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사유(思惟)의 계단이다.
어떤 길 위에 서있느냐에 따라 생각의 깊이와 결과가 달라진다. 또한 어떤 사상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상을 품고 있는 인간의 생활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번 선원장스님들의 ‘선의 원류를 찾다’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옛 우리 조사스님들을 북돋워 준 그러한 힘들은 지금도 우리들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 힘을 바탕으로 우리들도 무엇이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중국의 평야는 하늘과 평야가 서로 마주 보며 펼쳐진 듯 끝없는 지평선을 지니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광활한 들판 뿐, 벼와 수수의 누런 이삭들이 파도의 물결처럼 끝없이 출렁인다.
양자강 이남의 최고 명산인 호남성 남악 형산은 드넓은 호남평야 한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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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江西)의 으뜸은 마조, 호남(湖南)의 으뜸은 석두라는 말에서 강호(江湖)라는 말의 유래가 됐다고 하듯이 선종사(禪宗史)의 흐름으로는 남악에서 발원한 가느다란 물줄기가 둘로 나뉘어 산을 내려와 드디어 도도한 대하가 되어 중원을 흠뻑 적셨고 급기야 한국, 일본까지 덮게 되었던 것이다.
회양 스님께서 계셨던 복엄사(舊 반야사)와 묘탑(墓塔), 그리고 마조 스님께서 오도(悟道)하셨던 마경대(磨鏡台)는 척발봉(擲鉢峰: 복엄사 창건주인 천태종의 남악혜사 선사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떠날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자신이 쓰던 발우를 내던진 데서 비롯된 이름) 이라는 산봉우리 아래 산록에 자리하고 있다.
굽이굽이 남악의 허리를 감아돌며 솔숲 길을 오르다보면 천오백년 고찰을 에두르고 있는 담장이 보인다.
비록 문화혁명때 불상들의 파괴를 피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아담한 규모의 절로 잘 복원되어 있었다.
복엄사는 위진 남죽조 시대에 창건된 옛 절로 산문 위에 걸린 ‘천하법원(天下法院)’이라는 가로 편액과 양쪽 기둥의 ‘6조고찰(六朝古刹)’ ‘7조도량(七祖道場)’이라는 주련이 이 사찰의 정체성(正體性)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산문 앞 솔숲 그늘아래 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노라니 내 마음 깊은 곳으로는 천년을 이어져 오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혜사선사께서 ‘지관선(止觀禪)’을 설한 <대승지관법문>을 이 절에서 저술하시던 일, 회양 스님께서 마조·석두 스님과 법거량을 나누셨던 일, 자명초원 스님께서 이 절의 방장으로 계실 때 황룡혜남 스님을 견성(見性)케 하신 일 등, 바람결에도 은은히 묻어오는 그 옛 향기가 들리는 듯 하였다.
복엄사는 산문, 지객청(知客廳: 절의 손님을 맞는 응접실), 악신전(岳新殿: 창건 당시부터 산신을 모셨는데 문화혁명때 파괴되고 80년대 초기부터 등소평, 강택민 등의 전향적인 종교정책으로 대부분의 다른 절들처럼 복원된 것), 대웅전, 조사전, 설법당의 순서로 복원되어 있었다.
선종사찰로 특이한 점은 산신을 모신 악신전과 대웅전 안에 가람 수호신상을 모신 점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남악 형산이 중악 숭산, 동악 태산, 서악 화산, 북악 항산과 함께 중국 5대 명산(五嶽)의 하나로 예부터 종교의 성지로 이름이 높을 뿐만 아니라 남악 최초의 불교사찰로서 민족종교인 도교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흔적인 듯 했다.
선방은 재당(齋堂: 식당)과 더불어 사원 양쪽으로 고저 균형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동서당(東西堂)식이 아니라 대부분의 중국절들처럼 지붕을 올린 행각과 보도가 이어지는 회랑형식의 가람 배치양식이었다.
복엄사에는 현재 20 여분 가량의 스님이 계시는데 아침 저녁으로 잠시 앉아 있을 뿐 체계적인 선수행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육조 스님께서도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가르침으로써 형식적인 좌선수행보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수행을 강조하셨으니 외형적인 모습으로 어찌 평할 수 있으랴.
그리고 복엄사와 더불어 몇 군데 선종사찰의 식당에서는 거사, 보살들이 스님들과 양쪽으로 나뉜채 의자에 앉아서 같은 방식으로 발우공양(사기그릇 2개로 대용)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육조 스님께서 설파한 자유 평등의 가르침(범성일여:凡聖一如)이 아직도 전해 내려오는 듯 하여 도리어 신선하게 느껴졌다.
돈오 남종선이 지닌 선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며 사회 역사적 각도에서 보면 분명히 해방사상이고 혁명사상이기는 하다.
그러나 모택동과 강택민이 평소 <육조단경>과 <금강경>을 애독했었다는 기록과 등소평, 강택민, 후진타오에 이르기까지의 불교를 염두에 둔 듯한 일련의 종교 개방 정책도 문화혁명과 천안문 사태, 티베트 무단점령 등으로 그들이 무수한 인명과 불교를 희생시켰던 장본인이라는 점과 함께 정치와 종교의 영원한 패러독스를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창건 당시로부터 내려오는 호포천이라는 샘물과 혜사 선사가 계를 주셨다는 은행나무, 소동파의 화두 ‘계성산색(溪聲山色)’의 글자가 음각된 깎아지른 듯 서있는 일생암(一生岩)이라는 바위 등을 바라보자니 세월의 온갖 풍파에도 옛 모습을 잃지않은 의연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어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인데도…’하는 깊은 감회와 함께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날 수 없게 했다.
▲ 법을 깨치신 인연(悟道機緣)
남악회양(南嶽懷讓, 677~ 744) 스님은 열 다섯의 나이로 율종(律宗) 사찰에서 출가하여 약관 스무살에 계를 받았다. 한동안 계율 수행에 몰두했으나 늘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던 스님은 숭산에 계시던 혜안(慧安) 선사의 권유로 광동성 조계 남화사의 육조 스님을 찾아 뵙는다.
육조: 어디서 왔는가?
회양: 숭산에서 왔습니다.
육조: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회양 스님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8년만에야 홀연히 깨치게 된다.
죄송스러운 표현이지만, 회양 스님은 다년간 계율을 연구할 정도로 무척 성실한 성품이셨으나 우리와 같은 진정한(?) 범부(凡夫)였다.
역대 33조사와 하물며 육조 스님의 의발을 뺏으러 쫓아왔던 혜명 스님까지도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않을 때 어떤 것이 수좌의 본래면목인가?’ 라는 육조 스님의 한 말씀 아래 바로 근본을 깨칠 정도로 대개 언하대오(言下大悟) 하셨건만 스님께서는 우리처럼 오랫동안 참구하셔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써 ‘이뭣고?’화두 운수납자의 시조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8년동안 때로는 육조 스님 밑에서, 때로는 여러 해 여러 곳을 빈 들녘의 바람처럼 떠돌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에서도, 잘 익은 이삭들 위에서 빛나는 햇빛에서도, 들판의 무덤 옆에서 홀로 잠들며 수천 개의 반짝이는 보석을 바라보면서도 끊임없이 궁구하셨을 것이다.
깨치신 뒤 다시 육조 스님께 여쭙는다.
회양: 제가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육조: 그것이 무엇인가?
회양: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육조: 가히 닦아서 증득할 수 있는 것인가?
회양: 닦아 증득함이 없지는 않사오나 때묻거나 더럽혀질 수는 없습니다.
육조: 때 묻지도 더럽혀질 수도 없는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께서 애써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대도 그렇고 나 또한 그러하다.
후대(後代)의 황벽 스님께서 ‘깨쳐 안 마음은 텅 빈 허공과 같아 생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툭 트이고 고요하다. 밝고 오묘하며 안락할 따름이다.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바로 어긋나 버린다’라 하신대로 깨침의 경계에 대해 누구든지 표현하려 하면 미개구착(未開口錯: 입 벌리기 전에 이미 그르쳤다는 뜻)이 될 뿐일 것이다. 그런데도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감히 사족을 붙여본다.
무릇 회양 스님께서 깨치시고 나서도 닦아 증득함이 없지 않다함은 무엇인가? 무수지수(無修之修: 닦음이 없이 닦는다는 도인의 보림행)이든, 보현보살의 원력행(願力行)이든, 어찌 돈오돈수(頓悟頓修: 몰록 깨치고 나면 더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뜻)만을 주장한 것이라 볼 수 있겠는가?
또한 더럽혀 질 수 없다함은 본자성불(本自成佛: 본래 스스로 부처임을 갖추고 있음)이요,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 우리의 본 마음은 항상 깨끗한 채로 있음)이라는 육조 스님 말씀처럼 어찌 돈오점수(頓悟漸修: 몰록 깨치고도 익힌 업이 남아 있기에 더 닦아야 함)만을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중봉(中峰) 스님 말씀처럼 우리 자신이 스스로 깨쳐 알아 그 진면목을 밑바닥까지 도달하고서야 실천 수행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저절로 알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마조의 초암자리에 후대 마조법손들이 지은 전법원(傳法院)자리는 복엄사로부터 1㎞ 떨어져 올라가는 길목인 삼거리에 있다. 한때는 남악빈관이라는 이름의 호텔이었으나 현재는 ‘항일역사기념관’이 되어 있었다.
기념관에서 일백 미터쯤 산 위로 올라가는 길 왼쪽 밑에 ‘마경대’라는 돌푯말 뒤로 ‘조원(祖源)’이라는 큰 글자가 새겨진 넓적한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가 바로 남악이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는 비유로 마조를 깨우친 ‘마전작경(磨전作鏡)의 현장이다.
‘조원’이라 쓰여진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본다. 지나간 내 삶의 물결이 이곳에서는 고요한 불꽃이 되고 모든 것들이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듯 했다.
내가 만일 당시의 마조 스님이었다면 회양 스님께서 내 앞에서 비록 기와를 갈고 계신다 해도 모른척 하고 이렇듯 그냥 앉아만 있었을텐데…, 그러면 성실한 성품의 스승님께서는 아직까지도 끙끙대며 기와를 갈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결제철마다 신명을 바치고 용맹정진하는 2천여 수좌 스님들과 뛰어난 선지식들께서 하나 둘 세연을 다 하시고 열반에 이르는 선가의 오늘을 생각하노라니 불현듯 두 눈에는 호수가 어리고 물결이 일렁거렸다.
남악회양의 묘탑은 전법원 자리인 역사기념관이 내려다 보이는 조금 윗쪽 언덕에 모셔져 있는데 높이 2m쯤 되는 정육면체 2층석탑이다.
기단석에는 황벽 스님의 제자였던 당나라 재상 배휴의 글씨로 ‘최승륜탑(最勝輪塔)’이라는 탑명이 음각돼 있었고 탑 뒤로는 중앙에 ‘선종7조회양대혜선사탑(禪宗七祖懷讓大慧禪師塔)’이라는 비명이 석벽에 박혀 있었다.
남악회양 선사는 일평생을 거의 이름 없는 수행자로 살았으나 선종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최대 업적은 선불교의 심요(心要)인 ‘돈오(頓悟:本自成佛)와 평상심(平常心)’을 마조에게 전한 것이라 하겠다. 돈오를 가능케하는 원천은 일상생활 속의 늘 변함없는 평상심이다.
그 어떤 진리의 이론도 구체적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부질없는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불법(佛法)이란 무엇인가? 부처님 말씀처럼 지금 바로 볼 수 있고 실천되고 증명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성숙된 인간을 가늠하는 잣대도 목표를 향해서만 달려가는가?
아니면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대해선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평상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을 것이다.
평상심 속에서 생활할 수 있다면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日日是好日)’이 되지 않겠는가?
저 유명한 조사선의 씨앗인 남악회양 선사의 유골이 모셔진 묘탑앞에서 합장하고 서 있노라니 내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내면의 지켜봄이 간절해져서 절대의 세계속에 현실이 함께 녹아드는 듯 하였다.
▲ 머나먼 도정(道程)속에서…
회양 스님의 8년 참구나 이번 선원장스님들의 성지순례처럼 어차피 우리의 전 생애도 ‘진리 아닌 것에서 떠나 진리로 가는’ 순례의 여행길이다.
우리는 부자로 사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었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법은 갈수록 퇴색해갔다. 우리를 삶에서 지쳐 쓰러지게 하는 것은 비단 가난이나 병 따위만은 아니다.
더 근원적인 무엇, 무의미함, 삶의 전체를 지배하는 일상적이고 무의미한 행위들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고독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가 산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렇게 존재하고 살아가는 ‘나’란 도대체 누구인가? 무엇이 존재의 근원적인 진실이란 말인가?
자기 신뢰의 이유를 알아야만 모든 근본적 행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연기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적 신뢰의 바탕이 되는 이 ‘본래의 나’란 무엇인가? 선(禪)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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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왜 있는 것이며 그러한 종교행위로서의 수행법은 왜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행복과 열반을 위해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화두공안’또한 이러한 관문을 열기위한 창문이요, 열쇠다.
우리의 근본 마음 자리를 어떻게 머리로 풀 수 있겠는가?
누구든 일단 공안을 머리로 풀려고 덤비면 마치 끈끈이 종이에 달라붙은 파리처럼 헤어날 수 없게 되며, 그 본질을 잃게 된다.
위대한 선사는 언제나 공안을 갖고 우리를 궁지로 몰아 넣는다. 우리는 그 궁지와 순수한 화두의심 속에서 문득 내면의 눈을 뜰 수 있고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리석음과 미망이 꿈과 같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화두 의심은 재미 없어서 하기싫어 한다면 어찌 해야 할까?
물론 우두종에서처럼 공(空)을 관조하면서 하는 공부도 있고 조동종에서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묵묵히 비춰 보면서 하는 공부도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조계종의 ‘종지 종통’은 간화선에 있으며 간화선에서는 화두 의심이 생명이다.
순수한 의심은 의식을 맑게 하고 자기 존재 전체로 직접 체험하는 통찰력을 생기게 한다. 또한 선을 포함하는 대승불교의 전통에서는 인간 숙명에 대한 통찰이 주로 연민이나 자비로 표현된다. 순수한 직관(화두의심)에서 오는 통찰력을 개개인의 존재가 온 몸으로 체험하는 자체가 고통스런 현상계로부터의 도피를 즐기는 대신에 현상계 안에 머물면서 그것이 곧 열반임을 발견하는 행위이다.
또한 이러한 공부를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은 탄생과 죽음의 굴레에 갇혀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부처와 동일시하는 자비로운 사랑이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어차피 행복과 고통의 세세한 사건들이 정교한 무늬를 이루고 시련도 그 무늬를 더해주는 색깔일 것이다. 아무런 열정도, 마음의 갈등도 시련과 좌절도 없이 사는 인생이 어찌 바른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한데도 성실하게 의심을 지어 가기보다는 인스턴트 깨침을 굳이 원한다면 어찌 해야 할까?
억천만겁(億千萬劫)토록 생사고해(生死苦海)에 헤매이다가 난중우난(難中又難)인 인신(人身)과 불법(佛法)을 만났지 않았는가!
참구하여서 설사 깨치지 못하더라도 진실한 공부인은 길이 무상도의 종자가 되어 세세생생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역대 조사가 중맹세를 맺지 않으셨는가!
때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눈을 돌리면 곧 내생인데 스스로 퇴타를 달게 여겨 하열하고 우치한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 동녘 달이 또 돋는다.
- 무산오현 ‘일월'中에서
지금 설악산에는 낙엽이 떨어져 바닥과 길을 온통 단풍색으로 물들였다.
낙엽지는 길을 홀로 걸으면 그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옛 조사스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신 것 같다. 조용함을…, 먼 세계를…, 끝없이 흐르는 참된 영원(眞常)을…
신룡 스님은
1971년 수원 용주사에서 정대(正大)스님을 은사로 출가, 전강 스님에게 계를 받았다. 전강 스남과 송담 스님의 3년씩의 시봉을 거쳐 봉암사 해인사 송광사 남국선원 무문관 등 제방선원을 돌며 정진했다.
1999년 백담사에 입방한 후 2002년부터 백담사 무금선원장과 조계종 교육제도개선위원회 위원의 소임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