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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은 고요하다. 졸졸졸 흐르는 얕은 시냇물과는 달리 깊어서 고요한 큰 강줄기는 시공을 가로질러 흐르고 흐른다. 천년의 세월을 품은 중국 강서성의 서강(西江, 현재의 감강을 부르는 별칭으로 감강은, 지역의 번호판에 첫 글자 ‘감’이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강이다)이 그랬다.
한국을 떠나온 지 7일째가 되던 9월 13일 강서성 최대의 강인 서강 앞에 섰을 때, 잠시도 머물지 않는 그 도도한 강줄기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으니 방거사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스님과의 선문답이 생생하게 귓전에 되살아났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자 누구입니까?”
“그대가 한입으로 서강의 물을 머금어 다하면 그때 이르리라.”
‘일구읍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라는 화두다. 강물은 ‘흐름’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부단한 서강의 흐름을 바라보며 ‘일구읍진서강수’라는 화두 또한 수행납자들의 ‘고인’ 사고를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흐름’으로 전환시키면서 그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조 스님의 행화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우민사(옛 개원사) 옆을 흐르는 서강은 마조 스님이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웅변하듯 빛을 내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생불로 추앙될 만큼 존경을 받고 있는 마조 스님은 본래 사천성 한주 시방현 사람이었다. 속성이 마씨여서 마조라고 불리는 스님은 비록 비천한 농가에서 태어났지만 용모나 모든 것이 다른 사람하고 달라서 기이하고 비범했다.
걸음은 소걸음과 같고 호랑이 눈빛을 가져서 빼어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혀가 길어서 코끝을 지났고 발바닥에는 2개의 법륜 표시가 있었다.
어려서 고향 마을의 나한사로 출가하여 지극한 구도심으로 여러 곳을 다니면서 두타를 행하였다. 가는 곳마다 좌선을 하였는데 당 개원 연중에 형악의 전법원에서 선정을 닦던 중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스님을 만나 공부하여 심인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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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삶속으로 내려선 禪
이번 답사에서는 마조 스님의 득법도량인 마경대(磨鏡臺)와 행화도량인 우민사(佑民寺), 그리고 원적도량인 보봉선사(寶峯禪寺)를 다녀왔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전법원이라고도 하는 마경대다. 마경대는 마조가 좌선을 했던 초암 앞에 있던 바위다. 마경대가 있는 남악은 육조 이후 남종선의 뿌리를 내린 마조 선사와 석두 선사 등이 득법 행화한 선불교 성지다.
마경대는 마조의 득법도량이자 조사선의 원천이라고 해서 ‘조원(祖源)’이라고 한다. 그 바위에는 조원이라는 두 글자가 음각의 붉은 글씨로 크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바위는 반쯤 묻히고 그 바위 가운데를 가로질러 길이 나 있었다. 안타까웠다.
길 밑으로 반 정도 드러난 마경대에 서서 지극한 신심으로 좌선 수행에 전념했을 젊은 마조 스님과, 마조 스님을 지켜보며 때를 기다렸을 회양 스님을 그려본다.
스승과 제자가 만남이 이뤄지고 법이 전해졌던 역사의 현장에 서니 회양 스님의 기왓장 가는 소리가 바람결에 다시 들려오는 듯 하다.
당시 초암 앞에서 마조 스님은 좌선에 몰두하고 있었다. 비구계를 수지하고 공부를 이어가던 마조 스님이 좌선정진하던 곳 근처에는 복엄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남악회양 스님은 그 절의 방장이었다.
젊은 마조가 정진하는 것을 항상 눈여겨보던 회양 스님은 하루는 근기를 달아보기 위해 마조 스님이 좌선중인 초암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말없이 기와를 갈기 시작한다. 분명히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일대 사건이다.
방장스님이 기와 가는 것을 보고도 마조 스님이 좌선만을 고집하며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러나 마조 스님은 어김없이 회양 스님이 던져 놓은 그물에 걸려들었다.
“기와를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어볼까 하네.”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겠습니까?”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을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이때, 마조 스님의 심경을 헤아려보기란 어렵지 않다.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좌선 수행이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드는 일처럼 부질없는 것이었다니, 크게 한방 맞은 셈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 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대답이 없자, 남악회양 스님이 다시 묻는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고자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고자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에 있지 않으며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불은 정해진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네. 그대가 좌불을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좌선에 집착한다면 이치를 깨닫지 못할 것이네.”
마조 스님은 이 가르침에서 활연대오했다. 회양 스님은 좌선에 집착해서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폭풍같은 한마디로 마조 스님의 좌선삼매를 뒤흔들어 버렸다. 회양 스님의 선기 번뜩이는 단칼에 마조 스님은 좌선이라는 유의조작의 포박을 끊고 몸과 마음을 일으킬 수 있었다.
훗날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청정한 자성을 더럽히지 않으면 된다’며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상당법어로, 수행으로 부처가 되겠다고 조작을 일삼던 사람들의 얽매인 사고를 해방시키는 출발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인간의 삶 속으로 내려섰다.
이때부터 마조 스님은 선의 황금시대를 여는 행화를 펼치기 시작한다. 홍주의 우민사에 18년간 주석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특히 스님은 그곳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심지법문을 펼쳤다.
남창시내 한복판에 있는 우민사는 마치 타원형의 운동장같이 생겨 고층 빌딩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도심의 제일 번화가에 고층빌딩들이 절을 외호하는 신장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아주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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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시 3만~4만명 모여드는 우민사
우민사는 마조 스님 회상으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듯 현재에도 법회때면 3만 내지 4만 명의 대중이 모여든다고 한다. 현재도 중국을 대표하는 도량인 셈이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지만 법당을 참배하고 나오는 사람들과 뒤를 이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불교 제2의 태동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평상심이 곧 도’라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중생의 전도된 견해를 일시에 무너뜨리는 혁명적 가르침으로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마조 스님 행화도량에서 스님의 법문을 다시금 새겨보았다.
“도는 닦는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아라. 무엇을 물듦이라 하는가? 무언가를 알려고 하면 모두가 물듦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이 도니라.”
이것이 마조 스님의 골자 법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이 없고 취사가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자성은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으므로 다만 선악(善惡)에 머물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라고 설파하며 좌선이니 수행이니 하는 일체의 조작을 걷어낸 인간 본래의 가치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달마 스님으로부터 시작된 중국 선종사가 6조 혜능 스님에 의해 꽃을 피웠다면 사상적으로나 교단적으로 중국 선조의 실질적인 형성은 남악회양의 선법을 계승한 마조 스님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평상심이 곧 도’라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중생의 전도된 견해를 일시에 무너뜨리는 혁명적 가르침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스님의 이러한 사상은 중국 강서성 중앙부에 위치한 홍주 우민사에서 뿌리를 내려 백장회해-> 황벽희운 -> 임제의현 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선의 큰 줄기를 형성했고 그 줄기는 우리나라까지 뻗어왔다.
이처럼 중국 선불교의 황금시대는 마조에서부터 개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고 현지에 가보니 그러한 것들이 더욱 확연히 느껴졌다. 조사선이라 불리는 마조선은 강서선 홍주종이라고 한다.
한국선종 신라말 고려초 구산선문중 일곱개 사찰이 마조 스님의 법을 이었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하고도 마조 스님은 대단히 인연이 많은 스님이다.
우리나라 무상 스님의 제자라는 말도 있지만 확인할 도리는 없었다. 한국 선종을 임제선이라 하는데 임제선도 마조 ->백장 -> 황벽 -> 임제 스님으로 이어져온 마조 스님 맥이다.
나는 30대 중반, 부산 기장 월래의 묘관음사에서 향곡 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마조 스님을 처음 알게 되었다. 향곡 스님께서는 마조 스님에 대한 법문을 자주하시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법문이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묘관음사 조사전에는 마조 스님을 모셔놓은 상이 있었는데 그 상을 보면서 나도 저런 선지식이 되었으면 하고 늘 사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컸었다. 젊은 납자 시설 품었던 마조 스님을 향한 그리움을 따라 결국 내 발걸음은 마조 스님의 원적도량으로 향했다.
마조 스님은 과연 어디에서 돌아가셨을까? 우민사에서는 우민사에서 돌아가셨다고 주장하며 현판 안내문에도 그곳에서 돌아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조 스님의 원적도량을 보봉선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봉선사 가는 길은 길이 좁고 꼬불꼬불하여 버스가 겨우 올라갔다. 한 시간 이상을 꼬불꼬불 계속 올라가면서 ‘다 올라가면 참 경치가 좋겠다’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정상에 올라가니 또 내려가기 시작했다. 40분 여분 내려가니 분지가 나타났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개원사 방장 18년을 마감 하시고 마지막에 석문산에 올라가서 골짜기의 평평한 땅을 가리키면서 “이 늙은이의 몸을 옮길 때가 되었느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석문산에다 보봉선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보봉선사 산문에는 큰 글씨로 마조의 화두인 ‘즉심즉불(卽心卽佛) 비심비불(非心非佛)’이 쓰여져 있고 산문 중앙에는 ‘마조도량’이라는 편액을 커다랗게 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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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봉선사에서는 법명이 순랑이라고 하는 젊은 스님에게 안내를 받았다. 40대쯤 되어 보이는 그 스님은 예의바르고 침착하며 교리적으로도 정리가 돼 있었다. 그런 스님을 중국의 절에서 만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내가 상좌를 하자고 하니 그 스님도 나를 따라다니며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치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이번 답사에서는 아주 드물게 점심을 보봉선사에서 대중공양으로 했다. 빙 둘러앉아 공양을 했는데 음식은 담백하고 먹기에 괜찮았다.
다섯 가지 정도의 반찬을 하나의 발우로 먹었는데 발우속의 반찬을 다 먹어갈 쯤 다시 반찬을 갖다 주었다.
한국은 네 개의 발우로 먹는데 발우를 하나만 사용하느냐고 물으니 본래 자기들은 두개로 먹는다고 했다. 대중공양을 마치고 나니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대중 전부에게 공양금을 돌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봉선사의 1백여 스님 하루 8시간 참선 들어
보봉선사 선방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잘 정리된 선방에서 현재 1백여 명의 대중이 하루 8시간 정도 정진하고 있었다. 종파는 임제종이며 화두는 주로 ‘염불시수(念佛是誰)’를 한다고 했다.
보봉선사의 중국스님들은 마조의 강서선이 당나라 이후 중국불교를 대표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긍심과 의욕으로 넘치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중국불교의 희망을 다시금 확인했다.
보봉선사 바로 옆에 마조 스님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바로 절 옆 위치한 사리탑은 4면 단층 석탑이었다. 사리탑은 백옥탑인데 만든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문화혁명 때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한 까닭이다. 파괴할 당시 탑을 보호하는 정자는 그대로 두었고, 사리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사리탑을 복원하면서 다시 모셨다는 설명이었다.
탑 전면에는 ‘마조도일대적선사사리지탑(馬祖道一大寂禪師舍利之塔)’이라고 금으로 음각을 해놓았고 뒷면에는 마조의 화두인 ‘심외무별불(心外無別佛) 불외무별심(佛外無別心)’ 이라고 써 있었다.
마음으로 흠모해왔던 마조 스님의 득법, 행화, 원적 도량을 둘러보면서 선이라는 것은 ‘일종의 개혁’이라는 생각을 했다. 구태의연한 사고를 뒤흔들어 스스로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삶을 혁신하는 가르침이 선이다.
날로 새로워야 한다. 그것이 선법이다. 마조 스님의 ‘평상심시도’나 ‘즉심즉불’이라는 가르침을 당시의 사람들이 추종했던 이유도 ‘새로움’에 기인한다.
오늘 우리나라도 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러한 때 마조 스님의 혁신적인 법문을 되살려서 우리 생활에 선의 ‘새로움’이 생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치나 교육은 물론 각 분야에 선의 정신이 살아있게 하는 것, 이번 중국 선종사찰 답사가 우리 모두에게 던져준 과제다.
“대중들이여, 각자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며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임을 확인하라.”
마조 스님의 고구정녕한 말씀이 오늘 다시 ‘중생심’에 물든 우리의 견고한 사고의 틀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깊은 무명에서 깨어나 늘 새로운 오늘을 살라고...
인각 스님은
194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범어사에서 나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범어사 강원 대교과 졸업후, 태안사에서 범룡 스님을 모시고 화엄경을 열람했다. 송광사 해인사 통도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30여년 수선안거했다. 현대 범어사 금어선원 유나이며 조계종 기본선원 운영위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