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잔인하게 파랬다. 뭉글 피어 오른 구름은 엄마의 젖가슴처럼 포근했다. 하지만 미군이었던 아버지가 훌쩍 떠나고, 어머니는 영등포역 허름한 여인숙에서 목을 매면서부터 그에게 세상은 누런빛이었다.
버려짐과 그리움
‘가출청소년들의 삼촌’ 유재성씨. 서울 신월동 반지하 방에서 만난 그는 흐릿한 기억부터 내놓았다.
“제 나이를 물으셨나요? 마흔 여섯이라 하더군요. 그나마 추정치라고 하지만. 고아원에 들어간 것은 6살 때였던 같아요. 어머니 손잡고 창경궁 나들이하고 여관방에 들어왔었는데…. 다 늦은 저녁에 경찰들이 왔었죠. 그날로 경찰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들어왔죠.”
고아원 이야기가 시작되자, 말끝에서 ‘그리움’이 묻어났다. 늘 혼자였다는 유씨. ‘가족’이란 개념조차 몰랐던 그는 ‘가족’이란 말을 연신 되뇌였다.
두개의 주민등록증
17살부터 두 개의 이름으로 살게 됐다. 유재성과 최영철. 어긋남은 유씨가 고아원 큰 형이었던 최씨의 병역신검을 대신 받으러 가면서 시작됐다. 얻어맞기 싫어 최씨의 병역면제를 받은 유씨. 그대로 최영철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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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을 증명할 생각으로 버리지 않았던 형의 주민등록증이 제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죠. 고아원에서 나와 꽃가게에서 일할 때, 빌린 사진기를 친구의 실수로 잃어버리면서 경찰에 붙잡혀갔죠. 최영철이란 이름으로 신원조회를 해보니 기가 막혔어요. 세상에 못할 짓은 다 했더군요. 소명할 기회도 없이 구속됐죠.”
그렇게 공주교도소와 청송감호소에서 12년간 옥살이를 했다. 얌전히 지낼 수 없었다. 너무 억울했다. ‘내가 아니다’라고 외칠수록 전과자의 상투적인 수법이란 눈초리에 얽매였다. 그 안에서 갈 때까지 다 갔다. 나중에는 몸 하나 겨우 가둘 수 있는 작은 공간에 갇히게 됐다. 거기에서도 발악을 했다. 벽에 머리를 박고 죽겠다고 하니, 감시하는 전담교도관까지 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발악하는 유씨에게 경비교도대원이 귀찮은 소리를 던졌다.
“아저씨, 아저씨! 내가 공부를 하니 조용히 좀 해요.”
“야! 너는 여기에 앉아서 맨날 책만 읽고 있냐?”
“아저씨! 정말 글 몰라요? 책안에 모든 것이 다 있어요. 아저씨가 정말 억울하면, 공부해서 아저씨를 알려요. 매일 두들겨 맞으면서 소리나 꽥꽥 지르지 말고.”
큰 충격이 있었다. 공부의 출발은 의외의 순간 불같이 일어났다.
몰랐기에 ‘배워야 했다’
“‘모른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12년간 징역살이를 해야 한 것도,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세상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것이 ‘무지’ 때문이란 걸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억울함이 뼛속까지 스며들더군요. ‘이제는 알아야 겠다’는 욕구가 솟구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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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34살 늦은 나이에 책을 움켜들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앞이 캄캄했다. 유씨를 감시하던 경비교도대원에게 글 읽는 것에서부터 덧셈 뺄셈까지 살뜰히 배웠다. 재미가 생기자 욕심이 생겼다.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교도소 교무과에 부탁했어요. 처음에는 믿지 않더군요. 마침 징벌기간이었고. 그래서 책이라도 달라고 애원했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갇힌 그곳에서 던져진 책 몇 권은 너무 귀중했어요. 통째로 외워버렸죠. 외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도 많이 읽다보니 외게 된 거죠.”
책을 외니 글이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쓸 펜도 공책도 없었다. 마루바닥에 맨 손가락으로 글을 쓰면서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얼마 후, 초등반 검정고시를 덜컥 합격했다.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다. 중등반과 고등반 검정고시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곧장 95년 중학검정고시 수석, 96년 고등검정고시 전 과목 만점 수석이란 진기록도 세웠다.
가출청소년들의 보금자리
그해 겨울, 교소도 문을 나왔다. 일단 택시면허를 따고, 서대문 산동네에 1평짜리 고시원 방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서대문 육교에서 구걸하는 어린 아이를 보게 되면서, 불현듯 옛날 고아원 때 생각이 스쳐갔다.
“차라리 못 봤으면 좋을 걸 그랬어요. ‘용산역에서 맞으면서 앵벌이를 했었는데…. 저 어린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 일인데.’ 그런 생각에 며칠 밤을 고민했죠.”
그 아이를 그대로 택시에 싣고, 고시원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이었다. 대안이 없었다. 안되겠다 싶어 방 한 칸을 얻었다.
“그냥 지나쳤어야 했는데, 없는 돈을 쪼개 남대문 시장에서 옷을 사 입히고 목욕을 같이 했죠. 그렇게 두 달을 살았을까요? 아이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 금세 식구가 다섯이 되더군요.”
고시원, 지하 단칸방, 쪽방, 옥탑 방으로 힘겹게 보금자리는 옮겨야 했다. ‘혹시 내가 이 아이들이 좋은 복지시설에서 행복하게 생활할 권리를 뺏고 있지는 않을까?’ ‘능력도 없는 내가 아이들을 고생만 시키고 있지 않을까?’ 변명으로 위안 삼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수없이 보금자리를 옮겨 다녔지만,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은 기쁨 그 자체였다. 피붙이보다 더 뜨거운 가족애가 유씨를 휘감았다.
아이들이 아프면 난감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주민등록증이 있는 아이들의 보험증을 갖고 병원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똑같은 아이의 이름으로 치료를 계속 받다보니, 금세 들통이 났다. 치료비와 생활비에 허덕였다. 돈을 구할 때도 없고, 밤낮으로 운전대를 잡아도 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7년 전, 유씨는 10년 넘게 택시운전으로 벌어놓은 전 재산 3천만 원을 강원도 외진 곳에 버려진 폐교에 쏟아 부었다. 오로지 안정을 못 찾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괴로워하는 아이들에게 쉼터를 마련해주고 싶어서였다.
“몸으로 때웠죠. 밤늦게까지 땅 파고, 못 질하고. 그래도 힘들지 않았어요. 16명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들 생각에 마음이 설레였죠. ‘어머니’로 모시는 반신불수의 어르신,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의 딸, 그리고 9명의 아이들, 아내와 아들 딸, 장기수 할아버지가 함께 살 집을 갖는다 생각하니 혼자서도 피식 웃음을 나왔어요.”
온 재산 쏟아 ‘평화쉼터’ 만들다
하지만 유씨 가족은 3년 전부터 겨울이면 뿔뿔이 흩어진다. 9명 아이들은 서울 신월동 반지하 공부방으로, 어머니는 영월 ‘평화쉼터’, 아내와 자식들은 마산 처갓집에서 겨울을 난다. 매월 들어가는 4백만원 가량의 생활비와 난방비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씨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간 거쳐 간 40여 명의 아이들이 사회 곳곳에 제 몫을 하고 있어서 그렇다. 고등반 검정고시에 16명, 중등반 20명이 합격했고, 나머지들 역시 기술을 배워 각자 밥벌이를 잘하고 있기에 늘 마음이 든든하다.
유씨는 요즘 그런 아이들의 소망과 희망을 담아 꿈을 꾸고 있다. 대안학교 설립이다. ‘평화쉼터’를 활성화해 아이들이 편안한 삶을 설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늦은 저녁, 택시운전을 나가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유재성씨는 꿈이 있기에 행복하다. 011-389-5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