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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간에서는 “보이차, 별 불일 없는 차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난한 변방소수민족들이 마시던 조잡한 차를 홍콩, 타이완 장사꾼들이 유행하게 만든 것이 보이차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시류에 따라 상인들의 ‘띄우기 작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20세기 상업주의에 의해 탄생된 최고의 걸작품이 바로 ‘보이차’라는 것이다.
상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학자의 연구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학자의 선행연구 성과를 통해 상품의 시장 활성을 이끌어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이미 유통되고 있는 상품을 후속작업을 통해 연구하는 것이다. 보이차 연구는 후자에 속한다. 뒤늦게 출발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의 팽창속도에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주소이다. 그러는 동안 보이차 시장은 너무 커버렸고, 결국 학자들의 연구는 항상 뒷북치는 결과만 낳게 되었다. 물론 필자의 연구도 그 중의 하나다.
‘묵힘’이라는 것은 시간적 흐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다. 그럼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처럼 보이차는 진정 별 불일 없는 차인가? 역사적으로 중국 상류층으로부터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던가? 이 질문에 대한 지금의 필자의 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금의 답’이라는 의미는 몇 개월 전만해도 필자의 답이 ‘그렇다’라는 오류를 범했다는 얘기이자, 그러한 잘못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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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보이차는 적어도 청나라 초기부터 중국 집권층, 상류층들이 마셨던 차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기록이 발견된 최초의 글은 한국의 문헌에서 비롯되었다. 조선과 청나라간의 정치ㆍ외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기록문학인 <연행록(燕行錄)>이 그것이다. 연경(燕京)은 북경 즉 지금의 베이징을 말하며 청나라 때의 이름이다.
고려 때부터 외교 사신들의 임무수행 이외 많은 식자들이 사행(私行)으로 중국에 건너가 외국의 제도나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기록은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다. 사행에 참가하여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당대의 지배층 식자들로서 그들이 만나고 보았던 연경의 실상은 청나라의 지배계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에 그들의 기록은 곧 청나라당시의 풍속도이자 현실문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연경에는 보이차가 있었다. <연원직지(燕轅直指)>와 <계산기정>에서 모두 보이차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보다 상세하게 소개한 것이 <연원직지>다. “차의 품목의 수는 다양하다. 그들은 황차(黃茶)와 청차(靑茶)를 항시 이용하며, 그 다음은 향편차(香片茶)이다.
그러나 가장 진귀하게 여긴 것이 보이차다. 다만 가짜가 많다는 것이다”라는 기술은 당시의 수도인 연경에서도 ‘짝퉁’ 보이차가 등장할 만큼 수요층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당시 권력 지식층의 기록한 한문으로 쓴 연행기 이외 여성 및 일반 독자를 의식하여 별도로 쓴 국문본인 <병인연행가(丙寅燕行歌)>와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도 보이차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19세기 지식인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도차변증설’에서는 보이차의 인기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연도(燕都)에서는 차의 품목이 많고 성행하는데, 이 중 보이차가 제일이요, 백호차(白毫茶)가 둘째, 청차가 셋째, 황차가 넷째다”라고 했다. 특히 오늘날 ‘고증학의 총화’로 평가받고 있는 이규경의 고증은 당시의 보이차가 진귀함과 더불어 인기의 척도를 가늠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청나라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실에서도 보이차를 마셨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청의 건륭황제는 보이차에 대해 “오직 보이차만이 묵직하고 품위가 있다 … 육우도 응당 서투름과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라고 하였고, 조선 정조의 둘째 사위이기도 한 홍현주(洪顯周)는 “대나무 차통에서 고운 흰 비단을 풀어보니 둥근 달과 같은 보이차가 보인다” 등의 시구(詩句)를 남겼다. 이러한 기록들은 보이차가 21세기뿐만 아니라 17세기 청나라 때부터 이미 중국의 최고명차로써 권력의 중심에 서있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