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를 목적으로 이 일을 했다면 지레 말라 죽었을 겁니다. 내가 즐거워서 한 일이었고,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누비는 것을 관광삼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결과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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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7월 <한국의 명승지와 문화유적> 12권으로 ‘서울편’을 펴낸 김인덕(74)씨. 이로써 전국의 명승지와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책 발간을 12권 전집, 4094페이지의 분량으로 마무리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원고를 정리한 12권의 전집에는 전국 163 시 군 구의 향토사가 집대성 돼 있다. 김씨의 전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12권의 책속에는 제주, 부산, 대구, 전북, 광주, 대전, 인천, 강원도, 서울 등 전국의 문화유적과 명승지 총 3088건과 그가 직접 찍은 사진 2500여 장이 수록돼 있다.
김씨의 문화유적 답사는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점을 찍을 수 없을 만큼 삶과 밀착돼 있다. 6년제 중학교 시절부터 쏠리기 시작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그 역사속의 사상과 정신, 예술혼이 살아 숨쉬는 문화유적에 가 닿았다. 6.25사변을 겪고 8년간의 군인 생활을 하면서 잠시 주춤하는가 했지만 5급 임용고시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문화유적에 대한 사랑은 점점 영글어갔다. 지방에 가면 군지, 읍지 등을 모으고 지방문화재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고 가는 곳마다 메모지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기록과 사진자료 남기기에 빈틈이 없었다. 집 곳곳에는 8백여권에 이르는 관련 서적이 빼곡하게 들어찼고 직접 찍은 사진 수만장이 쌓여갔다. 지칠줄 모르고 이어지던 그의 답사는 1984년 공직을 퇴직하면서부터 더욱 본격화됐다.
“처음엔 가족의 반대가 심했어요. 답사를 나갔다 하면 며칠 씩 집을 비우고 퇴직한 후에는 한푼도 벌지 않고 쓰기만 했으니 집안 살림이 엉망이 되었죠. 그래도 우리 전통의 혼과 정신의 우수함이 그대로 깃든 문화유적을 나만 알고 있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가득해서 멈출 수 없게 돼 버린 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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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그의 부인 최재선(70)씨가 코펠과 음식거리를 들고 답사길에 따라나서기에 이르렀다. 말려도 소용이 없으니 먹는 거라도 챙기기 위해서였다. 11권에 수록된 강원도 답사때에는 한번 집을 나서면 일주일은 예사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12시간이 넘는 시간을 직접 운전을 해가며 답사지를 찾아 달리고 또 달렸다. 절을 만나면 절에서 머물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여관에서 묵었다. 미리 지도를 작성해가긴 하지만 길을 헤맨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전국을 누비는 동안 자동차는 4대나 폐차됐다.
“답사때마다 우리 국토 구석 구석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이나 부도에 새겨진 구름이나 용 조각, 연꽃의 지극한 아름다움앞에 서면 넋을 잃게 됩니다. 그 내밀한 즐거움이 나를 자꾸 부릅니다. 한참동안 시공을 잊어버리고 앞서간 조상들의 마음과 만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국토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산의 귀중함에 눈을 뜰수록 안타까움도 컸다. 일제시대 도굴로 일본으로 반출돼 영영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버린 문화재는 곧 우리의 잃어버린 정신이라는 자각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곁 가까운 곳에 있지만 일반의 무관심속에 방치된 채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문화유적도 그의 책 출간을 재촉하는 요인이 됐다.
‘우리 전통의 참다운 가치와 아름다움을 나만 알아서는 안되겠다’는 마음 하나로 책 쓰기에 매달렸다. 새벽 3,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원고를 작성했다. 정신이 가장 맑게 깨어있는 시간 원고를 쓰노라면, 그동안 다녀왔던 답사지가 눈앞에 있는 듯 펼쳐졌다고 한다. 옆에 있던 부인이 말을 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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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밤이고 낮이고 머리맡에 상을 펴놓고 앉아 있더니 허리가 탈이 나서 대수술을 받았어요. 일년이 넘게 거동도 못하고 누워지내다 조금씩 나아지니까 곧바로 답사를 시작해 올 5월까지 또 답사를 해서 마지막 서울편 책을 냈지요. 저 연세에 일주일에 몇 번 서울을 오가는 걸 보면 걱정스러울때도 많았어요.”
1994년 시작해, 꼬박 4년만에 1,2권 부산 경남편이 탄생했다. 한권을 내는데 필요한 최소경비만도 1천만원이 넘었지만 책이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역시 돈버는 일은 아니였다. 전국의 대학, 역사 연구소, 사찰 등에 책을 무료로 보시하기 시작했다.
‘굴절된 가치관을 바로 세우는 근본을 우리의 전통문화의 뿌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믿음때문이었다. 매권마다 500~1100권을 펴낸 후, 지금까지 꾸준히 보시를 해오고 있으며 소량이지만 서점을 통한 시판도 하고 있다.
12권 전집 발간을 마무리했지만 여전히 그의 하루는 한가롭지 못하다. 여기 저기서 책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잇다르고 대학 교수들이 자문을 구하는 전화를 걸어오기 때문이다. 답사전에 작성된 자료를 토대로 답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첨삭을 반복한끝에 완성된 자료이기에 정확성이나 자료로서의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책이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전집을 구할 수 없느냐는 문의 전화가 옵니다만, 책이 없어요. 최근에 펴낸 11권, 12권뿐입니다. 혼자힘으로는 전집을 재판할 능력이 없어요. 규모있는 출판사가 맡아 책을 내준다면 우리 전통의 가치와 우수성이 두고 두고 전해질텐데...”
‘한사람이라도 더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게 되길’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우체국을 향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전국으로 보내질 책을 들고 우체국을 드나든 김씨는 우체국을 가장 많이 이용한 고객으로 뽑혀 선물을 받았을 정도다.
남한의 문화유적을 총집대성한 12권을 앞에 놓고, 김인덕씨의 마음은 이제 또 다시 북한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벌써 북한 자료 모으기를 시작했다. 앞으로 북한 관광이 개방되는 대로 하나 둘 자료를 모아 북한의 유적이나 명승지도 8권 정도로 펴내 20권으로 우리나라 문화유적 자료집을 총 정리해보겠다는 원을 세워놓았다.
단 한번도 그만둘 생각을 내지 않고 문화유적을 찾아 전국을 누비며 길위의 인생을 살아온 김인덕씨. 보여지는 것들을 좇아 전국을 떠돌았지만 김씨가 가 닿은 곳은 결국 ‘마음’의 세계였다. 전국에 흩어진 문화유적은 앞서 살다간 사람들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활짝 열려진 통로라는 것이다. 그는 문화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가 진정 하고픈 말은 그 문화재속에 담긴 조상들의 ‘마음’이다. “조상들의 지혜와 예술혼이 여기 있소. 그 마음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갈피를 넘길때마다 쟁쟁 귓전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