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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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들에게 ‘풍물놀이’ 자원봉사하는 이은우씨
마음의 눈 열어 주는 ‘심청이 선생님’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게 만약 신체적 장애가 생긴다면 제일 치명적인 부분이 어딜까?”라고. 아마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보지 못한다는 것. 그보다 더한 형벌이 있을까.

사진=고영배 기자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앞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은우(54)씨에게 이런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사람의 ‘사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5년째 일주일에 두 번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관장 김승권)에서 시각장애인들에게 풍물을 가르치며 육안이 아닌 심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힘을 길러주고 있다.

시각장애인 십 여 명으로 구성된 ‘풍물사랑 휘몰이’.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과 그나마 흐릿하게는 볼 수 있는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불의의 사고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들이지만 5년 전 이씨의 ‘소리봉사’로 앞을 보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쾅쾅’ ‘쿵쿵’ ‘둥둥’ 신명나는 풍물놀이(꽹과리, 장구, 징, 북)를 통해 즐거워하는 단원들의 모습을 볼 때가 제일 행복해요. 풍물을 가르치는 것도 판소리를 가르치는 것도 오히려 제가 더 흥겨운데 봉사라뇨. 허허허”

이씨의 원래 직업은 한약 도매상이었다. 서울 제기동 한약도매업계에서 잘나가던 그였지만 IMF 외환위기의 한파로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20년 간 피땀으로 일궈 온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으니 가슴에 맺힌 한이 오죽했으랴. 바로 그 때 접하게 된 것이 사물놀이였다. 이씨는 사물놀이를 통해 설움과 눈물을 모두 쏟아냈고 조금씩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학창시절 풍물동아리 활동을 하며 맛만 봤던 풍물놀이는 그렇게 그의 삶을 180도 바꿔 놓았다.

휘몰이의 빠른 장단과 중모리의 느린 장단을 넘나들지만 결코 치우치거나 모자람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눈이 아닌 귀로 세상을 보고 느낀다.
10년 전 그가 풍물을 배우기 위해 가입했던 풍물동아리 ‘울림패’ 회원들과 함께 효창운동장에서 노인들을 위한 공연을 한 뒤부터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풍물놀이 너무 재미나게 잘 봤다”며 수전증 있는 주름진 손으로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네던 할아버지. “더운데 늙은이들을 위해 이렇게 애써줘서 얼만치 고마운 줄 모르겠다”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주시는 할머니. 그 따뜻한 정 앞에서 “나도 무언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가 이끄는 ‘풍물사랑 휘몰이’를 수준급의 풍물단으로 일궈내고 이제는 지역 내 복지관과 경로당, 불우이웃을 찾아다니며 백 여 차례의 공연을 한 이씨였지만 그 이면에는 남모를 고통도 많았다.
초창기 복지관에서 풍물패 식구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자원봉사 한답시고 생색내는 풍물선생이겠지’라고 여기는 단원들의 마음의 문을 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앞을 볼 수 없는 칠흙같은 일상에서 오는 적대감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도 여러 번. 악보를 눈으로 볼 수 없는 이들이기에 직접 일대일로 몇 시간씩 가르치다 보면 체력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하심(下心) 수행, 바로 108배다. 그런 그의 마음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했을까. 풍물패를 만들고 1년이 지날 무렵 단원들은 점차 그를 풍물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준 ‘심청이 선생님’이라 부르며 마음의 문을 열고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이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늘 집에서 잡념으로 하루를 보냈죠. 사람 사는 게 아니었죠. 그런데 풍물을 배우면서 달라졌죠. 뭐랄까. ‘활력’을 얻었다고 할까요.” 휘몰이 풍물패 단원 박영식(64·경기도 성남)씨는 빙그레 웃음 짓는다.
같은 단원인 이남이(62·서울 천호동)씨도 “5년째 한 번도 수업을 빼먹거나 지각하지 않고 열심히 지도해 주신 이선생님의 열정 덕택에 소리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며 고마운 마음을 털어 놓았다.
또 조순옥(54·경기 시흥시)씨는 “처음엔 앞을 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풍물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는데 지금은 장구를 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며 기뻐한다.

“시각장애인들은 청각과 촉각이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일반인의 귀에도 쩌렁쩌렁 울리는 꽹과리와 징, 장구, 북 등 사물놀이가 만들어내는 묘음은 어쩌면 시각장애인에게는 이 세상은 소리로 보는 ‘화엄법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치는 이은우씨는 자원봉사가 본업이 됐다며 기뻐한다.
이렇게 혼연일체, 일심동체가 된 휘몰이 풍물패는 수많은 자원봉사 이력 못지않게 수상경력 또한 화려하다. 전국장애인풍물 경연대회 장려상, 송파구 한마음축제 대상, 국립국악원주최 장애인예능대회 특상 등이 그것. 그 중 이씨는 “2003년 열렸던 전국장애인풍물경연대회에서의 입상이 가장 인상 깊었다”며 “휘몰이 풍물패 단원들이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유발의 기폭제가 된 대회였다”고 말한다.

덧붙여 이씨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의 열정적인 풍물공연은 출연자도 이를 관람하는 관객들도 모두가 가슴 뭉클한 감동의 도가니였다”며 눈시울을 적신다.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울고 웃을 수 있는 풍물놀이가 이제는 본업이라고 말하는 이씨. 그는 지난해 4월 풍물놀이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서울시 응암동에 작지만 그의 소중한 꿈과 희망이 담긴 ‘이은우국악연구소’를 열었다. 연구소는 일반인은 물론 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한 ‘풍물의 전당’이자 사랑방이다.

“휘몰이 풍물패 식구들과 함께 전국의 복지관은 물론 사찰투어를 하며 풍물공연을 여는 게 꿈입니다.”

휘몰이 풍물패 식구에게 세상을 보여 준 이씨. 이제 풍물소리는 세상을 느끼고 품을 수 있는 그들만의 ‘눈’이다. 앞을 볼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있는 그들의 ‘눈’은 늘 예쁘게 미소 짓는다.
글=노병철 기자 사진=고영배 기자 | sasiman@buddhapia.com |
2006-01-11 오전 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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