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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간 야학활동 펼친 야학교사 김진식씨
“가난에 희망 심어주는 ‘올빼미’ 선생님”

가난에 희망 심어주는 올빼미 선생님 김진식씨.
성철 스님에게 어느 기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라고 물었다.

스님은 주저 없이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주경야독(晝耕夜讀)과 형설지공(螢雪之功)의 본보기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형설지공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보금자리 ‘야학’. 야학에는 배움에 목마른 학생과 그들의 빛이 되는 교사가 있다. 정년퇴임을 2년 앞에 둔 군무원 김진식씨(58). 그는 21년 동안 경기도 일대의 야학교에서 국어·한문·역사를 가르치다 현재 충무로에 있는 중부청소년학교에서 하루 4시간씩 역사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야학교사의 대명사다.

한 직장에서 20년 동안 몸담고 있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군무원이란 직업을 겸직하며 야학교편을 21년 동안 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더군다나 강의료는 고사하고 오히려 매달 20여만원씩의 쌈 짓 돈을 써 가면서 까지 말이다.

“배고픈 설움 못지않게 못 배운 설움도 컸습니다. 열아홉 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절에서 공부하며 중·고등학교 검정고시와 군무원시험에 합격했지요. 그때 다짐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지금까지 김씨가 담당했던 야학만도 성남 제일실업학교, 서울 암사동 유심청소년학교를 비롯해 5곳. 학생 수로 따지면 2천여명이 훌쩍 넘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1991년 성남 제일실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당시 김씨는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 성남시 은행2동 공터에 비닐하우스로 야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집 없는 학생들을 위해 비닐하우스 야학교 옆에 벽돌과 슬래이트를 이용해 임시 처소도 만들었다. 검정고시 시험 한 달 전에는 학생들과 함께 합숙을 해 가며 모든 열정을 다 바쳤다.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하루 3시간 씩 자며 원고를 정리해 500페이지 분량의 ‘신 역사길라잡이’란 역사참고서도 만들었다. 하지만 김씨는 몸을 너무 혹사시킨 탓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과로 영양실조 그리고 열병으로 그는 2개월 동안 꼼짝없이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배움이란 물을 거슬러 배를 가게하는 것과 같다고 했든가. 21년동안 야학의 만학도들과 함께 배움의 노를 저어온 김진식씨의 강의 모습.
그러나 몸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퇴근 후 매일 밤 11시까지 야학을 가르치는 강행군은 계속됐다. 야학을 핑계로 번번이 회식에 빠지는 일이 잦자 이제 직장상사와 동료들은 아예 회식자리에 나오란 말조차도 꺼내지 않는다.

또 아내 변공숙씨(54)의 ‘야학금지령’도 내려졌다.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이 몸도 돌보지 않고 야학에만 매달리는 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변씨는 밤낮 야학에 빠져 사는 남편의 건강이 더 악화될까봐 타일러도 보고 화도 내봤지만 도무지 김씨의 야학에 대한 집념은 꺾을 수 없었다. 사실 야학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큰 유혹의 손길도 있었다. 모입시학원에서 제시한 억대의 스카우트 제의가 그것. “역사과목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가르친다”라는 학생들의 입소문이 학원가에까지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NO’.

“임실 심원사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주지 스님이 항상 말씀하셨죠. ‘잠깐 왔다가는 인생 제 욕심만 챙기지 말고 많이 베풀면서 생활하라’고 말이지요. 저를 믿고 따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게 ‘나의 길’이란 생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김씨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배우고 싶다’는 학구열에 불타는 신규학생들이 속속 입학할 때와 야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사회의 당당한 역군으로 거듭날 때” 라고 말한다. 사실 김씨가 배출한 제자 중에는 은행장 출신을 비롯해 해군 영관급 장교, 교수 등 사회 각계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사람도 그 수를 헤아리기 조차 힘들다.

또 김씨의 활동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많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국방부 장관 표창’ ‘서울 사랑 시민상’ ‘자랑스런 서울 시민상’ ‘전라북도지사표창’ 등이 그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명절과 생일 때면 김씨의 집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 동안 김씨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김씨의 집을 찾기 때문이다.

모 은행 지점장인 주댁범씨(45)는 “김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거예요. 때론 아버지처럼 때론 친형처럼 회초리도 드시고 그 추웠던 비닐하우스 야학교에서 라면을 끓여 주셨던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면 눈물을 글썽인다.

제자들의 보은 못지않게 주변의 칭찬도 자자하다. 지금까지 4년 간 함께 근무해 온 중구청소년학교 송용순 교장 선생님은 “김 선생님을 보면 ‘봉사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마치 ‘친자식들을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성과 노력을 다하는 모습에 항상 마음이 흐뭇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다.

밤 늦은 시간 충무로 중부청소년학교의 야학생들이 김진식씨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또 동료 야학교사인 권윤길씨도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표창도 많이 받았지만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열과 성의를 다하는 김 선생님이 존경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나무와 숲을 가꾸는 게 백년지대계라고 한다면 교육사업은 천년지대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주고 머리 속에는 지식을 담아주는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생각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김씨. 스무 살 때 스님에게 펜글씨를 배우면서부터 공부에 취미를 붙여 불과 3년 만에 중·고교 검정고시와 9급 군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의 학구열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하고 내친 김에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박사학위에 도전 중이다.

이제 2년 후면 공직에서 정년퇴임을 하는 김씨. 여느 사람 같았으면 퇴직연금으로 어떻게 하면 더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 수 있을까를 궁리하겠지만 그는 오히려 굴레를 벗어버린 기분이란다. 이제 정말로 하루 24시간을 모두 야학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비닐하우스 야학교에서처럼 가난하고 추웠지만 배우겠다는 의지만은 용광로보다 더 뜨거웠고 사랑과 꿈이 넘치는 야학교를 세우겠다는 김씨. 다복다복 흑판을 채워가는 선생님의 분필 글씨처럼 그의 소중한 꿈도 그렇게 채워지고 있다.
글=노병철 기자ㆍ사진=고영배 기자 | sasiman@buddhapia.com |
2005-12-20 오전 10:27:00
 
한마디
저도 한때 야학교사를 했었는데 참 힘들었어요. 대단한 분이군요. 아자아자 화이팅^^
(2005-12-20 오후 6: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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