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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일 통일신라시대 목조불상임을 알리는 명문이 공개돼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에 대한 학술적 연구성과가 12월 10일 ‘해인사 비로자나불 학술강연회’에서 발표됐다.
미술사적 연구(강우방 이화여대 교수), 역사적 연구(김상현 동국대 교수), 목재에 대한 과학적 분석(박상진 경북대 교수), 묵서해독(남풍현 前 고문서학회장) 등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해인사 비로자나불은 조금씩 실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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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비로자나불은 9세기 作인가
이날 세미나에서 관심의 초점은 법보전 비로자나불이 과연 묵서에 나타난 대로 9세기에 제작된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불상 내부에서 883년작임을 알리는 명문이 발견됐음에도, 통일신라시대 목조불상이 한 점도 없었고 보존 상태도 굉장히 좋아 학계 일각에서는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발표를 맡은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미술사학과)는 “법보전 비로자나불의 풍만한 어깨·팔·얼굴이 8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나 9세기에 유행한 양식으로 석굴암 본존상(751~753년)이나 남산 약수곡 약사여래좌상 등과 닮아있고, 옷 주름이 두텁게 층단을 이루고, 큰 주름 사이에 들어간 부분이 볼록하게 돼 있는 번파식양식이 통일신라 후반부터 고려 초반에 나타난 형식이라는 점에서 8세기 말~9세기 초 작품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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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강 교수는 그간 비로자나불을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한 오류에 대해 △통일신라시대까지는 목조불이 조성돼지 않았을 것이라는 선입견 △육계에 중간계주와 정상계주가 있어 후대 것으로 보였던 점 등을 이유로 꼽았다.
이에 대해 김리나 홍익대 교수(예술학과)는 “고려나 조선시대의 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옷 주름 처리에서 부드럽게 늘어져 사실적이고도 자연럽게 처리된 점이 경주, 경상북도 지역의 8세기 말에서 9세기 상들과 친연성을 보인다”며 강우방 교수 의견을 지지했다.
이 같은 주장은 박상진 경북대 교수(임산공학과)의 과학적 분석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됐다. 박 교수는 법보전 비로자나불 복장에서 3개,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에서 4개의 표본을 채취해서 서울대에 AMS(질량분석이온빔가속기) 분석을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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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법보전 비로자나불의 AMS연대 값은 AD730±40년,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의 AMS연대 값은 910±40년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는 채취된 표본의 위치에 해당하는 값이기 때문에 나무의 다듬어진 부분을 감안해서 나무의 나이를 파악, 보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 같은 작업을 거쳐 법보전 비로자나불은 AD740년 전후부터 950년 전후,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은 AD950년부터 109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됐다(신뢰한계 95.34%).
박원규 충북대 교수(산림과학부)도 “탄소연대의 측정오차와 변동오차를 모두 고려하더라도 두 불상은 9~10세기 것임이 분명하다”며 “연륜연대 측정방법을 사용해서 좀 더 정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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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서명의 문장도 제작연대가 9세기라는 심증을 굳히게 했다. 남풍현 前 고문서협회장은 “ ‘(좌측)中和三年癸卯此像夏節柒金着成 (우측)誓願大角干主燈身賜 右座妃主燈身○○’라는 명문을 한문어순으로 해석하면 뜻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한자어를 우리말 어순으로 배열해놓은 초기 이두문 형태이기 때문이다. 초기 이두문으로서 한문적인 표현을 담은 동해시삼화사철불(860년대 추정)의 것과 유사하다”며 “이런 문체가 9세기에 와서 널리 쓰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강우방 교수는 법보전과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의 선후에 대해 AMS 조사 결과와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관심을 끌었다. 강 교수는 “미술사가는 양식으로 년대를 추정해야하는 것”이라며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이 더욱 뚜렷한 번파식을 보이고 있으며 내부처리가 깔끔한 점과 883년이면 나라가 기울어 조각 솜씨가 하향세에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 후에 대적광전 비로자나불과 같은 불상이 조성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이 먼저 조성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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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서의 ‘대각간’은 위홍인가?
해인사 비로자나불 내부에서 ‘(좌측)中和三年癸卯此像夏節柒金着成 (우측)誓願大角干主燈身賜 右座妃主燈身○○’라는 명문이 공개되자 대각간은 각간 위홍이며, 법보전과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은 진성여왕이 각간 위홍을 위해 조성됐으며, 법보전과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은 위홍과 진성여왕에 해당한다는 설까지 제기됐다. 심지어는 이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위홍의 관등이 875년에 이찬(伊 )이었고, 죽은 해인 888년(진성여왕 2년) 각간이었다. 883년에 대각간이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그의 공식적인 비(妃)는 부호(鳧好)부인이어서, 명문에 등장하는 ‘妃’를 진성여왕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
또 883년은 이들이 살아있던 때여서 통상 사후에 발원의 의미로 불상을 조성하는 대부분의 예에 비추어 두 비로자나불과 위홍·진성여왕과의 관련성을 말하는 것은 비약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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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환 서강대 박물관 연구교수도 대각간이 먼저 오고 ‘妃’가 다음에 온 점을 주목하며 “엄연히 왕이었던 진성여왕이 대각간보다 뒤에 올 리는 없다”며 “위홍과 진성여왕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 남풍현 前 고문서학회장과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교양학부)는 각각 명문에 대한 번역을 제시했다. 남 前 회장은 “(좌측)중화3년 여름에 이 불상을 금칠까지 해서 조성하기를 마쳤다. (우측)서원은 대각간님에게 등신(燈身)을 주시며 그 우좌에 앉은 부인에게도 등신을…”로 해석했으며,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교양학부)는 “(좌측)중화3년 계묘 여름에 이 불상을 칠하고 금박을 붙여 만들었다. (우측)서원한 대각간님의 등신이시며,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은 비(妃)님의 등신이다”로 번역했다.
등신(燈身)의 의미에 대해서는 남 前 회장과 정 교수 공히 “어리석음을 없애는 지혜의 빛을 발하는 본체”로 봤다. 판독되지 않은 우측 명문 마지막 두 자에 대해서 남 前 회장은 ‘月中’으로 읽으며 발원을 맡은 스님의 법명으로 추정했고, 정 교수는 ‘口’로 읽었으나 의미를 밝히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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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연구 필요
이번 학술발표회를 통해 두 비로자나불의 조성연대를 둘러싼 잡음은 어느 정도 잦아들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과학적인 분석 결과가 9세기 作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상의 연대 추정에 AMS 분석을 적용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로서, 큰 성과로 꼽을 만하다.
하지만 명문의 발견부터 일정한 연구성과를 발표하기까지의 과정이 매끄럽지는 않았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발표에서 김상현 교수는 “조사과정이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복장이 많이 나왔을 텐데 그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고 명문과 불상만 갖고 연구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복장과 분리해서 연구하다보면 연구성과가 쉽게 뒤집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김리나 교수도 “법보전 비로자나불 고찰에는 표현의 양식적인 특징, 상 내부에 있는 기록의 내용해석은 물론 함께 들어있던 복장 내용물이 중요하다”며 “이런 재료를 통해 공통된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해결점과 문제점을 알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은 “법보전 비로자나불 복장에서 나온 500여점의 유물은 밀봉해서 보관중”이라며 “추후 복장에 대한 연구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법보전 비로자나불에서 나온 복장유물에 대한 연구까지 이뤄진다면 비로자나불에 대한 훨씬 포괄적인 이해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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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나불의 계주와 나발의 처리와 개금 또한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계주와 나발은 통일신라시대 것이 아닌 고려와 조선 불상의 특징으로, 비로자나불이 9세기 것이라고 한다면 어울릴 수 없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또 개금은 불상의 인상을 상당히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남게 하기 위해서는 엄밀한 고증을 거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해인사 측은 현재 친견법회가 진행 중인 해인사 보경당에 옻칠만 돼 있는 채로 봉안돼 있는 법보전과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을 1월 중순경 개금을 완료할 계획으로, 그 전까지는 CT촬영이나 X레이 촬영 등 연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