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어디서 생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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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항상 말씀드렸지만 지금 질문하신 부분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몸 안에 들은 그 업식이 현실에 여러분들의 사는 고통과 애고와 병고를 바로 스스로 자동적으로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는 세균성이나 또는 그 영계성 또는 유전성 이런 문제들이 다가오고 있죠. 그런데 그 문제를 가정에서 어떻게 해야만 카바를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만 이거를 간단하게 처리를 하고 갈 수 있는가,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일거양득 삼거양득이 됩니다.
첫째는, 공부 길이 아주 정법으로 정으로 들어가니까 옳고. 무슨 이 다리를 거치고 저 다리를 거치고 이거를 넘고 이런 게 아니라 직통으로 들어간다 이 소립니다.
두 번째는, 내 애고를 전체 애고를 카바허구 또는 어떠한 것이든지 불바퀴에 넣으면은 불에 타버리는 그와 마찬가집니다. 용광로에다 넣으면 그냥 모두가 녹아버리듯 말입니다.
또 세 번째는, 그렇게 되면 위로 묵은 빚도 갚을 수 있고 아래로는 햇빛도 줄 수 있고 또 두 부부도 편안하게 가정을 다복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이 부처님 법이란 우리 가정을 빼놓고 우리 삶음을 빼놓고 부처님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을 태어나고부터 부처님도 알았고, 상대성의 원리도 알았고, 사랑도 알았고, 천차만별로 이 벌어지는 생활이 어떻다는 것도 알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자체 내에서 모두 여러분이 태어나지 않으셨더라면 아무 것도 무횹니다. 없습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고도 있고 업보도 있고 유전성도 있고 영계성도 있고 세균성도 있고 모든 게 인과성 이 모두가 붙어 돌아갑니다. 이 이러니 이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 고가 어디서 오는가? 모두 죄가 있어서 오는 게 아닙니다. 몰라서 죄를 짓지 알면 죄를 짓지 않죠. 모르는 게 죕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가 자기를 긁어서 자기를 부스럼 내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다 그렇게 짓는 거지요.
그러니까 항상 말씀드렸지만 내가 살아서 그 도리를 모르면 내 업식에 눌려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고, 또는 빠져 죽을까봐 못 건너가고, 또 타 죽을까봐 못 넘어가고 이런다구요. 그래서 그 도리를 진짜로 그렇게 해서 실천을 하면서 부처님께서 가리켜 주실 때는 실천궁행하라는 그 요지를 내리신거지 내가 죽어서 천당에 너희들 죽어서 천당에 가니까 그렇게 믿어라 이런 건 아닙니다. 살아서 천당 맛을 보고, 살아서 지옥 맛을 보고 살아서 삶음의 보람을 알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만 사람답게 사는 건지도 알게 되고 이런 걸 가르치신 거지. 아니, 죽어서 승천하라고 천당에 가라고 가리키신 겁니까? 세세생생에 끝간 데 없이 영원 삶음에 이르기까지 길을 인도하신 거죠.
광력ㆍ전력ㆍ자력ㆍ통신력에 대해서
질문: 법문 중에 내 안에 광력ㆍ전력ㆍ자력ㆍ통신력이 충만하니 그것을 꺼내어서 쓰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과연 그러한 힘이 저에게도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 싶고 그것을 꺼내서 쓰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답변: 그래서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것은 하나에서 조그만 거서부터 천 가지 만 가지 다가오는 문제들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우리 지수화풍으로 뭉쳐진 거기 때문에 이 마음으로써 운전만 잘한다면, 하는 거예요. 응? 마음의 운전! 지수화풍으로 돼 있기 때문에, 이 지수화풍으로 돼 있기 때문에 거푸 내가 애기하지.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 통신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이거야, 이게 돼 있으니까. 이게 빈껍데기가 아니거든. 돼 있으니까 그렇게 쓸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오신통 안에서 벗어나서 그 오신통이다 하면 내 몸속에서 내 마음이 벗어나서 그것을 내 몸을 이끌고 다니고 마음대로 할 수가 있으니까 이 속에 들은 의식들도 다 그냥 내가 지배하는 대로 따라가니까요. 그러니까 부와 자가 상봉을 하지 못하고는 이 깊은 뜻은 모른다 이겁니다. 이 심오한 뜻이며 이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이겁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도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전화기도 무전전화기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또는 그냥 전화기라고 해도 되죠. 그러면 우리가 그것부터 안해 놨으면 내 집에 안 해놨으면 내 집이 전화 올 수도 없고 전화를 할 수도 없다 이 소립니다.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것이 바로 자성을 발견하는 데에, 견성하는 데에 역점이 있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가는 데에 역점이 있고 병고 애고를 무너뜨리는 데에, 녹이는 데에 역점이 있고 유전성을 녹이는 데 역점이 있고 또는 영계성 인과성 세균성 모두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붑니다.
그런데 이 공부라는 것이 불가에서 오신통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인간은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어요, 이게.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살죠, 우리가. 먹고 살면서도 감사한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합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그, 그것이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물이 없으면 전력이 없듯이 우리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 통신력이 인간에게 각자 그게 주어져 있다 이 소립니다, 이게.
그게 재료에요. 인간으로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고등동물로서 할 수 있는 재료. 그 재료가 있기 때문에 오신통이라는 것을 굴림을 굴리는 작업이 있습니다. 오신통이라는 그 자체는 바로 우리가 심안으로 보는 것을 말하고 무전 통신기처럼 이렇게 말하는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전체 소리 안 나는 것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천안통 천이통 이럽니다. 또 신족통,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이 대 자연의 법칙인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다가 참 지극하게 지극한 마음의 불을 켠다면 응신이 되셔서 응해주시죠. 그게 통신력이예요. 이 통신력이 충만하다면 자력도 또 충만합니다. 모두 여러분들이 발견을 못했기 때문에 못 쓰일 뿐이지 누구나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될 수 있는 자격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이 광력ㆍ전력ㆍ자력ㆍ통신력이 여러분들 앞에 다 주어져 있으니 주저 마시고 어떠헌 분야에든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든 실험을 통해보세요. 비리비리 그냥 남한테나 기대고 그냥 남을 의지할려고 그러고…. 좀 죽든지 살든지 좀 결단성이 있어야죠. 그래서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기시려구요. 이 세상 끝간 데 없이 그 고비를 넘길려면 얼마나 많은 그 시련과 삶음의 보람도 없이 또…. 그 고생 안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사는 게 고생이에요, 알고 보면. ‘그럼 살지 말라는 얘기죠?’ 이럴테죠? 살더라도 맛을 알고 사시라 이거죠. 이 세상은 일분 일초도 쉬지 않고 지금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반야심경 읽으실 때 어떻게 읽으시고 계세요? 그냥 고정됨이 없이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고정됨이 하나도 없이 그냥 돌아가느니라.
그 광력ㆍ전력ㆍ자력ㆍ통신력 그런 것이 다 여러분들한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진짜로 믿고 어- 실천을 하는 데 멋진 게 나올 수 있다구요. 그러고 그 멋진 것이라는 것은 묘법이란 뜻입니다. 묘법이 다른 게 아니에요. 불가사의한 법이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거예요. 뭐 불가사의하다 이러고 아주 그 위로 볼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니깐요. 안 해보셔서 들어보지도 못하고 먹어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모두들 그런거죠. 그러니 자신의 내면을 발현해서 내안에 내재된 무한광대한 마음의 힘을 꺼내 쓸 수 있는 그런 분들이 다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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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그것은 내가 해줄 바가 못되지요. 그러니까 자기 끌고 댕기는 자기 운전수한테 ‘차를 잘 끌고 댕기게 하고 위로는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름을 잘 넣어가지고 댕기라.’ 이렇게 허시란 얘깁니다. 예를 들어서 운전수가 차를 끌고 댕기지 차가 운전수 끌고 댕기는 것 보셨습니까? 그러니깐 모든 에- 차를 잘 부서뜨리지 않고 조심해서 끌고 다니는 것도 운전수요, 또 기름을 잘 떨어뜨리지 않고 넣어가지고 댕겨서 사고 안 나게 하는 것도 바로 운전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아주 악한 마음을 가지고 나한테 다가서더라도 ‘아, 저 사람하고 나하고도 둘이 아닌데 이 생명의 근본도 둘이 아니요, 마음을 내기 이전도 둘이 아니다. 그런데 뭐 그…, 당신만이 다 마음을 밝게 해서 그저 한마음이 되게 당신만이 헐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맡겨 보세요. 그러고 증오심을 버리시구요. 그런 것도 거기다 맡기시고 그냥 편안하게, 알지도 못하고 자기 사량으로 생각을 하고 자기를 망해줬다고 하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즉 말하자면 그냥 ‘나는 당신의 시자니까 무슨 사량으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남을 오해할 수도 있고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을 그렇게 잘못됐다고만 할 게 아니라 또 잘할 수도 있는 문제가 생기니까 하여튼 모든 것은 당신만이 의합하게 같이 불이 들어와서 같이 밝은 데서 살게끔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맡겼을 때에 그 사람 가슴에 불이 들어와서요, 댁의 마음과 아주 또 저거해서 난중엔 사과를 해요. 이렇게 더 친절해질 수가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좀 어리석은 게 있어요. 왜냐하면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직원들을 가지고 하거나 장사를 할 때 사람이 뭐 안온다 온다 뭐 이런 문제들, 뭐 잇속을 찾는다, 뭐 이(利)가 부진하다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아, 그러면 이런 걸 믿으면서 내가 어떻게 그렇게 이익을 취할 수 있을까 이러는데, 그 천만의 말씀이에요.
모든 거를 다 진짜로 믿는다면, 진짜로 믿는다면 고꾸라지든지 가든지 오든지 그런 걸 상관 안하고 거기다 턱 맡기고 그냥 진짜로 아무 그 괴로움이 없어요. 돈이 많이 벌려도 그 걸림이 없구요, 돈이 안 벌려도너만이 할 수 있다하고 거기다 놓기 때문에 괴로운 게 없어요. 그런데 믿지 못하는 까닭에 그렇지 않을까요?
모든 도리를 간단히 생각하세요. 돈을 수만 그 수만억을 번다하더라도 걸림이 없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것도 자기 혼자 갖는 게 아니잖아요. 혼자 번 것도 아니고, 혼자 가질 것도 아니고, 혼자 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거기 걸려요. 내가 이렇게 많이 버니까 내가 또 많이 번다고 하는 ‘내가’라는 생각이 나를 내세우는 게 있기 때문에 그게 걸리는 거지, 내 한마음이라는 주인공에서 본다면 아이, 그렇게 나가 많은데 일체가 다 나 아님이 없는데 구태여 왜 거기 걸립니까? 그러니까 선지식들은 개구리 하나를 죽여도 죽인 사이가 없고, 깨우치지 못한 자는 개구리 하나를 죽여도 살생이 된다 그랬어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증득해야 그게 알려져요. 그러니까 열심히 무조건 믿고 거기 맡겨 놓고 지켜보시고 그러세요. 그러고 거기에 걸림이 없어야 됩니다. 몇만 냥을 벌더라도 또 욕심을 내서 생각을 내서 저걸 벌어야 할텐데 이런 생각이 나도 당신 혼자 그런 생각이 난 게 아니에요. 수십억의 의식들이 한데 모아서 그렇게 생각을 한 거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돼요.
욕심의 한계와 그 구분방법
질문: 모든 분들이 그 선한 의지를 갖고 어떤 일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하는데 그 악한 의지를 갖지 않고 함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아니면 대개 또 잘 안풀리죠, 때때로. 그렇다면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데 애들이 좀더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그래도 남들처럼 집은 하나 있어야겠는데 그 욕심에 한계는 어디까지가 욕심에 한계며 그 구분이 확연하게 이건 욕심이다, 생활하는 데서 이건 욕심이 아니다 하는 것을 저로서는 구분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선한 의지로 어떤 일을 좀더 나아지려고 이렇게 추구하는 것도 욕심에 해당하는 건지, 아니면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건지 그게 의문이 되는군요.
답변: 어이구, 참! 애들하고 집이 없는데 어떻게 집 걱정을 안해요? 아이 나 참네! 세상을 그대로 살면서 자기는 관리인이라는 것만 아시라니까. 그 주인의 시자일 뿐이고. 누가 사랑을 하지 말래나, 돈을 갖지 말래나, 집을 갖지 말래나. 그 말만 하면 알아듣기지 않아요? 하하하…, 그러면서 그대로 사는 것이 원칙인데 거기에서 ‘악하게 살지 마라’이런 것은 악이 별다른 게 아니라 악한 것도 악한 것이지마는 자녀들 하고도 악하게 되는 수가 있어요. 에, 잘못하고 나가서 안들어오거나 이래두요, 공부를 잘못하거나…. 이거 한국에선 더 합니다. 공부 공부 공부, 부모가 그냥 공부 공부, 아주 상상에 빠진 거 같습니다. 그러니 자식들이 그 견디겠습니까. 그래서 공부 공부 허지 마라. 들어오면 공부에 진저리가 나서 들어오면 ‘어디서 배고프지 않게 뭘 먹었느냐. 피곤하지 않으냐? 뭘 좀 배고프면 먹고 좀 피곤한데 쉬어라.’ 이러고 이 마음 속에 맡겨 놓는, ‘쟤, 공부 좀 열심히 잘하게끔 마음잡아서 잘하게끔 당신밖에는 해결 못해’ 하고 거기다 맡겨 놓고 거죽으로 말은 부드럽게 해줘라 이런 소립니다. 그래서 이득이 있고 공덕이 있지, 그렇지 않고 그냥 일사천리로 이 말로다가 그냥 다르르르 해버리곤 그러면 냉냉하면 눈치 봤다가 그냥 또 달아나가요. 그러니 점점점점 속이 썩고 이러죠.
그리고 자식들한테 조건 없이 사랑하고 그래야 하는데 많은 분들이 조건이 있이 꼭 헙니다. 자식을 기를 때도 ‘너는 잘되라, 잘되는 게 내 소원이다’ 이렇게 조건을 붙입니다. 그런데 우린 안 그렇습니다. 조건을 붙여 놓으면 더 잘될래야 잘될 수도 있고 더 못될래야 못될 수도 없습니다. 거기서 한계에서 그냥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아예 한계를 지어놓지 마시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하시라 이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악허대는 것이 별난 악허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남한테 무조건 잘 이익하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은, 나한테, 이 공을 쳐보세요. 공을 딱 칠 때는 공이 나한테 돌아오지 절대로 그 벽에 딱 파묻히는 게 없습니다. 그것과 비슷한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너무 걸리지 마시고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이제는 내가 관리인만 되겠다. 그저 마음의 주인이 다 알아서 할거고, 집이 없는 생각을 하면 또 이 집 없다는 생각에서 이 업식들도 다 있고 내 주인공도 알고 있으니까 어느 때 생겨도 생기겠지’하고 거기다 맡겨 놓는 겁니다. 그러면 저절로 나와야지 그게 강제적으로 집이 어디서 나옵니까?
참다운 참선의 도리
질문: 몇 일전 10월 보름부터 스님들께서는 안거를 시작하셔서 용맹정진에 들어가신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렇지만 저희처럼 세속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은 스님들처럼 조용한 장소를 택해서 좌선의 시간을 가지고 마음 안으로 정진해 나가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생활 속에서 앉지 않더라도 참답게 참선을 해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까? 생활 속에서 스님들처럼 마음을 모아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일러주십시오.
답변: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불교라는 단어는 영원한 생명의 근본 자체가 불이요, 또는 일체 만물만생이 서로 통신하는 것이 바로 교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불교라는 단어는 어느 한 군데에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 아니 전 우주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일분 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각을 아주 적게 갖지 말고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어서 무한량이기도 하고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나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고 또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무횹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상대성의 원리도 있고 인연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발전도 하고 창조력도 기르고 창조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우주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에 가설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몸뗑이 속에 자기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습니까? 최초에 생명의 발전지가 어디였던가.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돼서 쫓고 쫓기면서 인간까지 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잘 아실겁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 속의 하나하나가 그렇게 진행해 왔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몸이 속에 수십억에 달하는 생명체들, 모습들, 의식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정신계와 물질계를 어- 같이 작용을 하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그 섭리를 익혀서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바로 자유스러운 것입니다.
모든 이 몸속에 들은 이 의식들이 모두가 내 한 몸, 내 한 의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몸속에 들은 의식들은 바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따라주는 의식들입니다. 아주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쁘게 따라주고 선하게 생각을 하면 선하게 따라주는 그러한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한마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일체 만법은 다 한 사람의 한마음에서 빚어지는 겁니다. 빚어지는 것을 우리가 그 과거에 살던 인연에 따라서 우리 이 몸뚱이 속에 있는 이 의식들과 즉 어머니 아버지 정자ㆍ난자와 또는 나의 영혼과, 또는 그 인연에 따라서 의식들과 전체 한데 합쳐지는 게 삼합이 한데 합쳐져야 인간이 하나가 생산이 됩니다. 생산이 됨으로써 그 인연들, 어떻게 과거에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인연들이 전부 거기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몸뚱이 속에 그렇게 서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상생활을 해 나가면서 내가 마음을 꿈을 꾸었다든가 어떠한 나쁜 일이 있다든가 또는 어떠한 상대방에서 나쁜 그 용도가 다가올 때 모든 것을 좋게 해석해서, 즉 말하자면은 ‘모든 것은 내 주인공이 하는 것이니까,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으니까’ 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 놓고 어- 나가는 것이 그것이 참도리요, 참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참선의 도리를 반드시 어떠한 것이 참선의 도리인지 그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 온갖 생활하는 거, 생활 빼고 참선이 어디 있으며 종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생활 속에 바로 하나하나 적은 거든지 큰 거든지 내가 해 나가는 그 자체가 바로 참선인 것입니다.
명상을 하든지 앉아서 좌선을 하든지 일을 하면서 생각을 하든지 누워서 생각을 하든지 변소에 가서 생각을 하든지 하여튼 모두가 생각하는 것은 바깥으로 끄달리지 말고 안으로만이 거기에 모든 것을 일임하는 것이 참선으로 돌아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니깐 여러분들이 정신 바짝 차려서 ‘아하! 참선이라는 것이 우리 생활 속에 있구나. 그렇게 어렵게 찾을 게 아니로구나. 그러고 먼 데 있는 게 아니로구나. 바로 각자 나한테 있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으셔야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