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법을 볼 뿐 사람은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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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 혜능스님이 방아를 찧으며 처절한 수행을 하던 곳, 오조사.
법에 의지할뿐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부처님 사상이 그대로 실현되었던 5조 홍인 스님 행화도량이다.
혜능은 변방에서 온 아직 계도 받지 않은 행자이며 신수는 황제의 부름을 받을 정도로 학식과 인품이 훌륭하고 인물마저 훤칠해서 수많은 대중들이 떠받드는 상수제자다.
더구나 혜능은 20대의 청년이고 신수는 50대의 비구다. 만일 당신이 천여명 대중을 거느린 방장스님이라면 과연 전자를 후계자로 선택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첨단과 파격이 당연시되는 현대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1천 4백여년전에 홍인(弘忍, 601~ 674) 조사는 그러한 선택을 했다. 1천여명 넘는 제자중 1좌를 차지하고 있던 신수(神秀, 606~ 706) 스님을 제치고 갓 입문한 행자 혜능에게 법을 전해주었다.
그 선택은 인류에게 크나큰 공헌을 하게 됐다.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은 5조다운 결정이다. 오직 법을 볼 뿐 사람은 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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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사같은 친근감이...
9월19일 선원장스님들과 함께 호북성 황매현 동산(東山), 그 유명한 오조사 앞에 서자 가슴이 꽉 메어왔다.
법(法)을 바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불성(佛性)을 깨달은 혜안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한 선택을 하셨던 5조스님에 대한 고마움이 걷잡을 수 없이 물결쳐서다.
그로인해 선의 물줄기는 유유히 이어져 기라성같은 선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선의 꽃이 활짝 피었다.
오조사는 들어가는 첫 분위기부터가 매우 친근감이 들었다. 중국절들은 대부분이 평야지대에 있다. 그렇다보니 높고 낮음이 없이 뒤의 건물이 앞건물에 막히고 또 그뒤 건물이 앞 건물에 막히고 해서 우리나라 절만큼의 운치는 없다.
그러나 오조사는, 우리나라 산사처럼 산에 위치해 있고 우리나라 절과 마찬가지로 잿빛 기와(중국절은 대부분 붉은색 기와를 씀)여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일주문을 지나 차로 한 5분쯤 들어가니 ‘五祖寺'라는 편액이 나타났다. 5조가 최초로 백련봉 정상에 건립한 절의 이름은 선정사(禪定寺)였다고 한다.
당 대중2년(848) 황제의 칙명으로 절을 현재의 오조사로 옮겨 크게 확장하고 대중동산사(大中東山寺)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영종, 휘종 황제가 각각 천하조정(天下祖庭)' '천하선림(天下禪林)' 이라는 편액을 내려주었다. 돌에 새겨진 이 편액은 지금도 대웅전 뒤편에 자리하며 총림으로서의 오조사의 권위와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원 문종 지순2년(1331년) 절 이름이 또다시 ‘동산오조사(東山五祖寺)’로 바뀐 후 현재까지 계속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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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에 포대화상 모셔
중국절은 대부분 제일 먼저 나타나는게 사천왕문이다. 사천왕은 양쪽에 모셨고 가운데에 포대화상을 모셔놓았다. 포대화상 바로 뒤 그러니까 벽하나를 사이에 두고 포대화상은 들어가는 정면을 보고있고, 등을 마주하여 관세음보살상은 뒷면 법당을 향하여 모셔져 있다. 중국 사찰 특성중 하나이다.
중국절의 대웅전은 세밀하지는 못해도 크기는 매우 크다. 큰 곳은 법당 한 채가 700~ 800평이나 된다. 오조사 역시 우리나라 본사만한 규모다.
법당 왼쪽에 성모전이 있고 오른쪽에 선당(禪堂)이 있다.
법당 뒤로 법우탑 5조 홍인조사 진신전이 있고 그 오른쪽에 6조전이 있다.
6조 혜능이 찧던 방아도 이곳 6조전에 상징적으로 어설프게 옮겨져 있다. 그 옆으로 5조스님이 좌선했다는 수법동굴이 있고 진신전을 지나 한참 올라가면 5조스님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선방 중앙에 조사상을 모셔놓고 사방벽을 따라 선상(禪床)을 일렬로 배열하여 그 선상위에서 참선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선상 뒤로 누울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취침할 수 있게 해놓았지만 실용적이지 못해 보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온돌은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앞선 문화다. 다만 오조사는 5조스님이 ‘선농일치’ 사상이라서 승당을 선당으로 겸해 쓴다고 했다.
진신전에는 5조 진신상(眞身像)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본래의 5조 육신불은 많이 훼손되었다. 5조 육신불에 소원을 빌면 잘 이루어진다는 소문 때문에 공산치하라서 사람들이 마을로 내려 모셨다는 것이다.
1927년 병화로 일부 훼손되고 문화혁명때 상당부분 더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손상된 상을 덧씌워서 다시 복원했기에 실제감은 적었다.
겉모습은 약간 다르긴 해도 그 가르침과 사상은 여여하기에 한국의 선원장스님들은 가사를 수하고 죽비에 맞춰 여법히 예를 올리고 정성들여 축원을 했다.
“과거 전생으로 오늘에 이르도록 본래면목 이 마음 하나 깨닫지 못한 까닭으로 잠깐 빌려쓰는 이 몸을 나라고 잘못 생각해 왔습니다. 번뇌망상 욕망을 따라 다니느라고 나고죽고, 죽고나는 생사윤회를 해 왔습니다.
이제 진신전에 엎드려 참배하오며 발원하옵니다. 세세생생 날말적마다 발심출가해 필경 성불하고 조계선맥을 중흥하여 광도중생하여지이다."
축원을 끝내고 5조스님 등상불을 우러르니 그 옛날 5조가 일곱 살 어린나이로 4조 도신스님께 들어온 후 오직 정법과 정견에 의해 살아온 고고한 삶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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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정법과 정견에 의해 살아온 고고한 삶
73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일생동안 본래성불이라는 가르침 하나로 일관된 이러한 사상은 금생 일만은 아니었다. 전생부터 세워온 원력수생의 결과다.
4조 도신 선사가 쌍봉산에 주석해 법을 펴고 있을때다. 산위에서 소나무를 가꾸는 70넘은 노인이 있었다. 노인이 어느날 도신 스님을 찾아가 불법을 묻고난 후 출가를 원했다.
그러나 4조가 “파거불행이요 노인불수라. 다 늙은 노인이 이제 불법을 깨친다 해도 법을 크게 펴지 못할 것이니 다시 태어나 동진출가를 해온다면 그때 내가 불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노인은 곧바로 산을 내려와 길을 가다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있는 주씨 성을 가진 처녀를 만나게 된다. 노인은 그 처녀보고 미안하지만 너의 집에서 좀 쉬고 갈수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
주씨 처녀는 집안에 어른들이 계시니 가서 물어보라는 당연한 대답을 했다. 노인이 원하는 바는 그게 아니었다. 주씨 처녀의 태속에서 열달동안 지나고 다시 아기로 태어날 생각인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간절히 부탁하기를, 부모님 생각은 말고 처녀 생각만 말해달라고 거듭 부탁하는 바람에 주씨 처녀는 부모님만 괜찮다면 쉬고 가셔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원력수생한 아이가 5조 홍인 선사다. 물론 민간신앙이거나 신화일수도 있다.
다만 늙어서는 도 닦기 어렵다는 경책이기도 하고 원을 세우면 원력무적(願力無敵)이라는 가르침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조사에는 5조스님 어머니를 기리는 성모전(聖母殿)이 있다. 5조의 생모상이 모셔져 있다. 길쌈을 하며 홍인 스님을 훌륭한 조사(祖師)로 키워낸 그 공덕을 기리는 후세인들의 존경심을 보여주듯 성모전을 찾는 발길이 끊임이 없었다.
법당을 지나 6조전으로 가는 회랑이 거의 복원이 끝나가고 있었다. 옛날에 변상도를 그려 넣으려고 했던 그 복도다.
역사적인 사건, 즉 5조스님께서 천명 넘는 모든 대중들에게 깨달은바 각자 자기 소리를 써내라는 말씀에 제1좌인 신수대사가
身是菩提樹요
心如明鏡臺니
時時勤拂拭하여
勿使惹塵埃케하라
는 게송을 써 붙였던 회랑이며,
6조 혜능의
菩提는本無樹요
明鏡은亦非臺니
本來無一物이라
何處惹塵埃이리요.
라는 게송이 붙여졌던 그 회랑이다.
그 복도 앞에 서서 간절히 발원했다. 회랑이 복원되듯이 그 사상 그 가르침 그 깨달음의 소리도 복원되어 지이다 라고.
게송을 보고 5조스님은 혜능에게 법을 전하는 증표로 달마조사로부터 전해내려온 가사와 발우를 준다. 의발이 행자에게 전해진 걸 알게되면 대중이 혜능을 해치려 들 것을 걱정하고 곧바로 혜능을 데리고 황매로 나온다.
현 호북성 구강역까지 배웅해 주며 남쪽으로 가 숨어있으라고 이른다. 장강까지 절에서 한 30킬로미터정도 됐다.
지름길로 가더라도 20~ 25킬로미터는 될 것으로 보여 사람 걸음으로 4~5시간정도 걸릴 것 같다.
오조스님께서 친히 배로 혜능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혜능이 “이제는 제가 건널 줄 아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하니 “아니다, 오늘은 내가 건네주마.”하며 직접 노를 저어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제자의 앞날에 대한 간절한 바람과 함께 석별의 정을 이렇게나마 보여주려는 스승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밤중에 혜능 그 더벅머리 행자를 데려다 법을 이어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말없는 강물을 보니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법을 이어왔는데 중국은 문혁때 노장들을 다 쫓아내 버려서 대가 끊어져 버렸다. 중국 선종본산들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 선지식스님들이 선맥을 대대로 이어왔다는 것이 너무나 큰 재산이구나 하는 고마움을 절실히 느꼈다.
'선농일치' 선종교단 자리매김
중국불교사에서 스님들이 직접 농사일과 참선을 병행해야 한다는 ‘선농일치(禪農一致)’ 운동이 일어난 것은 4조부터고 그러한 사상이 총림으로서 교단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5조때다.
자급자족하는 교단을 형성한 5조의 동산법문을 이어받은 뛰어난 제자들이 중국불교의 역사에 있어서 선종이라는 새로운 실천불교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4조가 입적한 후 5조는 쌍봉산의 동쪽인 빙무산(憑茂山)으로 옮긴다. 이후 사람들은 4조 도신이 주석한 쌍봉산을 서산(西山)이라 부르고 홍인이 주석한 빙무산을 동산(東山)이라 부르게 됐다.
이로부터 5조의 선을 동산법문이라고 부른다.
5조의 전기를 전하는 현존 최고의 자료는 <전법보기(傳法寶紀)>와 <능가사자기>다.
<능가사자기>는 홍인 스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타인에게 관대하였으며 순수한 의지인이다. 그는 노동에 힘써 봉사하였기 때문에 같이 수행하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부족함이 없었다. 선악의 시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현상의 공(空)을 응시하고 있었으니 전신의 힘을 선수행에 바쳐 홀로 우뚝 솟은 자기성찰의 경지에 도달했다. 걷거나 앉거나 멈추는 모든 행동이 바로 진리의 나타남이었으며 행동과 언어, 마음 모두 불법 아닌게 없었다."
삶과 수행이 일치되어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 라는 부러움이 든다.
5조의 행화에 대해 <전법보기>는 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스승 도신으로부터 부촉을 받은 홍인의 도성(道聲)을 들은 귀족들이 산문에 몰려들어 날로 증가하였으며 10여년간에 그의 지도를 받은 도속(道俗)의 수학자가 천하의 10중 8~9가 되었다. 중국에 선법이 전래된 이래 일찍이 이보다 더 성행한 적이 없었다. 홍인의 교화방법은 미리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가르쳤으며 상대의 근기를 정확히 알아서 알맞은 교시를 내렸다."
자성청정 강조한 <최상승론> 저술
5조의 저서는 많지 않지만 수행의 요체를 간단하게 문답 형식으로 서술해놓은 것이 <최상승론>이다.
나는, 은사스님인 일타 스님께서 해인사 극락전에 계실 때 <선문촬요>를 배우며 <최상승론>을 배운 일이 있다.
네가 바로 부처라고-우리마음은 본래청정하다고-은사스님께서는 구구절절 흥이 나셔서 가르쳐 주시는데 나는 그때 상당히 고민했던 생각이 난다.
"내가 부처이고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면 왜 이토록 힘들게 참선해야 하는거지?”
“내가 부처인데 부처가 왜 이리 시시하지?”
이런 웃기지도 않는 생각을 했던 때가 추억처럼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들 자성이 본래 청정하다고 가르쳐 주신 가르침, 본래 부처임을 보여주신 그 심오한 사상, 화두참선법은 세계 인류를 구하고도 남을 사상이고 법이건만 그러한 그릇이 못되는 자신을 돌아보며 거듭 발원을 해 본다.
길이 불퇴전하여 홍인 조사마냥 큰 바다가 되어 보리라고......
오조사 스님들을 찾아다니면서 <최상승론>을 물어보았지만 정작 오조사에는 책이 없고 <최상승론>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한국의 스님들에게는, 달마 스님이나 홍인 혜능 황벽 스님 등이 할아버지고 조상이다.
그러나 정작 그 스님들이 태어난 중국에서는 현재 남남이 되어 버렸다.
중국선종의 원류를 찾아다니다 보니까, 중국스님들에게는 이들 조사스님들이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이 되어버린 것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조고각하' 출처도 오조사
선가에서 자주 쓰이는 ‘조고각하(照顧脚下)’의 출처도 바로 오조사다. 그러나 여기 스님들은 ‘삼불(三佛)’의 일화도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도리어 "어떻게 그렇게 다 아느냐?" 고 질문을 해 올 정도다.
오조사에는 40~50명의 스님들이 있었다. 아침저녁 예불을 길게 모시고 <금강경>을 배우고 있다.
‘念佛是誰’라 하여 ‘염불하는 이놈이 누구냐?’ 란 화두로 하루 7시간 좌선한다고 했다. 허운 스님이 가르친 방법이라면서 한국에 참선법이 살아 내려오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 가보는게 원이란다.
서당지상(西堂智藏 735~814) 선사에게서 우리나라 도의 선사가 받아온 선맥, 이제 우리가 다시 전해줘야 하지 않나 하는 사명감이 일었다.
그 사상 그 선맥 복원됐으면...
선의 원류를 돌아보면서, 중국 공산화 70년동안 가장 큰 실패가 문화혁명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불교유적만이 아니라 엄청난 문화재가 파괴되고 조상들의 혼이 훼손되었다. 이것은 중국만의 손실이 아니라 세계 인류 문화사적으로 큰 손실이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현실을 볼 때 이제 우리나라에서 중국스님들을 받아들여 선을 가르쳐서 간화선을 부흥시키는 일이야말로 역대 조사스님들에게 입은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혜국 스님은
1961년 해인사 일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 범어사에서 혜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69년 해인사에서 10만배 정진을 마친후 오른손 세 손가락을 태워 부처님께 바친후 태백산 도솔암에서 홀로 장좌불와를 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용맹정진을 했다. 대승사 봉암사 칠불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십안거를 성만했으며
제주도와 충주에 각각 남국선원과 석종사 금봉선원을 열어 성철 구산 일타 스님 등 스승들의 뜻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