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후기 대표적 문인이자 고위관료였던 홍석주(1774~1842)가 송광사를 방문한 뒤 1828년(순조 28)에 지은 <조계산 송광사 유산록>이라는 현판에 나오는 내용이다.
현판은 신문이나 잡지가 없었던 당시 사찰을 사랑했고, 좋아했던 사람들의 유일한 소통매체였다. 하지만 현판은 다양한 내용과 표현의 자유스러움으로 인해 비석에 새긴 정제된 금석문과 달리 공적인 글로 인정받지 못했다. 요즘 들어서는 한문으로 돼있어 해독이 어려워 대중들에게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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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한낱 나무조각으로 치부되는 현판의 내용을 해석하며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느끼는 맛에 푹빠져 있는 신대현 박사(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가 <한국의 사찰 현판2>를 펴냈다.
이 책에는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 훼손되어 가고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30여 사찰의 가치높은 현판을 추려 내용과 번역, 해설이 실려있다.
책을 보면 현판이 이제껏 우리가 알아왔듯이 단순하게 절의 중수에 관한 이야기나 자화자찬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현판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당시 스님들의 마음가짐, 그리고 사회상, 현대인들과 그 시대 사람들의 화해에 대한 내용등이 다양하게 담겨있다.
조선 후기 문신이며 의정부 종1품 좌찬성을 지낸 김병기(1818~1875)는 조상대대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신륵사의 중건과정을 기록한 <신륵사 중수기>(1860년 작)에서 ‘사찰의 흥폐는 세상의 가르침과 무관한 것이며, 따라서 유학자들이 신경 쓸 바는 아니다. 드러나 그래도 두 가지 이유에서 폐사 되어서는 안되는 절이 있다. 고적의 오래됨이 그 하나요, 두 번째는 주변의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라고 자신의 뜻을 피력하고 있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1698~1761)는 사찰의 중수기가 아니라 부산 범어사의 <설송당대사비명>(1754년 작)이라는 설송 연초 스님의 행장을 적고 있다. 행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헌시에는 ‘도(道)란 본래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는 것, 마치 물에 비친 달과 같이 서와동을 고루 비춘다네. 오로지 설송 스님의 심법이 선과 교 두 법문을 하나로 아울렀다오’라며 스님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불영사 중창기>(1611년 작)를 지은 황중윤(1577~1648), <어제시판서>(1722년 작)를 지은 채팽윤(1669~1731), <대성암 화악대사 진영>(1850년 작)의 김정희(1786~1859)등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나 문신들이다. 이들의 글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불교와 유교가 대립만 한것이 아니라 당대 지식층으로 인정하며 교류도 많았음을 보여준다.
책을 펴낸 신대현 박사는 “아직까지 사찰 현판을 책임있는 기관이 나서서 체계적으로 조사한 바도 없고, 사찰역시 수십점 이상씩 지니고 있으면서도 학술검토 및 공개를 한적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불교자료가 부족한 만큼 이제라도 현판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했으면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