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련사(白蓮寺)는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 아래 자리하고 있다. 백련사 가는 길은 구천동이 그 들머리이다. 덕유산 남쪽 기슭 거창에 살았던 명종 때 선비 갈천 임훈(林薰)은 9000명의 성불공자(成佛功者)가 머문 땅이라 하여 ‘구천둔(九千屯)’이라고 했다.
매표소에서 백련사까지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산길이다. 월하탄 아래 소에서 물까마귀 한쌍이 아이들처럼 물미끄럼을 타고 있다. 구천동 계곡의 조류는 모두 48종으로 보고되어 있다.
백련사에 이르는 산길과 계곡 주변에는 다양한 활엽수들이 거대한 천막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다. 곰의말채나무, 다릅나무, 대팻집나무, 복장나무, 비목, 시닥나무, 황벽나무... 가히 활엽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 ||||
구천동 계곡에 서식하는 물고기로는 금강모치, 갈겨니, 꺽지, 돌고기, 동사리, 버들치, 감돌고기 등이 개체수가 많은 편이다. 그런데 백련교 위쪽 계곡에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세워놓은 물고기 안내판에는 열목어, 어름치, 돌상어, 쉬리 등등의 사진이 들어가 있어서 오가는 이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다.
백련사 가는 계곡 길은 가파르지 않아서 산행하기에 좋다. 군락은 아니지만, 다양한 여름, 가을꽃이 군데군데 피어있다. 촛대승마는 여러해살이 식물로, 고산식물이다. 키는 1m이상 자라며, 이곳에서는 8월말부터 9월초 사이에 흰 꽃을 볼 수 있다. 꽃차례의 생김새가 촛대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약간의 독성이 있지만, 산중 절간에서는 독을 울궈 내고 어린 순과 잎을 먹는다.
백련사 주변으로 건장한 전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소나무를 대신해 백련사의 겨울을 지켜주는 벗이다.
백련사는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덕유산 기슭에 핀 백련을 보고 토굴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14개의 산내암자를 두었고, 조선 중기에는 부휴, 정관, 벽암, 매월당과 같은 명승들이 거쳐간 기록이 있다.
백련사가 앉은 자리는 정상인 향적봉 중턱, 경내 한가운데로 한 줄기 계류가 향적봉으로부터 내려오고 있다. 백련사의 가람배치는 그 계류를 중심으로 예배하는 불보살 공간과 생활하는 요사채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계류 건너 요사채 공간은 거의가 근래 새로 지은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 전까지는 밭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됐던 백련사가 법등처럼 끊이지 않는 불사로 거듭나 있다. 심산유곡에 들어선 절치고는 터도 넓고, 전각들도 많은 편이다. 백련사 경내를 수놓은 코스모스는 멕시코에서 건너온 외래종이긴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들어와서 우리들 정서 깊숙한 곳에 자리한 꽃이다. 그래서 ‘살사리’라는 재미있는 우리 이름도 갖고 있는 꽃이다.
| ||||
왕나비과에 속하는 우리나라 나비는 모두 3종이 있는데, 토착종은 왕나비 1종 뿐이라고 한다. 제주도를 비롯해 남부지방에 주로 분포하지만, 때로는 태풍을 타고 바다를 건너기도 하고 멀리 북한지역까지 북상하기도 한다. 이름과는 달리 날개 길이가 10cm 안팎의 중간 크기 나비이다.
계류 건너에 있는 삼성각 댓돌에 앉으면 전북과 경남을 가르는 능선이 눈앞 멀리 지나가고 있다. 거창 송계사가 바로 저 능선 너머에 있다. 북사면 계곡을 따라 전나무들이 군학(群鶴)처럼 우뚝우뚝하다.
삼성각 뒤로 향적봉으로 가는 등산로가 열려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제법 가파른 등산로이다. 오로지 등정만을 목적으로 한 등산객들에겐 한 시간 거리이지만, 자연을 돌아보는 탐방걸음으로는 두 시간도 모자라는 거리이다. 숲은 여전히 울울창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향적봉(香積峰)이라는 이름은 이 산의 천연기념물인 주목(朱木)에서 근거한다. 주목은 향이 좋고 수피가 붉기 때문에 ‘향적목(香積木)’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향적목이 8부 능선부터 향적봉 구간에서 70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 ||||
주목은 값비싼 고급 목재로 가끔 도벌꾼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는데, 지난달에도 200년 된 주목 한 그루가 도벌된 사실이 등산객들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향적봉에서 중봉에 이르는 구간은 야생화로 도솔천을 이룬다. 곳곳에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대개 산악인들은 중봉에서 오수좌굴을 지나 백련사로 하산하지만, 향적봉을 오르지 않고 백련사에서 곧장 오수좌굴(吳首座窟)로 가는 계곡로가 열려 있다.
먼 옛날 오씨 성을 가진 스님이 수행했다는 오수좌굴은 50여명이 들어설 수 있는 자연동굴이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는 ‘계조굴(繼祖窟)’로 나와 있다.
숙종 때 백의정승으로 이름난 윤증의 글에 따르면, 앞을 못 보는 노맹(老盲) 스님이 같은 처지의 여러 맹인스님을 모아놓고 도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상상만으로도 감동적인 경계이다. 그러나 윤증이 차까지 얻어 마셨다는 그 맹인스님들은 진짜 맹인이라기보다 도를 깨우치지 못한 자신을 낮추어 한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