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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에서 부처님은 인간의 인식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우리의 인식 바탕이 모두 ‘공’함을 설명하신다.
육입 즉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여섯 가지 통로인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뜻이 모두 자체의 성질이 없음을 지루할 정도로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눈동자를 고정시켜 한 곳을 주시하고 있으면, 여러 가지 모양(경전에서는 헛꽃이라고 표현)이 보이기도 하고, 신비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다보면 경험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를 신비한 종교적 체험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를 허망한 것으로 설명하고, 오히려 이러한 체험을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과 인식하는 주체의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계기로 하라고 가르치신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없다’는 허무의 뜻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성질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속성을 줄여서 ‘공’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공’이라고 하는 말이 물리학적으로 이야기하는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체의 성질이 정해져 있지 않는 삼라만상의 존재하는 모습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공간을 정해 놓고, 먼지도 뽑아내고, 빛도 뽑아내면 남는 것이 전혀 없는 공간이 가능할까.
그런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가르침이다. 기술적으로 완전히 진공을 만들기가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그런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전한 진공에서도 양자역학적인 ‘가상적인’ 에너지가 존재해서 새로운 물질의 창조에 기여하게 된다고 물리학은 말한다.
양자역학은 또한 완전히 ‘정해진’ 상태를 거부한다. 소위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어떠한 고정불변한 상태는 측정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이라는 개념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잘못된 개념이다.
이러한 양자역학적인 발견과 삼라만상에 대한 ‘공’의 존재론이 얼마나 모순 없이 일치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다. 어떠한 것에도 정해진 실체가 없다는 것,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변하는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놀라운 체험이다.
이유 없이 나를 괴롭히는 마음들이 생길 때, 이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관찰하자. 그러면 이 마음이 흐르는 물과 같이 쉼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옛 선사들이 이야기하신 ‘만법귀일(모든 존재가 하나로 돌아가는 원리)’이며, 참 불성을 깨닫는 첫 단추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