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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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삶…타인에 고마운 줄 알아야"
큰스님 편안하십니까-도원 스님(조계종 원로의원)
“스님, 덕담 한 말씀만 듣고 가겠습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요.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말할 줄도 몰라요.”

무작정 뵙기로 작정하고 파계사 대비암을 오를 때만 해도 스님께서 이렇게 완강히 취재를 거부하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친걸음에 몇 말씀이라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간곡하게 말씀을 청했다.

“경을 알고 싶으면 강사를 찾아가고 율을 알고 싶으면 율사를 찾아가면 되지 율사도 강사도 법사도 아닌 나한테 무슨 말을 들으려 하시오. 부처님 말씀에 알지 못하면서 말하면 죄가 된다고 했어요. 내가 나를 아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젊고 훌륭한 스님들 많이 있는데, 나이 80먹은 노인한테 무슨 말을 들으려고…”

도원 스님 상좌로 스님을 모시고 있는 대비암 주지 법준 스님도 “멀리서 왔는데 몇 말씀 해 주시지요”하며 거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간신히 사진 몇 장 정도는 찍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스님과 마주 앉았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원로회의 의장을 지내셨던 도원 스님. 도원 스님이 언론과의 접촉을 끊으신 것은 2004년 3월 3년간의 원로회의 의장직을 그만두시면서부터다.

원칙과 소신이 뚜렷한 원로로 존경받고 있는 도원 스님. 하지만 그만큼 실망도 크셨던 것일까. 스님의 첫마디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나. 아무리 그래도 늙은이 고집은 못 꺾을 것인데…. 파계사에 온지 30년 됐습니다. 주지를 23년간 하고 대비암에 올라온 지도 꼭 10년 됐어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찾아온 사람에게 나름대로 포교를 한다고 했는데, 아무 효과가 없어요. 전혀 변함이 없어. 법화경이나 금강경을 묻는 신도도 없고, 잘사는 방법을 묻는 신도 하나 없습니다. 법문할 때 혼을 내도 복만 달라고 하니 말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지. 종단도 종단대로 걱정이 많고….”



겨울 초입에 든 감기 기운이 아직도 남아있어서인지 이따금씩 스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실 스님은 요즘 그리 건강하지 않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신경을 써야 할 상태라고 법준 스님이 귀띔한다. 하지만 예불과 하루 10시간 이상의 기도는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으신다고 한다.

“다 우리 스님네들 잘못입니다. 우리 국민성은 어디로 갔고 도덕성은 어디로 갔습니까. 내가 잘못했고 우리 스님들이 포교를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단은 종단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걱정거리가 많으니….”

갑자기 말씀을 하시다말고 이제 할 얘기 없다며 얼어서시더니 가사를 수하신다. 저녁예불 시간이 된 것이다. 처소를 나선 스님은 법당 앞 석탑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석탑을 향해 절을 하시기를 세 차례 반복하시더니, 법당 옆 대웅보전 앞에서 몇 차례 절을 하신 뒤 10여분 동안 정근을 하신 뒤 다시 법당으로 돌아와 예불을 올리셨다.



스님의 하루는 새벽 4시 저녁예불 때와 똑같은 방식의 새벽예불로 시작된다. 오전 11시 사시예불까지 합쳐 하루 세 번의 예불을 빠짐없이 올린다. 탑을 돌 때는 염주를 돌리면서 <무량수경>에 나오는 12분의 아미타부처님 명호를 세 번씩 된다. 그리고 요사채 옆 관세음보살상 앞에서는 나무관세음보살을 108번 염송한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1~2시간 가량 정근을 하신다.

스님은 새벽ㆍ사시ㆍ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좌선을 하거나 경전을 읽으신다. 좌선과 독경하는 시간만도 10시간 정도나 된다. 거의 하루 종일을 예불과 경전독송과 좌선으로 보내고 계신 셈이다.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을 만나기는 하지만 인사를 받는 정도에 그친다.

여의치 않은 건강에 무리가 아니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스님은 “중이 할 일이 이것 말고 또 있는가” 하신다.



스님의 방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런저런 장식품들이 없어서인지 깨끗한 느낌이 더해졌다. 깔끔하고 소탈한 성격대로 스님은 꾸미는 것을 싫어하신다. 애지중지 하는 것도 없다. 있다면 하루 종일 스님 손을 떠나지 않는 염주 정도다.

다시 스님과 마주 앉았다. 인간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여쭈었다. 스님은 ‘사람 사이의 도리’를 강조하셨다.

“상대가 진심을 몰라준다고,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할 것 없습니다. 감동시켜 보겠다면 그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저 도리만 다하면 됩니다.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저 도리만 다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망만 쌓입니다. 갈등을 풀려면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쉽게 되는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버려야 합니다. 내가 할 바를 다한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면 상대도 달라질 것입니다. 금생에 다 알아주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는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집착을 버리세요.”



도원 스님을 뵌 후 법준 스님이 도원 스님 몰래 도원 스님께서 젊었을 때 공부하셨던 공책 20여 권을 내보이셨다. 옛날 공책에 깨알 같은 글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화엄경 등 각종 경전을 베낀 것이다.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던 당시 작성된 노트들이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한자도 놓치지 않고 공부하려 했던 스님의 열의가 느껴졌다.
누가 봐도 명필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스님 필체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혼이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성이 가득담긴 한자 한자는 왜 사람들이 도원 스님을 존경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대비암은 노란 잔디로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적당한 규모에 깔끔하고 온화한 법당 앞마당은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간간히 찬바람이 지나가는 법당 마루에 걸터앉으면 하늘과 땅 중간쯤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대비암은 스님을 닮았고, 스님은 대비암을 닮았다.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깊이 우러나는 사람 냄새가 대비암 구석구석에서 묻어난다.



도원 스님은 지금도 손수 삭발을 하신다. 도량 구석구서의 잡풀을 뽑고 이곳저곳 어루만지시는 일도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나이가 있으셔서 그렇지는 못하지만 손수 속옷을 빨아 입으셨던 도원 스님은 여전히 검소하고 소탈하다.

법준 스님은 도원 스님께 저녁 문안을 여쭙고 난 뒤 이런 말을 했다.
“노장님 모시고 사는 건 복이지요. 부처님 모시고 산다고 생각해요. 우리(상좌들)는 모이면 이런 얘기를 합니다. ‘30년 뒤에 우리도 저런 모습이 될까’ 하고요.”


도원 스님은?

도원 스님은 192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41년에 파계사에서 고송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51년에 동산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월정사와 파계사 주지를 거쳐 학교법인 능인학원 이사장과 조계종 선관위원장 및 중앙종회의원, 동국학원 이사를 지내는 등 종단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 후 1997년부터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2002년부터 2004년 3월까지는 원로회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는 원로의원으로 있으면서 파계사 대비암에서 10년째 주석해오고 있다.
강직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으며, 지금도 신도들을 대상으로 경전 강의를 하고 있을 정도로 신도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다.


스님의 가르침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집착에 얽매이게 됩니다. 어떤 이는 지나치게 집착하는 자신을 경계하면서도 순간순간 그 경계심을 놓치며 집착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길 바라는데, 이것도 큰 집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집착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집착해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겨봐야 합니다. 집착하게 되면 결국 자기 마음의 골만 깊어집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집착하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나무관세음보살을 자꾸 불러보세요.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수시로 그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관세음보살을 부르라 이 말입니다. 집착이 깊어지면 병이 됩니다. 그 때는 상대가 변해도 변한 줄 모릅니다. 상대가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했다고 해서 원망하면 집착을 벗을 수 없습니다. 이유없이, 조건없이 이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더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이해를 구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이만큼 하는데, 너는 왜 그만큼 못해주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 반드시 양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됩니다. 나한테 안 맞아도 양보할 줄 알아야 화합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죄 가운데 가장 나쁜 죄가 화합해서 잘사는 대중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욕심없이 사람을 대해야 하는데, 욕심을 갖고 대하니까 제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저마다 욕심을 부린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보면 자기밖에 모릅니다. 이웃을 생각하지도 않고,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든 알 바 없다는 식이에요. 대가도 없는데 굳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참음은 대가없는 참음이 돼야 해요. 극기라는 말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조정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화를 삭이고 표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입속에 진심(塵心)이 없어야 해요. 그래야 말이 향기롭고 마음 속에서도 진심이 없어집니다.

생각해보세요. 신경질 부린다고 무엇이 달라집니까. 신경질 부리는 순간 나를 속이는 것입니다. 노력한 대가만큼 받아서 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설혹 대가보다도 덜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복을 저축하는 것이니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복 얘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복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복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오늘 업을 지으면 내일 그 결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운명을 개척한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말은 복을 잘 지어서 그 결과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인(因)을 짓지 않고 어떻게 좋은 과(果)를 바라겠습니까. 좋은 인을 짓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을 착하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운명을 개척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복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복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을 원망하는 마음은 자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데 세상에 벌어질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내가 있음으로 해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모두가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한 것이니, 좋고 나쁨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내 업으로 여기고 그 업을 녹일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도 너무 양보하면 바보같이 보인다고 생각하겠지만 조금 못난 것이 좋습니다. 참말로 못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볍게 보지 못합니다. 양보하는 것은 큰 능력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능히 참는 것을 보살심이라 하고, 참지 못하면 중생심인 것입니다. 그냥 참는 것하고 욕된 것을 참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욕된 것을 참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까지도 능히 참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욕입니다. 그리고 인욕은 하심할줄 알아야 할 수 있습니다. 경계에 부닥치면 가르침을 잊고 본성이 드러나기 쉽습니다. 그때마다 다시 챙겨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전부 남의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늘 땅 물 불 공기의 힘으로 살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나를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니, 그 은혜가 막중합니다. 이중 하나도 결여되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마움을 몰라요. 왜 자연재해가 많아졌겠습니까. 아끼고 돌봐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사람 인(人)자는 서로 더불어 의지하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인데 혼자만 잘 살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 광활한 천지 속에 나 혼자 있다고 해봐야 살 수 없습니다. 이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지요. 그렇게 보면 고맙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두에게 고마운 생각을 갖는다면 불평할 게 없는 거지요.

내 생각과 행동이 남에게 어떤 피해가 가는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이 많이 부족합니다. 교육으로 이것을 극복해야 하는데, 요즘은 상급학교 진학하는 데만 온 신경을 쓰느라 인성교육은 무시하고 있어요. 그러니 인성이 메마르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지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 법당에서 법문을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법문이 끝나고 공양간에 가면 딴 행동을 합니다. 불과 몇 분도 안돼서 법문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럴 바에야 법문을 왜 듣습니까.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왜 들으려 합니까.

법문이 너무 흔합니다. 어려운 속에서도 법문을 들으려는 마음이 일어나야 진짜 법문이 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말을 해준다고 해서 법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들은 대로 따르려고 노력해야 법문인 것입니다. 사경을 왜 합니까. 사경을 하면 공덕이 되고 공부가 된다고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경을 하면서 온갖 욕심이 머리 속에 꽉 차 있으면 공덕이 되고 공부가 되겠습니까. 법문이 되고 안 되고는 말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명우 기자 |
2006-02-11 오전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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