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께서 차원이 높게 정신계를 밟아 가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정말 이 세상의 만물 만생이 다 둘이 아니어서, 여러분이 안 계셨더라면 내가 배울 점이 없었고, 또 내가 없었더라면 여러분이 배울 점이 없었을 겁니다. 서로가 한마음 한뜻이 돼서 머무름이 없이 일체 만법을 행하는 도리를 정신 차려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오늘 더더욱 감사하군요.
심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사형선고에다가 무기 집행유예를 받고 한 계단 한 계단씩 조심스럽게 마지막 계단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만히 여러분이 생각해 보신다면 아마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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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한테 누누이 말씀드려 왔습니다마는 나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육조 스님의 뜻을 본다 하더라도, ‘불성인 주인공이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공으로 인해서 여여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불성이라는 것은, 즉 말하자면 불이 들어오는 것을 말하고, 주인공이라는 것은 불이 들어오게끔 전체가 작용되도록 한마음으로 뒷받침하는 겁니다. 그렇게 같이 돌아가는 것을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즉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 내는 것과 육신이 움죽거리는 것을 포함해서 주인공이라고 하고, 그대로 한마음으로 딱 당쳐서 주장을 세운 것이 바로 근본 불성입니다. 그러니까 둘러치나 메치나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모든 것을 일체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주인공으로 인해서 일체 만법을 들이고 냄을 어찌 알았으리까.’ 이겁니다. 또 거기다 말을 한마디 더 붙이자면 ‘주인공으로 인해서 자유자재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시고 새겨 보신다면 우리 모든 행이, 일체가 다 머무르는 바 없이 머무르는 겁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길을 적절히 택했다면, 아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다고 그랬죠? 그 길이 깊은 정글이라고 합시다. 지금 깊은 정글을 지나가는데 거기는 사자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또 스치기만 하면 말아서 피를 빠는 풀이나 나무나 어떤 동물이든 다 곁들여서 있다고 봅시다. 그런다면 그 정글을 넘어가야 대로(大路)가 나오는데 정글을 가는 길에 무슨 잡담이 필요하고, 정신을 어디다가 팔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나아가면서 어떠한 게 닥친다 하더라도 그냥 타파하고 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망상이다 할지라도 ‘망상은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재료야.’ 하고 넘어서야 하고, 시공을 초월해서 볼 때에 잠이 온다 하더라도 잠자는 게 잠자는 게 아니다 라는 얘깁니다. 잠 안 자는 것도 아니고 자는 것도 아닙니다. 꿈도 아니요, 생시도 아니듯. 모두가 이렇게 그대로 여여한 생활 자체가 그대로 진리요, 참선이요, 부처님 법입니다. 부처님 법이라고 해서 우리들의 법이 다르고 부처님의 법이 다르다고 생각지는 마세요. 우리들이 즉, 부처이자 중생이니까요. 그러니 3천 년 전에만 부처님이 계셨던 게 아니라 여러분이 계신 한, 부처님은 항상 이 자리에 계십니다. 어떠한 망상이든 애고든, 병고든 어떠한 문제가 닥쳐온다, 내 생명이 지금 위태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몸뚱이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끄달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엊그저께도 얘기했지만, 텔레비전 몸체와 화면 같은 외형을 어떻게 자기라고 하겠습니까? 마음에 갖추어 가지고 있는 그 능력, 바로 심력이 여러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형성시켜서 이날까지 끌고 온 그 장본인, 불성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육신이 없어도 아니 되고, 육신을 나라고 해도 아니 됩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으로 비유한다면, 속의 기능이 없어도 안 되고 화면이 나오는 몸체가 없어도 텔레비전의 역할을 다 못 합니다.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먼저고 나중이고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공부 하시는 데는 절대로 끄달려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왜 끄달린다는 말이 거기 들어갈까? 지금 이 세상을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물질이 없어도 아니 되고 물질만 있어도 아니 됩니다. 생명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기 때문에 바로 물질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은 영혼들도 연결, 연결을 짓고 돌아가는 데는, 한마음으로서 공심으로 돌아가려는 데는 바로 물질을 필요로 합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인간 마음의 그 무한한 레이저 광선, 마음의 레이저 광선은 무한이지만 물질적인 레이저 광선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이저 광선이 지금 세계적으로 안 쓰이는 데가 없죠. 하다못해 라디오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무한량으로 쓸 수 있고,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얘깁니다. 거짓말로 알지 마세요. 사대 성인들과 깨달은 분들 모두가 다, 역대를 거치면서 발견한 것이고 연구한 것이고 실천한 것이고 그렇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머리 깎은 사람과 머리 안 깎은 사람이 다 동일하게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유마힐 거사도 그 시절에 났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 할지라도 지혜가 풍부해야 들이고 내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고 또 모가 지지 않게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지혜도 주어져 있습니다. 제일 문제는 지금 정글을 넘어서야 되는 겁니다. 지금 사느냐 죽느냐, 이 중세계에서 승진을 하느냐 하천세계로 좌천이 되느냐 하는 판국이죠. 좌천이 되면 세세생생에 쳇바퀴 돌듯 그냥 이 모습 저 모습으로 끌려 다니면서 고(苦)를 면치 못해요. 자기뿐만 아닙니다. 수십억의 중생들이 내 몸속에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한눈팔 사이가 어딨습니까? 그렇다고 신경을 쓰고 모질음을 쓰면서 ‘아이고, 이걸 끊어뜨리지 않고 해야 하는데, 공부를 어떡하면 잘할까?’ 이런 걱정 근심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본래 생활이 종교이고 참선이기 때문에 그대로 생활하는 것이 바로 자기 주인공에서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낸다는 사실! 이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열쇠가 주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살면서도 자기를 못 믿어요. 다른 이름을 믿고 형상을 믿고 허공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왜 자기는 못 믿습니까?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끌고 가는 그놈을 자기가 왜 못 믿습니까? 배가 고파서 밥 먹게 하는 놈, 듣게 하는 놈, 보게 하는 놈, 말하게 하는 놈, 일을 하게 하는 놈, 하기 싫게 하는 놈, 싸움을 하게 하는 놈, 성이 나게 하는 놈, 이 모든 놈이 전부 한 놈입니다, 한 놈! 그것을 표현하기를, ‘아버지가 될 때 내가 나라고 할 수 있나, 또 남편이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나, 자식이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나, 사위가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나?’고 했던 겁니다. 자동적으로 돌아가면서 말도 뜻도 행도 그렇게 바꿔지면서 돌아가는데 어떤 딴 놈이 또 있습니까? 그러니 일체 만법이 다, 각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벌어진 겁니다. 그 한 놈이 그렇게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벌어진 것을 용도에 따라서 들이고 내는 데는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그대로니까. 그 한 놈이 누구입니까? 그 한 놈이 바로 우주를 싸고 여여하게 돌아가는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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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렇게 살얼음판 같은 계단을 걸어가는 도중에, 그리고 계단을 정글이라고 해도 됩니다마는 이게 공부하는 데에 정글이라고 하고, 사람이 태어나서 죽으러 가는 그런 길을 한 계단 한 계단 걷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사단이 그렇게 많아서 그 길을 똑바로 걷질 못 하고 온통 그냥, 여기에 끄달리면서 이것 때문에 죽는다고 피하고, 사자가 온다고 피하고, 정글에서 어떤 풀이 몸을 감으면 또 안 감기려고 피하고, 이렇게 피하다 보니까 문제가 심각해지는 겁니다. 어떤 게 닥쳐도 피하지 말라 이겁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가도 아니 되고 뒤로 물러서도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둘이 아닌 까닭을 알면 한 찰나에 내가 풀이 될 수 있어서 내 몸을 말아서 피를 빨아 먹는 어떠한 물체가 있다 할지라도 자기 피를 자기가 먹을 수는 없는 겁니다. 이건 마음의 장난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풀도, 무정물도 식물도 다 마음이 있는 겁니다. 생시에 내가 ‘마음이 체가 없어서 너와 내가 모두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데 뭘 그래!’하고 놨을 때에 바로 꿈에도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꿈과 생시가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니까 뱀이 닥치든지 또는 구렁이가 닥치든지 또는 사자가 닥치든지 어떠한 게 닥쳐도 궁색하게 피하지 말고, 가정에서 어떠한 애고가 닥치든 병고가 닥치든, 어떠한 문제가 닥쳐도 피하지 말란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 몸속에 들은 의식들이 다 딴 사람입니까? 딴 데 있는 겁니까? 내 한 물체 속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물체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은 바로 별성들이요, 나, 이 모체(母體)가 전체를 담아 가지고 있는 그 자체는 혹성입니다. 이름을 지어서 그렇게들 부르니까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성이 따로 있고 별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게 움죽거릴 때, 위장에서 움죽거릴 때 내가 움죽거렸다고 하겠습니까? 간장에서 움죽거려야 내가 움죽거렸다고 하겠습니까, 소장입니까, 대장입니까? 전체가 나 아님이 없는 겁니다. 한 군데서만 파업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것을 각각 본다면 파업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대립이 되니까. 이건 대립이 돼서 될 일이 아닙니다.
어떤 애고라든가 영계성ㆍ유전성ㆍ세균성ㆍ업보성 이런 게 모두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 현실에 나오는 건데 그것을 대치하려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네가 나오게 한 거니까 네가 안 나오게 할 수도 있잖아.’하고 돌려놓는 것입니다. 마음은 내가 마음을 쓰는 대로 알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스스로 아는 게 아닙니다. 지구가 움직일 때 우리가 그냥 따를 뿐이지 어디로 다니는 줄 우리가 압니까? 무엇을 하고 다니는 줄 압니까? 그렇듯이 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모든 생명의 의식들이 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거기다 직결해서 ‘네가 하는 일이니까 네가 잘해야 되잖아. 이끌어 가야 되잖아. 네 몸뚱이 네가 건강하게 이끌어 가야 네 심부름을 잘하잖아.’하고 그대로 놓는 것이 바로 참선이며, 우주를 한꺼번에 집어 먹고, 집어 먹을 것도 없이, 버릴 것도 없이 이렇게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이시고) 받칠 수 있는 그런 기둥이 된다 이 소립니다.
사람이 공부를 해서 ‘해인(海印)의 증명을 받았다.’하는 것은 큰 바다에 만물만생이 살고 있는데 그 마음이 한마음으로 돌입해서 한마음이 됐다는 증거입니다. 바다에는 도장을 찍어도 찍은 사이가 없고, 찍을 사이가 없건만 찍은 겁니다. 우리가 대통령 선거를 하는데 몽땅 ‘당신이 옳소.’ 하고 찍는 것과 같죠. 왜냐? ‘옳소’하는 것은 둘로 봐서 옳소가 아닙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과거고 현재고 미래고 몽땅 한데 합쳐 한자리를 파악한 것이 바로 해인입니다.
한 가족 안에 아들딸들이 전부 아버지를 찍지 누굴 찍습니까? 우주 전체 삼라만상을 한 가족으로 본다면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둘로 보지 않고 한 가족으로 보기 때문에, 모습은 다르지만 그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라는 것은 조건 없는 자비가 줄줄줄줄 그냥 흐르고 있으니, 그대로 합일이니까 그대로 도장이죠. 그러니까 너 나를 가른다면, 잘못하고 잘하는 걸 가른다면 합일이 될 수 없죠. 잘한다고 한다면 항상 못하는 게 거기 끼어들고, 못한다고 한다면 잘하는 게 끼어들고 이렇기 때문에 끝이 안 나요.
그러니 공부하는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아주 근원적으로 들어가서 내막을 파헤쳐 본다면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우리가…, 요걸 보세요. 지수화풍도 우리에게 당장 없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공기주머니에서 사는 것은 물주머니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물에서 사는 생물들 모두가 그냥 물주머니에서 산다고 한다면 그 물로 인해서 공기가 되니까, 우리도 물주머니에서 사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뭐든지 거기에서 이탈을 한다면 다른 병고가 일어나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자체는 수십억 마리의 마음도 내 마음 한마음에 다 따라 주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따라 주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 하나 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보죠.
예전에도 그렇게 얘기했죠. 누가 어떤 꿈을 꿨다고 가서 물어보니까 “아, 잘 먹겠다.” 이러기에, 다른 친구가 꿈을 안 꾸고도 그런 꿈을 꿨다고 꿈 얘길 하니까 “아, 너는 매를 진탕 맞겠다.”고 했죠. 그래서 정말로 매를 진탕 맞고는 “그런 꿈을 꾸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매를 맞게 됐습니까?”하고 또 가서 반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려고 꾸민 것도 꿈이니라.”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꿈에 어떠한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둘로 보지 않고, 어떤 귀신이 닥친다, 어떤 애고가 닥친다, 어떤 유전성이 닥친다 하더라도 ‘허허! 너와 내가 둘이 아닌데 무슨 그런 일이 있겠는가.’하고 자기가 한생각에 돌려놓으세요. 둘이 아니라면 모든 게 그냥 하나로 돼 버려요, 흔적도 없이. 불에 어떤 것을 넣든 타 버리고 물이 증발되듯이.
어떠한 게 닥치면 관습에 의해서 ‘아, 이런 것은 안 되고, 이런 것은 되고’ 이런 게 있죠? 여러분이 많이 그렇게 하실 거예요. 사람이 살아나가는데, 여태껏 살아온 관습에 의해서 이건 못하고 하고가 항상 따르게 마련이죠. 진짜로 믿고 들어가는데 하고 못하고가 어딨습니까? 내 생명이 그냥 이 자리에서 앗아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허허!” 할 뿐이죠. 내가 둘로 본다면 온 것이 있고 갈 것이 있지만, 둘로 보지 않는다면 오지를 않았기 때문에 갈 것도 없죠. 인간이 모두 가지고 있는 이 미묘한 법으로써 어떻게 하면 여러분이 다 자유스럽게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게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전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졸지 말고 정진해라.’ ‘망상을 끊어라.’ 철저히 그랬습니다. 그것뿐입니까마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 생각을 했느냐 하면 ‘망상을 끊기 이전에 사람이 생각을 내지 못하면 목석이 되지 않나? 아니, 생각을 자꾸자꾸 내야 그게 발전을 하는 거지 어떻게 생각을 망상이라고, 방편으로 이름을 지었을까?’ 하는 의심이 났단 말입니다. 꼬리가 꼬리를 물고 생각을 하더라도 내가 안 하려면 안 하고 하려면 하는 거지, 그러고 그 자리에서 자꾸 나오는 거지,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자리에다 그냥 내버려 두지, 그걸 망상이다 뭐다 하고 끊으려고 애를 쓰니 그게 칼로 물 베기지 어떻게 끊어집니까. 어떠한 물체입니까, 그게? 끊어지게.
어떠한 물체라면 칼로 끊으면 끊어질 수 있지만 이 마음이라는 것은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칼로 물 베기나 똑같습니다. 그걸 끊으라는 게 아니라 공부할 수 있는 재료로 삼았으면 좋겠다 하는 겁니다. 졸음이 오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건데, 그놈한테서 나오는 건데, 그냥 편안하게 자게 내버려 두지, 그 뭐 그렇게 말이 많습니까? 아, 자다가 깰 때도 있겠지 내내 잡니까? 내내 자도 할 수 없는 거고 내내 깨어 있어도 할 수 없는 거지, 그것을 성화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떻게 정글을 넘어섭니까? 자든지 깨든지 시공을 초월해서, 바쁘게 서둘지 말고 차근차근히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런 형상이 돼야만 그 자리를 과감하게 넘어설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오늘 여러분의 질문을 좀 받아 볼까요?
질문자1: 진정한 보살 정신은 모름지기 모든 중생이 성불한 다음에야 마지막으로 자신도 성불하겠다는 발원에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모든 중생의 성불을 기약하시며 몸을 나투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수억겁의 습에 찌들어 평소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성불하기란 요원하고 자신의 성품을 보는 일조차도 기대하기란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생들은 자연히 제불보살의 가피를 빌게 되는데요, 이와 같이 견성성불을 바라면서 불보살의 가피를 비는 것도 타력신앙이라 하여 배척할 일인지요?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것도 타력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항상 얘기했죠. 유마힐 거사가, 문수가 병문안을 왔을 때 “중생들의 병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겠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뭐라고 했습니까? 보세요! 회사를 하더라도 재료를 준비해 놓고 물건을 다 만들어서 시중에 내놔야 딴 사람들에게도 다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말씀한 게 아니구요. 한번 바꿔 생각을 해 보세요. 내 몸뚱이 속의 중생들을 먼저 제도를 시켜야, 아시겠습니까? 내 중생들을 먼저 제도를 시켜야 부처ㆍ법신ㆍ보신ㆍ화신이 충만해서, 화해서 바꿔져서 털구멍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응신이 돼 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데 몸속에 있는 내 중생들이 다 제도가 돼야 마지막으로 자기를 완성하는 겁니다, 성불로.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나 완성을 하려면 내 중생부터 다 제도를 시켜야만 되는 겁니다. 아주 간편합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듯이, 왜 둘로 보고 망상이다, 뭐다 하고, 또는 어떤 애고가 오면 온통 빌고 야단법석을 딴데다 하니까, 그게 무슨 격이냐 하면 땅에 가다가 엎드러져 놓고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다 이겁니다. 땅에서 엎드러졌으면 땅을 짚고 일어나야 일어나지지 어떻게 허공을 허우적거려서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불보살에게 빌어도, 아무리 과거의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하더라도 비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나를 깨닫는 거는 절대적으로…, 자기가 먹을 건 자기가 먹어야 되는 법입니다. 항상 그렇게 얘기했죠. 자기만이 똥 눌 수 있고, 잠잘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어떤 것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다섯 가지만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물며 아니, 내 마음 찾기인데, 아니, 찾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기인데 아, 누가 대신 밥을 먹어 줍니까?
질문자1: 알겠습니다.『금강경』에 보면 ‘머무름이 없는 가운데에 일어나는 마음’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스님께서도 말씀하신 육조 혜능 선사께서는 이 한 구절을 듣고 홀연히 지견이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만약 마음에 머무름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닦고 배울 것이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닦고 배운다고 하는 것은 이미 머무르는 마음이 아닌지요?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그러면 머무른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아버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애가 와서 부르면 아버지 노릇을 합니까? 또 ‘여보 하고 부르면 내가 남편 노릇을 해야지.’하고 생각을 하고 남편 노릇을 합니까? 그렇게 미리미리 아주 생각을 하고 합니까, 모든 일체 만법을? 그리고 병고가 오더라도 ‘병고가 간다’ 이러고선 옵니까? ‘내가 병을 앓겠다’ 하고 앓습니까? 아까도 얘기했죠? ‘주인공이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청정하다는 뜻은 더럽고 깨끗한 게 전체 한데 합쳐서 돌아가고 나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 한 구절을 듣고서 지견이 열렸다고 한다면 여기 있는 분들 다 지견이 열립니다. 머무르는 바가 없이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지, 아니, 머무르는 바가 있게 생활합니까?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마음속으로 ‘야, 내가 집을 짓겠다.’ 한다면 그것도 머무름이 없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짓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바깥으로 집이 올라갔단 말입니다. 머무르는 바가 없이 머물렀다는 얘기죠. 일상생활을 전체 머무르는 바 없이 하고들 가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대로 여여하고 그대로 갖추어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주인공의, 그 중심에 의해서 들이고 내는 데 자유스럽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뭐가 찌들고 뭐가 어떻게 되고, 할 양으로 애를 쓰고…. 할 양으로 애를 쓸 필요가 없이 하고들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전부들 성불하십시오. 하하하….
질문자1: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이 되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마음공부와 어쩌면 조금 각도가 틀리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무척 어렵습니다. 각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의 욕구 분출이 늘어나고, 사회는 질서가 무너지고, 도덕성이 떨어지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우리나라 경제가 많이 침체돼 있는 상태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고 2월 말이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게 되는데요, 새 정부가 추진하려는 목표로서 ‘신한국 건설’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각 분야마다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합니다.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이에 대해 앞으로 우리 불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 스님의 견해와 가르침을 바랍니다.
스님: 어떠한 분야든지 불법을 떠나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다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입니다. 그것도 아주 작게 본다면 “왜, 스님이 그만큼 아신다면 경제 문제나 모든 일을 발란하게 하시지 왜 못 하십니까?”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넓게 본다면 이거는 모두가 각자가 하기 나름입니다. 생존경쟁을 하고 가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일어나면 저기선 저렇게 일어나고, 여기서 지배를 받는다면 저기선 지배를 하고, 이렇게 가는데 지금 지구가 집이라면 몇 사람이나 그 속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몇 사람이나 생존할 수 있고, 걱정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자기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모두 성장이 되거나 낙오가 되고, 또 성쇠가 되는 까닭에 지구가 유지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토끼 한 마리를 기를 때 그 이듬해가 되면 금방 열 마리 스무 마리가 되고 수가 없이 늘어납니다. 만약에 연쇄적으로 잡아먹지 않는다면 그냥 불어나죠. 먹고 살기도 어렵거니와 모든 물자도 참 빈곤해지는 결과가 될는지 모르죠. 자연 법칙으로 ‘너희가 마음을 넓게 쓰면 살아날 것이고, 넓지 못하다면 죽을 것이다.’라는 양단간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죠.
만약에 선생님이 저기 지나가는 사람 따귀를 한 대 때렸다면 말입니다, 맞은 사람이 그냥 푹 쓰러져서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다시금 일어나서 덤비고 거기에서 못 이기면 내일 또 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렇게 혼란 속에서 경쟁 속에서 돌아가는 거지요. 굶주리고 먹고 죽고 하는 것이 개미들 살림살이나 우리들 살림살이가 뭐 다른 게 있습니까? 좀 덩치가 크다 뿐이지, 살림살이의 용도가 좀 틀리다 뿐이고. 아, 왕개미, 검은 개미, 붉은 개미가 싸움을 하는데 말입니다. 그냥 토굴을 다 뺏고 먹을 것 다 그냥 압수하고 그러니까 산산이 흩어져서 모두 날뛰는데, 흙에 묻혀 죽고 다리가 잘려서 죽고 병신이 되고 온통 이러는 걸 봤습니다. 사람과 뭐가 다릅니까?
그러니까 어느 나라에선 굶어 죽는다, 또는 비가 안 와서 죽는다 이러는 것도 다 일리가 있는 겁니다. 일리가 있고 그런 것이지, 일리가 없다면 부처님 법이 어딨겠습니까? 그러니까 한마음을 넓게 써서 세세생생에 자유인이 되라는 얘기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말 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러니까 대천세계가 있고, 중천세계가 있고, 하천세계가 있습니다. 벌레들이 사는 세계가 있고, 땅 위로 다니는 세계가 있고, 날아다니는 세계가 있고 또는 그 모두를 종합해서 자유스럽게 사는 세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마음의 정신세계를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거 아닙니까? 또 여러분이 하고 가시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것 발견하시라 이거지,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모르더라도 이런 말을 한마디 들어 두신다면 언젠가 그런 일이 다가올 때 그 생각이 문득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 보지도 못하고 먹어 보지도 못한 것은 대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