 불고 녹색별인 지구에도 21세기의 화두인 생명평화의 푸른 기운이 일고 있지만, 이 봄바람마저 예사롭지 않고 생명평화의 푸른 기운마저 위태로울 뿐입니다.
이는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는 오만한 미 제국의 이라크 침공 때문이자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외면하는 대한민국 개발독재의 광풍 때문이며, 우리 모두의 가슴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죽임의 문화와 투쟁과 대립의 독 기운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20세기적인 ‘죽음의 향연’에 길들여져 스스로 ‘불타는 집’ 속에 갇혀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와 난개발의 뿌리는 서로 다르지 않고 말 그대로 반평화, 반생명, 반환경의 독입니다. 반드시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업보의 화살이자 독일뿐입니다.”<중략>
하지만 3년 전이나 오늘이나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깊이 들여다보면 테러나 전쟁이나 환경파괴는 ‘탐진치의 못난 일란성 쌍둥이들’이 아닌가. 모두 올바르게 극복하고 청산해야 할 20세기적인 것들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미 노태우 정권 때 잘못된 정치논리로 계획되고 지금까지의 숱한 논란 속에서도 여전히 박제화된 채로 진행중인 ‘새만금 사업’ 또한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재정립하는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니 이제 진정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모두 무릎을 꿇고 생명평화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국가 균형발전 시대의 서막을 여는 첫 단추로서 새만금 사업을 핏발 선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봐야 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갈등과 대립의 첨예한 사안들이 첩첩산중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새만금 문제만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새만금은 환경파괴를 최소화하는 지속가능한 발전과 주민 생존권의 문제가 씨줄날줄로 얽혀있는 중요 사안인 동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어느 자리에선가 새만금 소송문제에 대한 질문에 “새만금 사업은 해야 하지만 환경적인 요인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약간의 사업변경은 필요하다는 예전의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그렇다. 문제 해결의 핵심 고리는 사실 재판의 승패가 아니라 ‘약간의 사업변경’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만금 신구상기획단’을 꾸리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노력마저 지역과 부처간의 이기주의 등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쌀 수입 개방 문제 등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듯이 간척사업의 초기 목표인 농지조성의 타당성이 상실됐을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 무슨 용도로 사용될지 목표조차 확실히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규모 국책사업이 강행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대체 어디로, 왜 가야하는지를 정하지도 않은 채 일단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트만 밟는 격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새만금은 잠시 시동을 끄고 이제부터라도 로드맵을 다시 그려보는 새로운 시작일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수조원에 이르는 혈세를 뿌려 미래 세대들에게 환경재앙을 불러들일지도 모를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어찌 묵과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이제서야 때가 왔으니 새만금 사업이야말로 국책사업의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인 결정과정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문제로 진행되어야 하며, 그동안 무책임하게 이뤄졌던 정책 실패와 막대한 혈세낭비의 악순환을 끊는 정책 대전환의 문제로 거듭나야 한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타성적이고도 박제화된 강행은 시화호나 영산호처럼‘실패를 위한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며, 자칫하면 세계 최대의 '반경제, 반생명, 반평화의 웃음거리'를 참여정부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꼴이 될 것이다.
어느새 새만금 갯벌은 우리들의 교회이자 성당이 되었다.
어느새 새만금 갯벌은 우리들의 법당이자 '21세기의 성지', ‘생명평화의 교과서이자 바로미터’가 되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마지막 물막이 공사가 강행되는 방조제는 갈등과 대립과 투쟁을 부르는 ‘또 하나의 삼팔선’이 되지 않았는가. 나는 그저 ‘부안 사건’처럼 또다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전쟁 같은 상황이 두렵기만 할 뿐이다.
낙후된 전북은 힘겹다 못해 ‘새만금은 전북의 희망’이라며 이 사업을 한껏 부풀리며 목을 매고, ‘제2의 시화호’‘영산호’ 를 걱정하는 양심적인 학자들과 ‘우리시대 생명파괴의 상징’ 으로 보는 환경단체와 시민들, 그리고 생존권을 지키려는 일부 주민들 또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새만금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얽히고설킨 실타래들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
먼저 참여정부는 이미 새만금 신구상기획단을 꾸린 바 있듯이 대통령이 직접 초심으로 나서서 합리적이고도 객관적인 기획단의 재구성이나 ‘새만금 특별법’ 등을 통해서라도 확실히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
대통령이 아니라면 농림부와 환경부, 그리고 낙후된 전북도의 이견과 아픔을 과연 누가 있어 중재하고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새만금의 경제적 가치 등을 따지기 이전에 정의와 진실에 대한 대의명분으로 올바른 국가관을 세워야 한다.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미래 세대들의 ‘새만금 1적’으로 남을 수야 없지 않은가.
우선 상대적으로 소외되다 보니 부풀릴 수밖에 없는 전북도의 사업구상과 정부 각 부처의 안, 그리고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대안 등을 종합하여 하루 빨리 중지를 모아야 한다.
입장이 서로 다르다보니 쉽지는 않겠지만 전라북도 주민과 새만금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화해하고 상생하는 노력들이 절실한 가운데, 그 기운들을 일시에 불러 모을 수 있는 해법이 도출되어야 한다.
이는 마지막 물막이 공사가 진행되기 전에, 대립과 갈등의 돌이킬 수 없는 격랑이 휘몰아치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할 절체절명의 관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차피 새만금 문제는 참여정부에서 완성할 수 없는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아닌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올바른 과거청산과 국가 균형발전의 차원에서라도 표류하는 새만금 사업의 로드맵을 완성해 그 내용적 좌표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얽히고설킨 국정의 여러 난맥상들마저 오히려 새만금을 통해서 그 해법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논의된 내용들만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묵묵부답의 국회는 당장 ‘새만금 국정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정치논리로 새만금 문제를 부추긴 장본인들은 이 지경이 되도록 무엇을 했는가. 제대로 국책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해보고 현장을 방문한 적이라도 있는가.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리고 열린우리당이 자성과 참회의 자세로 뜻을 모아 국정조사에 나서야 한다.
국민들을 희롱하는 듯한 정치적인 쇼에만 특별검사니 국정조사 등을 운운할 게 아니라 끝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새만금 정도의 대형 국책사업에 국정조사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사법부에 짐을 떠넘기고 짐짓 모른 척해서야 어찌 민의의 전당인 국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치논리를 제외하면 도대체 주먹구구식인 국책사업을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챙기는 것만이 국회와 국회의원 개개인에 대한 국민들의 조롱과 환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또한 전라북도 또한 스스로 정치논리의 희생양에서 벗어나야 한다.
좀 더 냉철한 시각으로 새만금의 거품이나 환상을 지우고 실질적으로 전북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주력해야 한다. 오죽 답답하면 새만금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가까운 예로 전남의 ‘S프로젝트’ 등에 비하면 그 규모와 예산만으로도 얼마나 초라한 국책사업인가. 또다시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소외되고 말 것인가.
오히려 전북도가 앞장서서 해수유통 등을 통해서도 변산반도와 더불어 새만금을 세계적으로 돋보이는 생태관광지 등으로 보전하고 가꾸어 전 국민의 자랑이 되게 해야 한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개발이 덜된 전북은 이제부터라도 낙후지역이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오히려 전 지역이 생태문화관광의 명소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무조건적인 강행으로 향후 10년간 아니 20여년 내내 반대에 부닥치며 불확실한 사업에 도민들의 생존권을 저당 잡힐 것인가. 달뜬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환경단체나 국민들의 열망에도 귀를 기울여 오히려 그들보다 실질적으로 한발 앞서 나가는 새만금을 구상할 때 진정한 전북도의 발전이 있지 않겠는가.
아울러 환경단체와 주민들 또한 무조건의 반대와 투쟁이 아니라 전북도의 처지와 고통을 헤아리며 인내심을 발휘하고, 동시대의 공범자로서의 참회를 함께 다짐하고 다짐해야 한다. 갯벌 만큼이나 상처받은 전북 도민들을 더더욱 사랑해야 하며 끝까지 부둥켜안아야 한다.
이제 새만금은 더 이상 죽임의 터, 투쟁의 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마침내 새만금은 우리 시대 희망의 터전이어야 하며, 상생과 화해의 잔치마당, 생명평화의 베이스 캠프여야 한다.
언제나‘나의 뿌리는 너, 너의 뿌리는 나다-’
동체대비 사상에 입각해 유정무정의 모든 생명이 평화롭고 청정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며, 그저 세 걸음에 한번 절을 하는 ‘삼보일배’의 절절한 심정으로 뭇 생명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 구할 뿐이다.
제2의 불화살이 날아온다. 그러나 굳이 피하지는 않겠다.
불기 2550년 3월16일
수경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