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소원이요? 가족들이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밀원 30ㆍ타이)
“부처님께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세프 26ㆍ네팔)
“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들 모두 사고 없이 건강하게 생활 할 수 있기를 바래요.”(슈짓 35ㆍ방글라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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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이날 조계사가 주최하는 ‘외국인 근로자와 함께 따뜻한 겨울나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 안산, 의정부, 평택 등지에서 찾아온 네팔, 방글라데시, 타이, 미얀마 출신 불자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조계사 사부대중이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받아든 이들의 표정은 포근한 날씨만큼이나 한없이 밝고 행복해 보였다.
이날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를 찾은 외국인 노동자 250여명은 한국의 전통사찰이 자신들을 위해 법회를 연다는 사실에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서로 돕고 도우는 연기의 가르침
행사는 조계사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법회로 시작됐다.
원담 스님은 15년전 자신이 배낭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고단한 타국생활을 위로했다.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강도를 당하기도 하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착하고 친절한 이웃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제게 도움을 줬던 이들 가운데는 혹시 여러분들의 형제나 친척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원담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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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 스님은 진심어린 격려의 말로 이들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졌다. 몇몇 외국인 노동자들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법회 도중 네팔 출신의 젊은 노동자 슈레쉬 부부의 3개월 된 아들 린천워무가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 뒤에서 법회를 지켜보던 노보살이 급히 아이를 받아 안았다.
보살은 마치 친할머니 같은 인자한 표정으로 아이를 달랬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거짓말처럼 금세 울음을 그쳤다.
법회가 끝날 무렵 아이를 엄마에게 되돌려 보내던 보살은 “맛난 것 사먹어”하며 꼬깃꼬깃 접은 만 원권 지폐 몇 장을 아이 엄마에게 쥐어 주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보살의 따뜻한 정이 지켜보던 외국인 노동자 동료들과 조계사 신도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국적은 달라도 우리는 부처님 제자
조계사는 이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방한복(오리털 파카) 250여벌을 지급하고, 타국에서 새해를 맞는 이들을 위해 한국의 전통음식인 떡국을 대접했다. 이들 대부분은 떡국을 먹어야만 한살을 더 먹는다는 한국의 풍습은 알지만, 실제로 떡국을 먹어본 것은 처음이라며 즐거워했다.
휘발류 공장에서 일하다 화상을 입고 4000만원이 넘는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밀룬씨의 딱한 사연도 신도들에게 전해졌다.
이날 방글라데시 동료 40여명은 조계사에서 제공한 병원비 300만원과 전세 버스 편으로 밀룬씨가 입원한 구로성심병원으로 찾아 병문안 했다.
밀룬씨의 동료 슈짓씨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낯선 타국에서 몸을 다치면 의지 할 곳이 없어 막막한 것이 현실”이라며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을 위해 마음을 내준 조계사 불자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 “선물로 받은 오리털점퍼로 따뜻하고 건강한 겨울을 날 수 있게 됐다”며 즐거워 했다.
옆에 있던 아번씨도 “한국에 온지 5년이나 됐지만 법회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바깥출입은 거의 못하는 동료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한국 불교계가 외국인 노동자도 자국에서와 같이 부처님을 모시고 신행활동이 가능하도록 많은 관심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의 불교인구는 불과 0.7%. 대부분 ‘지타겅’지역 출신인 이들은 국내만 390명가량이 체류하고 있다.
이날 네팔 노동자들은 가장 많은 70여명이 참석했다. 랍게라마씨는 “그동안 주말이면 교회를 찾아가는 다른 동료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기만 했다”며 조계사가 마련한 이날 행사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네팔 불자들도 연말이면 절을 찾아 복을 비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며 조계사 신도들의 모습에 친숙함을 나타냈다.
외국인 노동자 무료진료도
이날 행사에는 ‘경희의료원불자회(회장 권혁운)’와 ‘자비의 집’ 봉사단도 참여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의료봉사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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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인근의 공단지역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아번씨는 “불안한 신분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보통 2~3가지 질병을 달고 살면서도 단속이 무서워 병원을 찾지 못하는 동료들이 많다”며 “오늘은 조계사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진료를 받게 돼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조계사는 2005년 ‘15% 나눔운동’으로 관내 소년소녀가장 가장 등 소외계층을 돕기 위해 ‘나눔의 보시금’을 적립해왔다. 이날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나선 보련화 보살은 “고향을 떠나 한국에서 새해를 맞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국적과 피부색을 떠나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며 흐뭇해했다. 조계사는 2006년부터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각종 지원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기로 하고, 4~5월 경 외국인 노동자 체육대회와 정기법회, 신행상담을 펼칠 계획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계사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웃음과 행복으로 채워졌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날 또 다른 ‘희망’을 보았다. 비록 고단 타국에서의 삶이지만 한국의 불자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