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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대중학술지인 <불교평론>의 주간인 고려대 조성택 교수는 <불교평론> 2005년 겨울호(제25호) 권두언에서 “황우석 교수 사태의 본질은 연구의 진실성 여부”라고 밝히며 “황 교수팀의 연구성과 조작과 날조가 명백한데도 원칙 없이 감싸는 것은 옳은 종교인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황 교수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위적 실수’라든지 ‘원천 기술’이라든지 하는 말로 호도하기보다 진정한 참회를 해야 한다”며 “그것이 진정한 불교인으로서의 태도며, 그런 다음에라야 ‘과학자 황우석’이 아닌 ‘인간 황우석’에 대한 불교계의 변함없는 믿음과 애정이 바람직한 종교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불교평론>에 실린 조성택 교수의 글 전문.
‘황우석 사태’의 본질은 연구의 진실성 여부다. 그 진실성은 연구자의 심정적 진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의 문제이며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밝혀져야 할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세력 음모론’이 등장하고 있다. 일단 음모론이 등장하게 되면 공공적 합의를 통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사실이 아닌 주장만 난무하게 되는 상황이다. 식민지, 6.25전쟁, 그리고 혁명과 민주화 운동 등 근세사의 숱한 질곡을 겪으면서 성장해온 한국인들에게 음모론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리고 때로 그 음모론이 ‘숨겨진 진실’을 드러냈던 역사적 경험도 있기 때문에 음모론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연구의 진실성을 회의하면서도 소위 ‘원천기술의 존재’와 그에 따른 ‘국익’을 거론하면서 황 교수에게 ‘재연’의 기회를 주자고하는 여론도 있다. 황 교수 스스로도 “6개월만 주면 원천 기술을 재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원천 기술의 유무 또한 과학적 검증에 의해 밝혀질 터이지만 설사 그 원천 기술이 있다 해도 황 교수에게 입증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는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간 황 교수에게는 많은 시간과 인력과 재원이 있었다. 스스로 시인한 실험 데이터의 조작과 날조 이후에도 황 교수는 그가 지금 요구하고 있는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있었다. 더구나 그 동안의 지원이 국가 예산에서 나온 재원이었음을 생각하면 황 교수에게 또 다시 국가 예산을 지원한다는 것은 이치상으로나 다른 연구자와의 형평성 문제로나 가당치 않는 일이다. 그간 우리가 황 교수의 연구에 전적인 지원과 박수를 보낸 것은 그가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 배양에 세계 최초로 성공을 하였다고 믿고 있었고 그 성공이 가져다 줄 무한한 의학적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 지원과 박수의 원천이 조작되고 날조되었음이 밝혀졌는데 이제 또 다시 황 교수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황 교수의 연구 결과 조작으로 인해 당장 유무형의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 한국의 다른 동료 과학자들을 생각한다면 황 교수의 ‘재연 요구’는 직업 윤리적 측면에서나 도의적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계 일각에서 황 교수에게 보내고 있는 지지와 믿음은 의아하다 못해 기이한 현상이다. 불교계 일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 인사 혹은 단체들이 한국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한국 불교계 전체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한국 불교계의 중심에 있는 인사들이며 중요한 단체들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의견 표명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불교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공식직함을 가진 ‘어른’이 어떤 입장을 개진하는 것은 불교계 내외의 세인들에게는 당연히 불교계의 공식입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확인 되지 않은 ‘외부세력 음모론’을 한편으로 제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그 실현 가능성이 거의 무망한 조작된 연구 성과가 가져다 줄 ‘요익중생’의 미명으로 황 박사에 대한 불교계의 “변함없는 지지 입장” 표명은 일반 대중들에게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많은 불교인들을 오도할 수 있다. 더구나 황 교수에 대한 지지의 이유로 “일단 황 박사는 한국국민이며, 한국국민이 어떤 분야이든 남보다 앞서나간다면 박수를 쳐줘야 한다”든지 또 “어떤 종교에서는 성체줄기세포는 괜찮고 황 교수 연구는 안 된다고 반대를 하는데, 서양윤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는 등의 발언은 듣기에 따라서는 많은 오해와 곡해를 낳을 수 있는 발언들이다. “앞서 나가는 한국인에 대한 지지”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을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이지만 듣기에 따라 그런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생명과학을 둘러싼 윤리문제의 제기가 반드시 기독교나 서양의 입장만도 아니고, 배아 줄기 세포를 중심한 황 교수의 연구 방식이 반드시 불교적으로 정당화 되는 것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발언이 어떤 점에서는 서양 윤리(혹은 기독교 윤리)와 구별 되는 불교만의 ‘독특한 윤리’가 있다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불교 윤리의 보편성이지 불교만의 독특함이나 특수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배아’냐 ‘성체’냐의 연구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연구의 성과가 사실이냐 조작된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내용상으로도 타당한 발언이라 하기 어렵다. 연구의 진실성 여부가 객관적인 과학적 검증을 통해 밝혀지기를 좀 더 기다려도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소위 ‘원천기술’의 존재 유무를 떠나 연구 성과의 조작과 날조가 드러난 이후에도 촛불 시위와 삼보일배, 크고 작은 사찰에서의 지지 법회, 그리고 일부 재가불교단체의 지지 운동과 성명 발표 등 불교계의 황 교수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은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불교 종립 대학인 동국대에서 황 교수의 연구를 지원해야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들도 불교계 인터넷 사이트에서 돌아다니고 있어 ‘황우석 사태’에 대한 조사과정을 지켜보면서 침묵하고 있는 대다수 불교인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불교의 수행에서 ‘바름’이란 대단히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正道)에서 ‘바름’(正)이란 부사어이기도 하며 수행의 내용을 말하는 명사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바른 생각’(正思)이란 올바르게 생각할 뿐 아니라 올바른 것을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점이 종교와 미신을 구분하는 점이다. 진심을 다해 믿지만 그 믿는 내용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것은 미신이다. 삿된 것을 믿더라도 진심으로 믿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르게 믿어야 할 뿐 아니라 바른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본지 2004년 가을호 (통권 제 20호) 권두언에서 필자는 생명공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는 과학적 진보를 제한 할 수 없다는 제하(題下)에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또한 과학의 발전과 진보는 불가역적인 것으로 돌이키지 못한다. 과거 인류의 발달과정에서 흔히 있어 왔던 것처럼 진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종교의 역할은 이러한 진보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있지, 진보 그 자체를 거부할 수 없다. 약간의 비약을 허용한다면, 사회가 비약을 허용한다면, 사회가 종교에 봉사할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회에 봉사해야하며, 이런 관점에서 계속 진보해온 사회에 비하면 종교는 정체되어온 감이 있다.
한편 현대사회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불교의 가장 큰 장점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삶의 과정을 신화화하지 않고 않고서도 그 교리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의미는 ‘붓다’라고 하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인도 사회의 브라흐마니즘에 기초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화적 이해를 깨뜨리고 인간의 자율성에 기초한 도덕관을 세웠다는 점에 있다.
(배아) 복제문제에 관한 여러 쟁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율성과 도덕성을 신뢰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보며, 이런 점에서 불교는 복제문제에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불교는 인간의 종교이지 신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는 배아줄기 세포 연구를 둘러싼 생명윤리문제가 종교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가톨릭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을 이유로 배아를 이용한 연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였다. 필자는 가톨릭에서 반대의 이유로 내세운 ‘생명의 존엄성’은 일종의 수사(修辭)이며 그 내면에는 피조물인 인간이 신의 영역인 ‘생명 창조’에 개입하는데 대한 어떤 종교적 ‘두려움’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배아복제 등의 과학의 문제에 관해 특정 종교의 교리를 이유로 과학적 진보를 제한 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한편 인간의 자율성에 기초한 불교적 윤리관은 생명공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적 연구에 대하여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모든 교리가 배아줄기세포연구를 적극적으로 찬성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 내에서도 배아줄기세포연구를 반대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생명공학을 둘러싼 여러 가지 윤리의 문제는 특정 종교의 교리로 찬반이 정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며, 결국 인간의 자율성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생명조작’ 등에 관해 원천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는 열린 입장에서 종교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간적 입장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본다.
최근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불교인들의 경우를 보면 “우리 불교는 기독교와 다르다”는 입장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요익중생’ 등의 불교 교리를 내세워 찬성의 근거로 삼고 있으나 그러한 입장은 보편적 설득력은 물론 불교 내에서의 설득력도 얻기 어렵다고 본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의 반대가 곧 불교의 찬성이어서는 곤란하다. 교리를 절대적 근거로 반대하는 기독교도 문제이지만 불교의 어떤 특정교리를 찬성의 절대적 근거로 삼는 것 또한 곤란할 것이다. 생명과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바람직한 불교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고려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불교적 입장은 일단 어떤 논의도 가능하다.
둘째, 그러한 열린 지평위에서 ‘절대 정신’과 같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 고려가 아닌 인류의 역사, 과학의 발전과 진보와 같은 보편적 인문학적 고민을 바탕으로 배아줄기세포 등 생명과학이 함의하는 여러 윤리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셋째, 그 결과 관점과 고려의 우선순위에 따라 찬성의 입장도 반대의 입장도 다 가능하다고 본다. 단, 하나의 불교적 입장이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불교적 이지도 않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비로소 찬성의 주장이건 반대의 주장이건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불교 연기론에 근거하여 ‘찬성’이 불교적 입장이라든지 혹은 불살생의 원칙을 근거로 ‘반대’가 불교적 입장이라든지 하는 주장은 일반적 설득력은 고사하고 ‘교조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종교의 교리는 이 문제와 관련할 때 하나의 고려 사항일 뿐 절대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신(神)을 상정하지 않는 불교는 상대적으로 배아줄기세포를 비롯하여 생명과학의 문제에 관해 기독교에 비해 훨씬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첨단 생명과학 연구에 대해 불교인들이 타 종교인들에 비해 전향적이고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며 종교와 현대 과학의 조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할 점은 과학적 연구에 대한 그러한 전향적인 입장이 특정 연구자에 대한 지지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불교계의 지지 입장은 ‘과학적 연구’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거의 전적으로 황우석 교수 개인에 대한 지지라는 느낌이다. 황 교수가 그 분야의 선도적 연구자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줄기세포연구가 황 교수만의 독점적 영역도 아니라는 점에서 황 교수에 대한 불교계의 ‘무조건적’ 지지 입장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기우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불교계의 황 교수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의 이면에는 그가 불교인이라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만약 황 교수가 불교인인 아니었다면 불교계의 지금과 같은 “변함없는 지지”가 있었을까? 한국의 불교인들이 그토록 시달려온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불교인들이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경전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네 가지 준칙 가운데 하나인 “사람에 의존하지 말고 법에 의존하라”는 준칙은 이 경우에도 해당될 것이다. 연구에 대한 지지와 특정 연구자에 대한 지지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연구자로서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연구 윤리와 정직성을 무시한 연구자를 같은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감싸고 비호하는 것은 명분도 없을뿐더러 종교적으로도 옳지 못한 것이다.
필자 또한 같은 불교인으로서 황우석 교수가 처한 곤경이 정말 안타깝고 아쉽다. 한 때 많은 한국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고 어린이들에게는 훌륭한 과학자의 모델이 되었던 그가 이제 마치 황당한 ‘사기극’의 총 연출자인 것처럼 언론에 비춰지고 있다. 황 교수의 연구 성과가 한 때 과장되었던 것처럼 지금 그의 실수나 잘못도 턱 없이 과장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불교인으로서 한 점 부끄럼 없다”는 황 박사의 말에 우리 불교인들이 안도하고 자랑스러워했던 만큼 그 말이 허언이었음이 드러난 지금 우리는 그에게서 말할 수 없이 큰 실망을 느끼고 있다. 한때 그에게 환호를 보내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를 ‘사기꾼’이라 매도하면서 돌팔매질을 하고 있다. 그런 황 교수에게 또 다른 돌팔매질을 하는 것을 세상인심이 그렇고 그런 것이라 자위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것이 있다. 우리 모두가 일정부분 져야할 책임을 황 교수 개인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점 때문이다.
비록 황 교수 본인의 과도한 성취욕 그리고 그의 연구에 대한 지나친 사회적 기대감으로부터 받은 유무형의 강박감으로 적절한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급기야는 실험 데이터의 조작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황 교수는 사실 누구보다도 성실한 연구자의 모습을 보여 왔다. 여론의 주목을 받기 이전부터 그는 새벽 5시면 연구실에 도착하였고 자정에 가까워야 실험실을 나서는 일상을 주말도 없이 계속해 왔던 연구자였다. 또한 그는 “과학에 국경은 없어도 과학자에게 조국은 있다”는 구절의 의미를 다시금 우리에게 새겨주었던 남다른 열정의 소유자였다. 실험 데이터의 조작이라는 결과만을 놓고 황 교수의 연구자로서의 성실성과 열정마저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모두 차분히 자신을 돌아 볼 때가 아닌가 한다. 드러난 잘못이 명백한데도 원칙 없이 감싸는 것은 옳은 종교인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무분별한 돌팔매질도 이제 그만해야한다. 그리고 황 교수도 자신의 잘못을 “인위적 실수”라든지 “원천 기술”이라든지 하는 말로 호도하기보다 진정한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불교인으로서의 태도일 것이다. 그런 다음에라야 ‘과학자 황우석’이 아닌 ‘인간 황우석’에 대한 불교계의 변함없는 믿음과 애정이 바람직한 종교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