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여관을 얘기할 때는 일엽 스님, 나혜석, 이응노 이 세 사람을 떼어놓을 수 없다. 한때 나혜석이 주석했고 이응노 화백이 머물렀으며 일엽 스님이 속가의 아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곳이 바로 수덕여관이다. 여관 현판도 이 화백이 직접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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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 스님뿐일까? 수덕사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을 찾아왔던 가족들도 아마 이곳에서 머무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수덕여관은 세간과 출세간의 가운데 놓인 ‘인연의 가교’가 아니었겠는가.
신여성이자 여류화가 나혜석은 1937년부터 1943년까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나혜석은 작품활동을 하며 선승처럼 수행자처럼 단촐하고 조용하게 살았다. 출가를 하지 않았지만 승복을 입으며 무소유ㆍ무애행을 실천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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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출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일화가 내려온다. 하나는 당시 출가해 수덕사 견성암에 머물던 일엽 스님을 찾아가 출가할 뜻을 비쳤으나 무산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덕사에 주석했던 고승 만공 선사가 몇 번이나 찾아온 나혜석에게 인연이 아니라며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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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화백은 인근 홍성 출신이다. 이 화백의 생가와 수덕여관은 차로 10분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다. 이응노 화백은 선배였던 나혜석을 만나러 오면서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수덕여관에 드나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1944년 여관을 사들였다.
1958년 후배 화가인 박인경씨와 함께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수덕사 부근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렸다. 이 화백은 수덕사를 드나들며 스님들과 인연을 맺었고 덕분에 수덕사는 의식 있는 문인 예술인들의 보림처로 많이 애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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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화백이 프랑스로 떠난 후에 본부인 박귀희씨가 시어머니를 모시며 여관을 운영했다. 2001년 박씨가 사망할 때까지 이 화백의 흔적과 정갈한 음식맛 등에 반해 수덕여관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일엽 스님이 일본에 남겨두고 왔던 속가 아들 일당 스님이 열네 살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 어머니를 처음 만난 곳이 또한 수덕여관이다. 일당 스님은 학생시절 모친을 찾아 수덕사를 방문할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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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엽 스님은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고 했다. 아들은 이후에도 어머니를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었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식을 대하듯 일엽 스님의 아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예술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수덕여관은 여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한 충남도에 의해 1989년 도(道) 지정 문화재기념물 103호로 지정됐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지난해 12월 수덕여관을 '보존해야 할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수덕여관을 수덕사에 증여한 이응노 화백의 손자 이종진씨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정취가 남을 수 있도록 관리해달라”고 수덕사에 요청했다. 수덕사 이인수 종무실장은 “등기 이전 작업을 마치는 대로 현재 논의 중인 문화공간, 템플스테이 등의 수덕여관 활용방안이 매듭지어 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