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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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茶史)연표 연재를 마치며
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문화사


벌써 일 년이 넘었다. 대부분의 장기간 연재가 쓰는 이에게는 부담스럽게 마련인데 이번 연재만은 늘 즐거웠던 것은 역사 속의 차인들을 만난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연재를 시작할 때의 집필 의도는 뚜렷했으나 정말 그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사이 많은 격려와 자료를 주신 여러분과 신문사 관계자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내용의 특성상 한자로 써야하는데도 대중매체임으로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쉬웠고, 때로는 많은 자료가 다 못 들어가서 그 중 취사선택해야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유건집 교수. 현대불교자료사진.
일본에 관계되는 사항들을 일본식 이름 대신 우리 음으로 표기한 것은 중국과 형평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인물들의 출생연대를 기점으로 한 것은 대부분의 저술이나 활동 연대가 문헌마다 다르거나 불확실하고 어떤 사항은 시작부터 완성까지 긴 시간이 걸려서, 비교적 확실한 출생연대를 기준했다. 따라서 실제로 그 인물의 활동은 생후 30~50여년 뒤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광복 후 오늘까지의 부분이 남았으나 후에 시간과 지면이 여유가 생길 때, 차에 관련된 사항과 뚜렷한 자국을 남긴 인물들을 골라 사실대로 기술하여 후학들에게 도움을 줄까 한다.

한말(韓末)부터 일제치하의 반세기 동안은 우리 다사상(茶史上) 아주 미약하게 명맥만을 유지한 시기였기에, 일본식 다도가 아무 저항 없이 소위 식자(識者)들에 의해 들어와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세월이 황급해져서 사람들의 생활이 힘들고 고달파서 매일 쓰는 일용품을 구해서 살아야 하는 급급한 형편에 어느 겨를에 한가히 차 마시는 것을 논하겠는가?”라고 한 중국 송나라 휘종 황제의 말이 그대로 현실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원 일부에서는 끊임없이 다맥(茶脈)을 이어온 것이 다행스런 일이었다.

다사를 쓰면서 만난 차인들 중에는 존경할 만한 분들이 많았다. 그들은 세속적인 명예와 재물,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신념, 진정한 신앙에서 얻은 깨달음을 실천궁행(躬行)했다. 충담 이규보 원감 선사 김시습 이목 정약용 신위 초의 선사 등의 시문과 행적을 대할 때마다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선조들에 비해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들은 평생 일관된 지표가 있어서 차를 마시므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올바르고 참됨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팽배해진 물질적 풍요 속에 욕망을 채우기 위해 차를 이용하고 있지나 않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항용 우리 차가 음다(飮茶)용이 아니고 행다(行茶)나 품다(品茶) 시험용으로 쓰이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자못 민망스럽다.

오늘의 다계(茶界)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은 이런 현실에 대하여 깊이 고뇌하고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고상한 문화적인 세계에 발 담그고 있으면서 부와 명예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먼 훗날 다사를 쓰는 사람들이 그 탐욕스런 부와 허명(虛名)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알아야 한다.

차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고상한 것이 아니고, 마시고 난 다음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어떤 단체나 모임의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문제되지 않고, 내가 얼마나 좋은 차 정신을 그 모임에 남겼느냐가 중요하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그런 비뚤어진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자신이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인물이면서도. 내 자신이 뼈를 깎는 아픔으로 나를 정화시키지 못하면 남이나 주변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도로(徒勞)에 불과한 공염불이 되고 만다.

차야 말로 역사가 스며있는 음료다. 자신이 쓰는 다기에도 역사가 있어야 하고, 자신의 다력(茶歷)에도 아름다운 자취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선적(禪的) 구도정신의 소산이다. 이른바 명장 아무개가 만든 비싼 다기에 기십만 원짜리의 차를 마신다고 차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급스런 다탁(茶卓)에, 고가의 다구들이 벽에 가득하고, 선물로 받은 차들이 많아서 어느 것을 마셔야 할지 망설여야 하는 사람들 중에 참다운 차인은 드물다. 그들은 항용 아무 아무가 이런 좋은 것을 주었다는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차를 이용할 뿐이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나 할까.

내가 만난 역사 속의 차인들은 진정 차가 좋아서 그 정신에 젖어 도(道)를 참구(參究)하듯 심오했고, 때로는 우주를 껴안고 공계(空界)를 넘나들며, 일점의 불의(不意)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 같은 그들의 성역(聖域)은 아무리 높은 권력이나 거만의 금력으로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자아(絶對自我)의 세계였다. 차를 이처럼 높은 정신세계로 고양시킨 예를 나는 아직 다른 나라의 차인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다.

차를 마시면 세상의 어떤 귀중하고 아름다운 물건이라도 보잘것없는 거죽대기에 지나지 않고[萬類蘧蒢], 드디어는 나와 남, 나와 우주가 구분이 없는 초탈의 경지를 우유했다.[方寸日月] 거기에 시비가 있을 수 없고, 오만과 편견이 발붙일 수 없었다. 진작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중국의 역대 차인들 속에서도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겐 차가 바로 생활이요, 참선이요, 자기정화의 길이었다.


“채소 삶고 차 끓이니 너무 즐겁고 [烹蔬煮茗有餘歡]
산과 물 바라보니 생각 끝없네“ [眺水看山無限思]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충止) 스님의 시다. 한 점의 속진도 용납할 수 없는 여유와 한가로움이 가득하고, 생각에 막힘이 없으니 그 깊고 넓음을 어찌 측량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연재에 관심을 가져준 독자 여러분들에게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말을 전한다.
2005-12-14 오후 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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