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인생은 해질녘 붉게 물든 마지막 노을빛이 되어 산 능선 소나무 한 그루 사이로 소리 없이 꺼져가는 해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 어둠을 향해 사라졌지만 다시 떠오를 내일을 위해 어둠에 대한 깊은 사유와 함께 인욕하고 있으리라.
정녕 생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그 끝은 언제일까? 전도된 몽상으로 골몰하던 내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아마 천년을 넘게 꿈틀거려온 것 같다. 나는 부처님과 함께라고 위로해 보지만 늘 그렇듯 내 자신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내 자신이 너무나 대견하다. 무상(無常)의 체험이 수행이고 수행의 방편이 무상이라면 무상을 체득하는 이 과정은 틀림없이 인욕으로써 극복하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행복과 불행이 동반되어 있으나 선택할 권한은 없다. 다만 되고 싶은 방향으로 뜻을 세워 노력한다면, 행복은 노력한 사람들의 몫이 될 뿐이다.
나는 흑백논리의 날카로운 성격을 지녔었다. 심지어 친정아버지는 나를 ‘독일 여군’에 비교하실 정도였다. 그래도 결혼 후 두 아이를 키울 때는 너무나 유난해 친구들이 ‘현대판 신사임당’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나는 내 성격이 얼마나 날카롭고 예민한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했고, 그로 인해 몸이 많이 아팠다. 정신적인 피로에 못 이겨 삼일씩, 열흘씩 누워 있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도 몸을 이기려고 커피는 하루에 몇 잔을 마셨다. 그러니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몸은 말라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 아주머니가 자신이 다니는 절에 창건주 보살이라며 노 보살님 한 분을 우리 집에 모시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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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의문투성이었지만 스님도 노 보살님도 강원도의 사찰에 계시므로 궁금한 점을 그때그때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 자신도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듣고 흘려버렸다.
그렇게 일년 정도 지나서 노 보살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에 속으로 뜨끔하기도 하고 부담스러워서 두 아이를 데리고 동생네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 보살님은 오신다던 날에 안 오시고 다음날 오셨다. 나는 꼼짝없이 노 보살님을 만나야 되는 상황에 처해 버린 것이다. 어차피 만날 인연이면 먼 곳에서 오시는데 점심이나 정성껏 지어드려야지 하고 서둘렀다. 잠시 후 보살님은 도착해 점심을 드신 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세월만 죽이고 있다”고 화를 많이 내셨다. 그리고 “스님 말씀대로 진흙 속의 진주를 빨리 찾아 한 번 잘 살아봐야지” 하시며 내가 그다지 오래 살 것 같지 않다 하셨다.
나는 그냥 울음만 났다. 불교가 뭔지 부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나에게 내 목숨까지 거론하며 절에 가길 권하는 노 보살님이 싫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잠시뿐, 보살님은 나를 바라보시고 손을 꼭 잡아주시면서 “그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겁먹지 말고 꼭 해라”하셨다. 그때 나를 바라보는 보살님의 눈빛은 너무나 자상하시고 그 손은 너무 따뜻했다.
이렇게 나를 불교와 인연을 맞게 해 준 보살님은 정작 내가 제대로 공부하는 것도 못 보고 돌아가셨다. 보살님이 돌아가시자 생각이 달라졌다. 스님마저 돌아가시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 보살님은 돌아가시기 전 백양사 강주 스님을 소개해주셨다. 그 먼 길을 한번씩 찾아갔는데 너무 말씀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말씀 중에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아 죄송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몸과 정신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또 백양사는 집과 너무 멀어서 안되겠다 생각하고 스스로 찾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집 근처의 절에서 어떤 때는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바느질 시봉도 하고 풀빨래를 맡아서도 해보고 약도 지어드리면서 능력껏 형편껏 불교를 배우고자 했다. 또한 혼자 법문이나 책을 보고 듣고 읽으며 요점을 정리하고 배운 것을 생활에 적용하며 배움을 익혀가는 과정이 오년 가량 지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생활이 부처님 이야기로 시작해서 부처님 이야기로 끝맺게 되었고, 정보도 어디서 어떤 스님이 어떤 법회를 하고 언제 어느 절에서 무슨 행사를 하는지 알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교리도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비록 경전을 볼 수는 없지만 교재용 단행본으로 나온 <초발심자경문>과 <취문> <서장> 등의 강의본을 읽었다. 경전 강의를 읽다보니 차츰 법의 성품이 둘이 아니며 하나 속에 모두이며 모두 속에 하나임을 이해하며 승복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수월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간이 되기까지 수없는 고통과 실망을 겪기도 했고 예민한 성격 탓에 슬픔도 컸다. 그러나 정말 부처님은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대로 영리하면 영리한 대로 응화현하시어 우리 곁에 오시는 분이셨다. 내게 크나큰 가피를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딸아이는 94년도에 대학 진학시험을 치렀다. 나는 대구 교대를 원했으나 수능 성적이 부족하다며 경북대학교 중문과를 지망했다가 떨어졌다. 믿지 못할 결과였다. 우리 집은 초상집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대이변이 생겼다. 대구교대 사상 최초로 성적미달 합격자를 탈락시키고 111명 추가모집을 하게 된 것이다. 전기합격자가 발표가 난 다음 날이라 추가 모집에 삼천 명이 넘게 몰려들었다. 그때 내 딸은 마감시간 15분전까지 고등학교에 있었고 나는 영대 약학과에 5명 추가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원서를 가지고 집으로 오는데 집 앞에 다 왔을 무렵 갑자기 많은 비가 내렸다. 할 수 없이 딸에게 가보기 위해 차를 돌렸다. 일단 고등학교에서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알아보자며 고등학교로 갔다. 마감시간이 15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우리 딸이 정문에서 나오며 고개를 떨군채 울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딸은 나를 보는 순간 안기면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