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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아버지ㆍ어머니께 따뜻한 밥상을"
[도반의 향기]'사랑의 밥차' 요리사 김종원씨
손부터 살폈다. 솥뚜껑 같다. 왼손바닥 군데군데에 칼자국이 선명하다. 소싯적 주먹을 썼던 손. 하지만 지금, 그의 손이 밝다. 조직폭력배의 어두운 기억은 산화되고, 요리사의 맛깔스러움이 손금 마다 배어있다. 손이 그간 살아온 인생을 말하는 걸까? 손끝에서 억척스런 그의 삶이 묻어났다.

사랑의 밥차 앞에서 요리를 내보이는 김종원씨.


# 흐릿한 기억속으로
‘사랑의 밥차’ 주방장 김종원(47)씨.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야만 했던 유년기를 말했다.

“자세한 기억이 없어요. 아버지가 연탄 화덕 공장을 했다는 것과 엄마가 나를 업어줬던 기억, 그리고 엄마 손을 잡고 학교 담벼락 길을 함께 걸었던 것만이 어렴픗이 생각나요.”

너무 어렸다. 어머니의 이름조차 몰랐고,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집나간 엄마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종원이 엄마가 야밤에 부산으로 도망갔데.’ 몸서리치게 어머니가 그리웠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향 광주를 떠났다. 엄마가 있다는 부산. 무작정 열세 살 어린이는 부산행 버스 의자에 몸을 몰래 숨겼다.

# 무서울것 없었던 주먹 인생
부산 생활은 힘겨웠다. 식당에서 일한 돈도 떼이고, 고속버스 터미널 깡패들에게 얻어맞으면서 감금도 당했다. 그러다 접어든 조직폭력배 생활. 스무 살의 청년 김씨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스물 여덟 살까지 주먹을 썼죠. 중간 보스까지 올라가니, 제가 하는 말이 ‘법’이었어요. 늘 칼 맞고 머리 깨지는 생활이었지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죠.”

그러던 어느 날. 김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일이 벌어졌다.

무도회장 관리를 놓고 다른 조직폭력배들과 싸움이 붙었다. 당시 지역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날 정도였다. 질펀한 싸움판이 벌어졌고, 김씨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3일 만에 깨어났죠. 일어나보니 온 몸에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어요. 죽었다 다시 살아난 느낌이었지요. 1주일간 병실 신세를 지며 이렇게 생각했죠, ‘아! 이 길을 가서는 안 되겠구나’ 퇴원하고 큰 형님에게 애걸했죠. 저를 놓아달라고….”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를 매주 만나 기쁘다는 김종원씨. 김씨는 사랑의 밥차가 행복을 나르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 아버지 임종도 못 지킨 불효자식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한달간 돌아다닌 끝에, 짤막한 소식만을 접할 수 있었다. 2년 전에 이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셨다는 것. 술로 살았다.

‘아버지!’ 그 한 마디에 김씨는 눈물을 훔쳤다.
“어르신들 볼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나요. 불효를 많이 했는데…. 많이 다퉜지요. 철없이 아버지를 밀쳐 상처를 입힌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 세상의 아버지·어머니를 만나다
1989년 겨울, 김씨는 서울로 올라왔다. 건강원을 차려 돈을 벌면서부터 인근 고아원과 노인정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뵙듯 어르신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너무도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제대로 끼니를 잇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길로 곧장 독거노인, 고아원, 장애시설을 찾아 나섰지요.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비록 한 끼지만 따뜻한 밥상을 차려드리자’고 마음을 먹었지요. ‘사랑의 밥차’를 하게 된 계기였지요.”

그렇게 ‘사랑의 밥차’는 시작됐다. 차에서 요리도 하고, 어르신들 모시고 관광도 해드릴 생각에서였다. 봉사가 늘어나자, 김씨는 아예 2004년에 사비 1억 2천만 원을 들여 대형버스를 구입했다. 비상금, 대출,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18년간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어요. 경기도 나눔의 집, 분당 정성노인의 집 등 기억조차 할 수 없지요. 차가 갈 수 있는 곳은 다 간 셈이죠.”

아! 아버지. 임종도 못지킨 불효자라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어르신들 앞에선 귀염둥이 막내아들
밥차는 음식만 나르지 않는다. 혼자 사는 어르신들에게 웃음까지 선사한다. 단 한시간이라도 웃음을 전해드리기 위해 김씨는 어르신들의 ‘막내아들’이 되곤 한다.

“곤란한 경우도 제법 있어요. ‘나 이거 이빨 없어 못 먹어’ 하며 한 끼 식사를 거절하는 어르신들도 있거든요. 그러면 맥이 빠지곤 하죠. ‘어떻게 할까?’ 대뜸 이렇게 말해요. ‘엄마! 엄마! 놀랬지? 히히히’ 너스레를 떨면, 어르신은 금세 웃으세요. 그리고는 제가 ‘엄마! 아 입 열어, 나도 한 입 넣어줘’하면, 어르신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지요.”

어르신들이 행복해할 때, 보람을 느낀다는 김씨. 어르신의 마음 한 구석에 차지하고 있던 미안함이 녹아들 때 비치는 미소에서 끝없는 기쁨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봉사가 끝날 때는 눈물 겨워요. 자식 같은 저한테 비닐봉지에 이것저것 싸서 주는 어르신, 꼬깃꼬깃 접은 돈을 바지춤에서 주섬주섬 꺼내 주는 어르신, 돌아가신 부모님 같다는 생각에 눈물이 절로 나오지요.”

올해 초 경남 하동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밝게 웃는 김종원씨.


# 가족공동체 일구고 싶어요
취재가 끝날 무렵, 김씨는 꿈 한 가지를 내비쳤다. 독거노인을 모시고 가족공동체를 일구고 싶다는 것. 매주 찾아가는 ‘사랑의 밥차’ 공간이 한계가 있어, 많은 어르신들에게 공양을 자주 못 올리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이 언제든 찾아와 한 끼를 드실 수 있는 상실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것이 김씨의 희망이다.

“밥차는 정기적으로 1주일 또는 2주일에 한 번 나가는데, 보통 한번에 50만원 정도 들어요. 차가 크니 기름값이 30만원이 넘지요. 음식재료비보다 유류비가 더 드는 셈이죠. 유류비가 없어 밥차가 못 나갈 때도 있어요. 근근이 밥차의 경비를 유지해오는 것이 힘들기도 하죠. 하지만 그래도 힘이 나요. 제가 요리한 음식을 드실 어르신들을 생각하면요.”

봉사하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김씨. ‘가족공동체’를 만들려는 바람 때문인지, 늦은 저녁 식당일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다.
글=김철우 기자·사진=고영배 기자 |
2006-03-09 오전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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