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청풍이 조계산중에 불어옵니다.
출가위승자가 일년에도 수백에 이른다니 실로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말세에는 羊質虎皮之輩(양질호피지배)가 허다하여 겉으로는 緇徒(치도)의 모습이나 속은 世利(세리)에 心染(심염)하여 趨走風塵(추주풍진)하다가 오히려 取笑俗人(취소속인) 하는 이가 적지 않으니 이러한 출가는 이익이 전무하여 처음부터 아니한 것만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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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치는 시간적으로 억겁을 포함하고 공간적으로 십방삼세를 두루합니다.
이를 일러 본래면목이라고 하고 본래면목을 증득하는 것을 본분사라고 합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이 본분사를 해결하여 생사해탈의 경지에 들었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까닭도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궤적을 따라 생사해탈을 구하고자 합니다. 생사해탈의 명각을 얻는 것이 쉬운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수행자의 분심에 따라 그리 어려운 것 또한 아닙니다.
위산대원선사가 앙산에게 물었습니다."어느 것이 참 부처님이 머무는 곳입니까"앙산이 대답했습니다."생각으로서 생각이 없는 것처럼 묘한 이치를 생각하면(以思無思之妙) 도리어 신령스런 생각이 불꽃처럼 무궁하여 마침내 생각이 다하고 근원으로 돌아간다.(思盡還源) 이때 성과 상이 상주하여 사와 이가 둘이 아닌 경지 여기가 진불이 머무는 자리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앙산이 위산에게 물었습니다."그대는 묘정명심을 어떻게 내는가" 위산이 대답하였습니다."산하대지요 일월성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시회대중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깨쳤다고 합니다. 이 평범한 도리를 알면 누구나 부처가 됩니다. 이처럼 마음밖에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깨달을 자가 미리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교지에서 보면 공이니 무이니를 논하나 선지에서 보면 공야 무야가 부질없는 희론이며 진속구분 또한 허망한 말장난입니다.
시비와 흑백을 논하고 자타를 구분하여 사물에 집착하는 분별심을 내는 것이 중생이요, 눈앞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이 환영임을 깨달아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무애자재한 성품을 기르는 것 이것이 참부처의 경지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막백물부측하여 모든 경계의 집착하지 않고 진로망상을 떨쳐버리면 자성(眞如法性)이 저절로 기염하게 됩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의단을 타파하여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는 요요적적의 큰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법법본래법이요 심심무별심입니다. 일체만물이 본래 그대로요. 마음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사물을 분별하면 사장에 빠지고 이치에 침착하면 이장에 빠져서 이미 진연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춘하추동 온냉한서가 그대로 진리요.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본래의 면목입니다.
오늘은 을유년 동결제일입니다. 결제는 출가인이 산문밖 출입을 삼가고 수행에 정진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행자의 몸을 묶어도 산란심이 일어 마음을 묶어놓지 아니하며 결제라 할 수 없고 아무리 마음을 묶어도 육신을 조복받지 못하면 수행이 될리 없습니다.
태고총림은 멀리는 개산조 도선국사가 계시고, 가까이에는 침굉 · 경운 · 선곡 같은 대선지식이 계셔서 해동의 선풍을 드날린 자랑스러운 육조의 고사입니다.
狗子無佛性, 庭前柏樹子, 木馬上金梯(구자무불성, 정전백수자, 목마상김제)등의 화두는 깨달은이의 경계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도장에서 이번 결제기간동안 역대조사스님의 번득이는 선지와 화두를 참구하여 일대사인연을 통철하는 본분작가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心不返照(심부반조)면 간경무익이며 迷心禪者(미심선자)는 但助無明(단조무명)입니다. 총림의 경학자와 수선자는 이점을 명심하여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전래의 경게를 일러 수행의 조도로 삼고자 합니다.
修行莫論久 不與塵緣偶(수행막론구 부여진연우)
剔起兩莖眉 虛空顚倒走(척기양경미 허공전도주)
須彌磨成沫 當下通本有(수미마성말 당하통본유)
生鐵金汁流 始免從前咎(생철김즙류 시면종전구)
수행을 오래했다고 자랑하지 말고
티끌세상 인연과 짝이 되지 말라
두가닥 눈썹을 휘날리면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허공을 달려가
맷돌에 수미산을 가루로 만들고
당장에 본래면목을 쫓아가면
생철에서 황금즙이 흐르고
비로소 이제 것의 허물을 벗어나리라.
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