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세상을 말하고 세상으로 불교를 말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한 ‘불교와 사회 포럼’(공동대표 이평래·김광삼·김규칠·김용표·성태용)의 첫 공식행사인 창립세미나가 11월 23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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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세미나에는 교수, 정치인을 비롯해 자영업자, 학생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불자 300여명이 참석해 불교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말하는 자유로운 토론공간에 대한 불자들의 열망이 컸음을 보여줬다.
첫 세미나 성격에 맞춰 포괄적인 주제를 다뤄 구체성은 다소 떨어졌지만, 상당수의 참석자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활발한 토론 참여를 통해 그간의 갈증을 풀었다. 특히 향후 포럼의 발전방향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며 주인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세미나는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사회로, 발표 및 논평, 그리고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됐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 박세일 서울대 교수, 노부호 서강대 교수가 발표를 맡았고, 김종욱 동국대 교수, 이각범 한국정보통신대 교수, 손기원 지혜경영연구소장이 각각 논평했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조성택 교수는 불교사의 전개를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설명하며 현대사회에도 그 환경 변화에 어울리는 새로운 패러다임, 즉 새로운 불교의 등장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두 번째 발제자인 박세일 교수는 현 정권의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과거 청산과 관련된 포퓰리즘적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바람직한 정치를 위해서는 불교적 관점에서의 ‘마음의 개조’와 ‘세계의 개조’가 조화를 이뤄야 함을 역설했다.
또 노부호 교수는 “불교경영이란 모든 이들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자아실현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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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종합토론에서 참석자들은 포럼의 발전 방향에 대해 △현장 중심의 논의가 돼야 한다 △주제선정위원회를 구성해서 주제를 충분히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견해를 불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선 안 된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찬반논쟁보다는 불교가 중심이 돼야 한다 △기독교를 의식하기보다는 미래학적 관점에서 포럼을 이끌어야 한다 는 등의 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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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각 주제별 발표와 논평·토론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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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교수 ‘불교와 현대사회’
불교는 초기불교로 시작해서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선불교 등으로 발전해왔다. 이처럼 다양한 불교전통들은 붓다의 가르침이 각기 다른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구현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불교는 지방문화에 대한 특유의 적응성과 유연성으로 토착화에 성공해왔다.
이 같은 적응성이 20세기에 이르러 다시 발휘되고 있으니, 기독교문화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서구에서 점증되고 있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1997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불교인구는 대략 700만에 이르고, 2003년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불교인구가 가톨릭 인구를 넘어섰다고 한다. 서구인에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구에서 불교는 △지식인과 예술인 등에게 빠르게 확산되는 엘리트불교 성격△사회운동 차원의 실천 불교적 성격 △개인주의적 성격 △재가 중심적 성격을 띠고 있다.
성급한 감은 있지만 서구의 이러한 특징들은 전통적인 잣대로 판단될 수 없는 새로운 불교의 출현으로 보는 시각도 가능하다.
서구에서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불교’는 한국불교에 요구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삶의 분절화·전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축소되고 있다. 즉 신행활동은 삶의 전체가 아닌 삶의 일부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현대사회의 다원성은 다양한 종교의 공존을 요구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불교는 삶의 보편적 원리가 아닌 보편을 지향하는 하나의 특수라는 현실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불자들이 느끼는 고민 가운데 하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불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나날이 경험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불교적 해답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야기되는 것은 불교가 현대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시론적인 답을 제시한다면, 불교적인 삶이라 하면 불교적 특징을 유지하는 한편,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맞닿는 것이라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최소한의 공동가치인 신체의 자유 등의 기본적 인권과 최소한의 생계보장을 위한 경제권, 균등한 교육의 기회 등이 전제된 가운데, 보다 근본적으로 불교는 인류의 공동선을 넘어 근원적인 행복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불교적 삶의 원칙으로는 △수행의 일상화 △무아와 연기법에 의한 세계 이해 △‘적은 것이 더 많다’는 최소주의적 태도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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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욱 교수(동국대) 논평
불교사를 패러다임 전환의 역사로 이해하는 데 동의한다. 이를 한국 불교사에 적용해본다면, 신라와 고려의 불교가 사회를 주도한 적극적 패러다임이었다면 조선의 불교는 명맥 유지에 급급했던 소극적 패러다임이다. 현대의 불교는 새로운 의미의 적극적 패러다임의 불교가 돼야 한다.
적극적 패러다임의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대내적으로 국가에 대한 합리적 비판세력이 됨과 동시에 사회적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지식사회에서의 주도권을 회복하며 대외적으로는 국제포교를 지향해야한다.
국제포교의 와중에서 우리는 서구불교의 특징인 생활불교와 문화불교를 이 땅에서 재구성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를 통해 불교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문명화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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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토론
Q. 성태용 건국대 교수
서구불교가 좋은 면도 있지만 위험한 면도 적지 않다. 가령 공동체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개인주의적인 불교의 한계가 있지 않나.
A. 조성택 교수
그렇다. 하지만 한계가 아니라 서구불교의 특징이라고 본다. 서구불교는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15년간 미국에 있다가 2002년 귀국했을 때 정토회 등의 활동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미래 한국불교의 모델이 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해봤다.
Q. 김성부 안국선원 홍법운영팀장
불교가 지식인 사회에서 먹혀들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A. 조성택 교수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불교의 역사는 100여년 남짓하다. 조선시대 500년간의 단절은 엄청난 것이다. 지식인 포교가 미진한 원인은 이 같은 일천한 역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 사회적으로 불교지분이 적은 까닭을 독립운동, 민주화, 근대화 과정에서 불교계의 역할이 적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지분 확대를 위해서는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오늘날 불교가 이만큼이라도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간 쌓아온 문화의 두께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A. 김종욱 교수
조선불교사를 단절로 보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세계사에 특정정권이 500년 지속된 예가 없고 그처럼 오랜 기간 일관되게 특정 종교만 탄압한 예 또한 없다. 불교는 방어에만도 엄청난 공력을 들인 셈이다. 우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기죽어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슈 선점이다. 어느 사회나 문제는 있기 마련인데, 불자지식인들이 이를 미리 짚어내고 주도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민주화과정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불교에는 그런 후원자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환경운동은 불교계가 주도하는 양상이다. 또 불자 수도 증가하고 있다. 지속적인 이슈 개발과 선점에 불교와 사회 포럼이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A.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사회자)
이슈 선점도 중요하지만 사회에 희망을 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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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일 교수 ‘불교와 정치’
오늘날 정치에는 두 가지 병이 있다. 하나는 한국의 정치가 ‘국민 분열과 갈등’에만 치중하지 ‘국민통합과 화합’의 노력은 크게 미흡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가 과거와의 전쟁에 매몰된 채 미래의 건설에 대한 관심은 적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갈등과 대립은 있다. 문제는 그 나라의 정치가 이런 갈등을 치유하고 분열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 정치는 통합보다 대립과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국민분열을 이용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런 경향을 포퓰리즘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국토의 균형발전은 중요한 국정과제로, 여러 정책을 복합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현 정권은 균형발전이라는 국정과제를 지극히 단순화시켜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수도를 이전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토의 균형발전이 안 되는 것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서울사람들 때문이라는 논리 속에서 찬성은 선이고 반대는 악으로 이원화되고 분열된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공격적 포퓰리즘이다.
이 같은 상황을 부처님이 본다면 무엇이라 할까. 화합과 통합을 중시하는 부처님은 아마도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너무 절대화하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진보도 보수도 다 상대적인 가치이므로 절대화하지 말고 아상을 버리고 남으로부터 배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그을 것이다. 포퓰리즘은 무명의 정치, 탐진치의 정치, 즉 어둠과 미움, 시기의 정치이므로 빨리 버리라고 할 것이다.
‘과거와의 전쟁’은 우리 정치가 직면한 또 하나의 병이다. 과거와의 전쟁은 과거 역사가 모두 잘못됐으니 심판하고 청산하겠다는 자학적 역사청산론이다. 여기에는 역사를 흑과 백으로 나누려는 이분법적 사고가 담겨 있다. 친일과 반일을 어떻게 구별하며, 그 사이에 있는 거대한 회색지대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이 을사오적 때문인가. 그들만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일제에 나라를 잃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역사의 정리는 역사학자들이 할 문제다. 정치적 목적이 개재된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청산이 악순환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모습을 부처님이 본다면 무어라 할까. “중생들아 너희들 중 아무도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로운 자는 없다. 모두가 역사의 업을 공유하고 있다. 을사조약을 보고 의분으로 할복한 의인들조차도 역사의 공업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진정한 참회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데 있다. 즉 진정한 참회는 미래를 향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욱일승천하는 중국경제에 기대 살아가는 변방경제로 추락하지 않도록 하고, 유사민주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민중민주주의의 유혹을 벗어나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로 가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불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마음 개조부터 시작하는 것과 세계를 먼저 개조하는 것,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시대 불자의 가장 큰 병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방일함에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아마도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열심히 하라고 말할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아마도 마음개조 하면서 그 원력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세계를 개조하면서 마음을 개조하라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부처님이 지향하는 본마음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원리적으로 불교와 정치를 구별할 수 없다. 세법(世法)과 불법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를 내세워 정치를 멀리하거나 정치를 내세워 불교를 멀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음개조와 세계개조는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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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범 교수(한국정보통신대학교) 논평
박 교수의 고민에 동의한다. 정치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미래지향적 정치를 못한 채 식민지가 된 뼈저린 경험이 있다. 과거청산의 내용은 우리 민족이 미래를 향해 웅비할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드는 그 구조를 시정하는 것이 돼야 한다. 과거사에 대한 접근은 동기와 방식에서 바르지 않다.
마음을 개조하는 원력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세계를 개조하는 원력으로 마음을 개조해야한다는 시각은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 세계에 낙토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원이 돼야 한다.
◇종합토론
Q. 성태용 교수
박 교수의 발표는 또 하나의 포퓰리즘 아닌가.
A. 박세일 교수
예리한 지적이다. 지난 8월 브라질을 방문한 적 있는데, 그곳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브라질의 경제가 나락에 빠진 계기는 브라질리아로의 수도 이전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경제부담이 커지고, 정책에 비효율이 발생했으며, 행정도 어려움에 빠졌다 한다. 아직도 장관들이 브라질리아로 비행기를 타고 출퇴근한다고 했다.
나의 주장이 포퓰리즘이 아닌 까닭은 국민감성을 이용하기 위한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주장은 지금까지 학자로서 공부해온 바에 토대한 것으로 국익을 염두에 둔 것이다. 행정수도 이전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서울의 대학이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학은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지만, 행정기관은 둘로 나뉘어선 안 된다는 것이 내 학문적 소신이다.
Q.. 김용수씨(개인사업)
전범에도 A급 B급이 있듯 을사오적은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책임은 더욱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업만 말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결과만 낳는다.
A. 박세일 교수
을사오적을 문제 삼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국가운영에 문제 있었고, 공업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앞으로 그런 역사의 비극을 반복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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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호 교수 ‘불교와 경영’
불교사상은 기업경영에 적용돼야 한다. 기업은 불교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실천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경영의 단계는 [1단계]이익을 중시하는 경영 [2단계]사람을 중시하는 경영 [3단계]가치를 중시하는 경영으로 나눠볼 수 있다. 1단계가 행동지침을 주고 통제하는 권위주의적 경영이라면 2단계는 목표를 주고 책임지게 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3단계에서는 조직의 가치 및 비전에 공감대를 형성해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경영이 이뤄진다.
불교적 깨달음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불성을 발견하고 가치관을 개발함으로써 자기를 찾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기존의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찾아가는 의미로, 경영의 3단계인 비전경영과 통한다. 즉 가치관의 개발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비전 경영은 불교의 사상을 실천하는 경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말하는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을 경영학적으로 해석하면 “사람은 모두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일을 통해 잠재력을 개발하고, 다른 모든 사람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같은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불교적 경영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목적은 종업원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 있지 않았다. 앞으로 기업경영은 종업원의 잠재력을 개발에 역점을 둬야 한다.
불교경영은 구체적으로 △자율과 평가를 통해 기업가 정신을 계발하고 성과 지향적 문화를 조성하고 △가치관을 심어줌으로써 사람들을 순수하게 함으로써 조직 내에 일과 관계의 문화를 조성하고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일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조직구조를 팀조직으로 하여 자율과 평가를 용이하게 하고 일을 의미있게 만들어나가고 △자율과 개방의 문화를 조성해 기업가 정신이 발휘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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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원 지혜경영연구소장
오늘날 분식회계·노사불화·기업수명 단축 등 경영은 위기를 겪고 있다. 이제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이 적극 모색돼야 하는 시점이다. 그 대안은 불교와 동양사상 등의 전통적 가치관을 현대적으로 접목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불교경영을 모든 사람들이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바라본 발표자의 시각에 동의한다.
기업경영에 있어서도 컨셉이나 슬로건인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혜경영은 지식경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불교와 경영이라는 주제로 다룰 수 있는 영역은 크게 △기업경영에 불교사상을 접목하는 문제 △불교조직에 경영의 개념을 도입하는 문제 △불교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 △산업이 불교에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종합토론
Q. 성태용 교수
경영이론 가운데 좋은 것은 다 불교적인 것으로 갖다 붙인 것 같다.
A. 노부호 교수
깨달음에 대한 엄밀한 정의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인정한다. 기업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잠재력 개발이다. 이를 깨달음과 연결한 것은 하나의 제안으로 이해해 달라.
Q. 황경환씨(울산)
2500년전과 지금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탐욕에 가득차 있다. 부처님이 경영한다면 아마도 기업은 이익의 창출보다 사람의 고통을 찾아 나서라고 가르쳤을 것 같다. 서민, 국민의 고통이 있는 곳에 너희들이 모르는 엄청난 이익이 있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명하다. 종교란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 목표지점을 가는데 있어서 윤리적 성숙이 선행돼야 한다. 윤리적인 성숙이란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노력하며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A. 노부호 교수
‘고통’이라는 것이 ‘고객’과 통한다고 본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이 고통의 소멸이고, 그것이 곧 경영학이 추구하는 바다.
Q. 김성부 안국선원 홍법운영팀장
기독교실업인회는 있으나 불교실업인회는 없다.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A. 노부호 교수
불교실업인회를 만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실업인회가 결성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리더십을 가진 불자 기업인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