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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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열정 나눠 드려요”
[도반의향기]꿈바위불교교육원 공세화 원장
“오늘도 서울역의 어려운 분들을 공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믿음 안에서 보살도를 실천하면서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서울역 노숙자 분들이 건강을 회복해서 사회 속에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2월 9일 서울 중곡동 ‘꿈바위 불교교육원’. 허름한 4층 건물 꼭대기에서 우렁찬 기도 소리가 흘러나온다. 기도가 끝나자 10여명의 불자들은 불단 위에 쌓여있는 떡을 비닐봉지에 싼다. 그 중심에서 희끗하게 센 머리로 불자들을 지휘하는 사람. ‘꿈바위 불교교육원’ 공세화(65ㆍ법명 홍증) 원장이다.

중곡동 꿈바위 불교교육원에서 불자들과 함께 경전공부를 하고 있다


공 원장과 신도들이 서울역 광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날이 궂다. 눈발이 흩날려 시야가 흐릴 정도다. 공 원장은 아랑곳 않고 양손에 봉지를 감아쥔 채, 신도들에게 말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지극정성으로 떡을 나눠드려야 합니다. 복을 받겠다는 생각도 하지 마시고, 불쌍타는 생각도 마세요. 그저 이웃을 대하는 마음만 가지세요.”

서울역에서 ‘먹을거리 나눠주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공세화 원장. 벌써 20년 째 김밥ㆍ주먹밥ㆍ계란 등의 먹을거리를 보시해왔지만 한 번도 특별한 행사라 생각한 적이 없다. 그에게 서울역은 나눔의 장소이고, 배고픈 이웃과 먹을거리를 나누는 기쁨의 도량이기 때문이다.

나눔을 끝내고 공 원장이 돌아가는 곳은 ‘꿈바위 불교교육원’. 20평 남짓한 공간에 법당과 살림을 함께 꾸리며 살고 있는 그곳은 공 원장의 ‘생활불교’ 터전이다. 불자교육을 위해 바친 세월이 ‘꿈바위’ 안에 켜켜이 쌓여있다.

공 원장이 떡을 들고 서울역 노숙자들을 찾는 모습


사실 공 원장의 첫 사회봉사활동은 불교 안에 있지 않았다. 1976년 설립된 ‘꿈바위’의 이름도 ‘꿈바위 사회교육원’이었다. 그것이 공수도 유단자인 공 원장의 사회를 향한 첫 발걸음이었다. 그 때 내건 것이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태권도장에다 국어, 사회 등의 학습지도까지 붙여놓으니 찾는 사람이 꽤 많았다. 이윽고 지점은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5년 정도 지났을까, 공 원장은 세속적 성공이 그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불교’와 이어진 인연이 공 원장에게 이미 삶의 일부가 됐기 때문이다.

“교육 사업을 하다 보니 새로운 꿈이 제 안에서 솟아올랐어요. ‘할머니부터 아이들까지 무료로 제대로 된 불교를 가르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게 만들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꿈바위’를 불교교육원으로 바꾸는 데는 성철 스님의 영향이 지대했다. 경남 산청 출신인 공 원장은 성철 스님의 초등학교 후배. 나이차는 크지만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할 때부터 드나들면서 법문을 듣고 담소를 나눴다. 공 원장은, 성철 스님을 친견하기 위한 ‘통과의례’ 3천배 없이 내담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재가불자 중 하나였다.

생활불교를 표방하며 공양물 나눔운동을 펼치고 있는 꿈바위 불교교육원 공세화 원장이 서울역 노숙자에게 떡을 전달하고 있다


“성철 스님께서도 우리 불자들이 제대로 알고 생활에서 불법을 실천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셨어요. 스님 말씀에서 저 역시 불자들의 교육에 제 인생을 걸었지요.”

그럼 공 원장이 ‘꿈바위’를 통해 ‘생활불교’를 이끌어내려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공 원장에게 ‘생활불교’는 무슨 의미이기에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놓지 못하고 있을까.

공 원장의 ‘꿈바위불교교육원’에서는 여느 사찰이나 포교당에서 접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성철 스님이, 매일 한 번씩 읽어 중생들이 업장을 소멸하는데 사용하라고 일렀다는 <대불정능엄신주> 독송과 맨발 백두대간 산행 등 일반인의 눈으로 보자면 유별난 것 투성이다.

여기에 더해 <금강경> <지장경> 등의 경전도 함께 독송하고 뜻도 새긴다. 기도일이 정해져 있거나 공부하는 날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언제 와서 공부를 하건, 공 원장은 불자 한 명 한 명에게 교육하는 것을 신조로 삼는다. 의문 점이 있으면 서로 묻고 답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공 원장의 교육 방식이다.
다만 공 원장의 원칙은 공부 후 실참수행이 따르고 반드시 회향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회향이 바로 서울역 ‘먹을거리 나누기 운동’이다. 누구든 서울역 회향은 ‘실천 코스’로 반드시 거쳐야 한다. 공 원장은 공부만 잘 하는 것도, 회향만 잘 하는 것도 틀렸다고 말한다. 부처님 법을 배우고 오롯이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생활불교’라 믿기 때문이다.
한 때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혹독하고, 힘들다고 소문나기도 했다. 그 탓인지 공 원장의 교육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가장 오래된 신도 박거명(58) 보살도 “처음에는 솔직히 너무 엄격한 원장님 때문에 울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지금 박 보살은 그 누구보다 공 원장의 뜻에 동조하고 공부하면서 회향하고 있다. 박 보살뿐만 아니라 신도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원장님 아니었으면 아직도 절에 가서 ‘이거 해 주세요’ 하고 빌고 있을 거예요. 내가 부처님 법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렇게 나누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고요.”

그러나 알아주는 신도들이 늘어도 현실은 공 원장이 꿈꾸는 것만큼 따라와 주지 않았다. 너무 실천을 강조해서인지, 쉽게 살고자 하는 세대들에게 공 원장의 방법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20년 넘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의 꿈은 꿈바위 안에서 꿈틀댄다. 그 꿈을 현실로 한 걸음 더 내딛게 하기 위해 공 원장 역시 오늘도 공부하고, 기도하고, 회향하는 3단계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몸, 부처님께 의탁해서 법당 하나 잘 건사하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지금껏 살아왔다.

손윗누이 등 가족들에게는 걱정을 많이 끼쳤지만 공 원장에게는 더 큰 포부가 있기에 뒤돌아볼 것도 없고 미련도 없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한 법당이고 신도 수도 많지 않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소위 ‘치마 불교’가 달라지고 불자들이 바로 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안에 ‘꿈바위’가 우뚝 설 날이 있을 거라 자신합니다. ‘꿈바위’의 꿈이 널리 펴질 때까지 나는 쉬지 않을 것입니다.”

글=김강진 기자ㆍ사진=박재완 기자 | kangkang@buddhapia.com
2006-02-21 오전 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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