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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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난자’ 실험용으로 못 쓰나?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강의 - 개인의 가치 vs 공동체적 덕목(1)


삼계유식(三界唯識), 세계는 이미지(相)이다! 우리가 쓰는 말은 바로 그 이미지들의 이름표인데, 이들은 홀로 있지 않고, 연관된 가치의 그물로 짜여져 있다.

말에는 자성(自性)이 없고, 의타기(依他起)로만 존재한다. 말의 의미를 알기가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마디 말의 의미는 우리가 맥락이라고 부르는, 그리고 체계라고 부르는 것 하에서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화엄의 이치는 언어의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1. ‘개인’이라는 이름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인간에 대해 논하는 모든 언설은 이미지이니, 그것을 진정 실상으로 승인해 주어서는 천만 불가하다. ‘자유’와 ‘인권’의 이름으로 인간을 보기 시작한 것은 현저히 근대적 개념이다. 동아시아에서, 그리고 인도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동방에서 ‘개인’은 낯설기 그지없던 개념이었다.

근대의 개인(individual)은 이름 그대로 ‘나누어질 수 없는’ 최종적 단위로 인식된다. 개인이란 자기 욕망의 의식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는 주체인 바, 사회나 국가는 어떤 명분, 어떤 필요에 의해서든 이 천부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고 한다. 서구의 근대는 그 이념하에서 개인의 영역과 심기를 한사코 다치지 않기 위한 섬세한 장치들을 개발해 왔다.

미국에 도착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말과 행동을 하도록 교육받는다. 그는 곳곳에서 인종과 성별, 그리고 종교적으로 수많은 금기의 선을 건드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 중에는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도 많지만, 우스꽝스럽거나 이게 아니다 싶은 것도 많았다.

하버드 발표회 때 어떤 한국계 미국 여인에게 ‘나이’를 물었다가, 얼어붙은 얼굴에 부르르 떠는 입술을 보고, 도리어 내가 기절을 할 뻔했다.

“그게, 그토록 큰 범죄인가?”


2.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

그 규범과 제도들은 천만 ‘문화적’이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다. 윤리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그 점을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한 문화가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종이에 적어 항아리에 넣고, 다른 문화권에서 악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씩 빼냈더니, 항아리에는 아무런 쪽지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방 윤리의 축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였다. 이는 아울러 근대가 대두하기 전, 서양의 공통적 관념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가. 사회나 자연이나 전체가 있고, 부분이 있지, 부분들이 모여 전체가 된 것이 아니다. 연기법(緣起法), 즉 모든 개체들은 전체의 협력으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어린아이의 첫 울음소리는 독립된 개인으로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정에, 일정한 사회와 문화 속으로 던져지고, 그 전체의 목적에 맞게 길러지고 교육된다. 개체는 전체의 관습을 교육받고, 그 가치를 내면화한다. 그 사회화가 잘 되지 않을 경우, 회초리를 맞거나 밥을 굶어야 한다.



3. 명분(名分), 그리고 연기법(緣起法)

특히 유교와 불교는 한 목소리로 말한다. 한 개체는 가족과 사회 속의 일원으로 태어나, 무수한 관계적 지위 속에서 적절한 행동을 다양하게 하도록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다. 유교는 그것을 명분(名分), 즉 ‘다양한 이름에 걸맞는 직분’이라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 명분은 가족과 사회에 그치지 않고 우주적 지평을 갖고 있다. 우리는 가족과 사회, 국가는 물론 궁극적으로 우주의 일원인 것이다.

불교 또한 다르지 않다. 개인은 서로 연관된 전체 속의 한 그물코이므로, 타자와의 공감과 배려가 근본 덕목이 된다.
인간은 탄생과 더불어 자신을 이 전체로부터 분리하고, 혼자만의 복리를 추구하려는 일탈의 충동을 습관화하기 쉽다.

불교는 끝없이 가르친다. “이기심은 네 본성의 실현이 아니고 일탈이다. 타자와의 유대를 끊고, 공감을 그치며, 그리하여 전체를 고려하지 않으면 너는 그 분별(分別)로 인한 소외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정신적으로 사망한다.”


4. ‘가치’들은 충돌한다

황우석 교수팀의 실험에 사용된 난자 채취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나는 엉뚱하게 ‘문화적 차이’를 떠올렸다. 온갖 비난과 의혹에 동원된 논리와 사고는 전형적으로 ‘개인주의적’이다. 그들은 그것이 절대적 기준이며, 보편적 관점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 맹점이 있다. 그들은 이 전형적으로 근대적 가치관이 최근에 형성된, 즉 ‘역사성’을 갖는다는 것을 성찰하지 않고, 그 잣대로 세상을 거침없이 재단해 나간다.

공동체를 단위로 하는 문화는 ‘개인’을 중시하는 문화와 전혀 다른 가치서열과 위계를 갖는다. 이를테면, 공동체적 문화는 타자를 의식하고, 늘 전체를 고려한다. 구성원들은 타인에의 배려와 집단의 번영이 그 존재의 이유라는 것을 내면화하며 자란다. 듀런트는 아예 “윤리란 전체를 위한 구성원의 협력”이라고 정의하기까지 한다. 여기 덕목은 의무와 책임이다.



5. 의무, 책임, 희생의 윤리학

전체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세상에 무엇인가를 보탬으로써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 그렇지 않다면, 저 난자를 기증하겠다고 나서는 여인들의 행렬을 이해할 수 없다. 외국의 저널은 이 꽃을 든 폭발적 행진이 IMF때의 금 모으기를 연상시킨다고 하고 있다. 인간은 본시 이기적 동물이 아니다. 동양의 지혜, 불교를 위시하여 노장과 유교가 근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지점이 이것이다.
가족을 생각해보라. 나로 하여 가족이 경제적 정서적 안정을 누릴 때 나는 존재의 보람을 느낀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더이상 할 역할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삶을 온통 자신의 욕망 구현을 위해 뛰어온 사람은 곧 공허와 권태의 허무주의에 빠진다.
늙어 얼굴이 곱고 건강한 사람은 바로 이 불성(佛性)의 비밀을 엿보고, 그 깨달음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6. 그러므로 희생은 고귀하다

불교의 바라밀 가운데 큰 것이 보시,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부처님은 굶주린 독수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었고, <금강경>이 설파하듯, 사지를 찢기면서도 화를 내거나 원망을 하지 않았다.

난자는 몸의 일부분이다. 이웃의 난치병을 고치기 위해, 혹은 국부를 증진하고 국가이미지 제고를 위해 그것을 바치는 것은 고귀한 행동이다. 누구보다 실제 연구에 직접 참가한 사람이 자신의 난자부터 제공하겠다는 발상은 자연스럽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에게서 보듯이, 과학은 자신의 몸을 실험용으로 내 놓은 사람들의 용기와 헌신을 통해 미지의 영역을 한 발짝씩 개척해 왔다.

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
2005-12-16 오후 3:18:00
 
한마디
얼마 전 이 기사를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는데 제목을 바꿔 내건 속셈은? 존경하는 한 교수님 눈금을 잘못 읽고 대중을 엉뚱하게 이끌고 계십니다. 난자의 출처를 두고 황교수가 뻔뻔하게 거짓을 속삭이고 그러면서도 반성을 모르고 권위에 짓눌린 연구원은 하는 수 없이 난자를 기증하고는 속앓이를 하고... 불성으로 치장할 문제가 아니지요. 지혜를 갈구하면서 한 교수님께 항상 기대고 있지만 개인의 문제, 도식적인 동서양의 구분 곧 분별로 거짓을 옹호하는 작금의 발언은 실망입니다.
(2005-12-19 오후 10: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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