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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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박사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현대불교신문 연재]행복을 찾아주는 부처님 말씀 (25)


5월 20일 황우석 박사가 배아줄기 세포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우리들 보통 사람은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그 발표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 별반 없었습니다만 앞으로 불치병·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인류에게 무병장수의 미래가 좀더 일찍 열리게 되었다는 말에는 귀가 번쩍 뜨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의학계와 과학계의 성과가 발표될 때마다 사람들은 그 적합성·적법성의 마지막을 종교에 묻곤 합니다. 불교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황우석 박사가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부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볼까요?”

저 역시도 지금 부처님이 곁에 계시다면 서둘러 달려가서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저 경전을 뒤적이며 조금이라도 연관된 말씀은 없는지에만 매달릴 뿐입니다. 사람이 병을 얻게 되면 지극히 간호하라는 말씀은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병자를 돌보아 주는 이는 곧 나(부처님)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이는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보다 더 큰 보시를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면 너희들은 큰 복을 얻을 것이다.”(<증일아함경> 한글장9권93쪽. 축약)

또한 경에서는 여러 가지 질병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에 대한 다양한 원인분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무거운 질병이나 장애에 대해서는 ‘전생의 악업에 따른 과보’라는 결론을 내린 경설도 눈에 뜨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은 아직 과학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내려진 이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불치의 병이라 여겨졌던 병들이 차츰 그 원인과 치료법을 알아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인을 알지 못할 때에야 하늘의 벌이라느니, 전생의 업보가 두터워서 그렇다느니 하지만 원인을 찾고 보면 그런 식의 결론이 얼마나 무지하고 황당한 것이었습니까.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의지를 일으켜 좀더 나은 쪽으로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잘 될까, 저렇게 하면 잘 될까…를 쉬지 않고 생각하며 해결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지닌 중생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병에 걸리면 왜 이런 병에 걸렸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고 어떤 약을 먹어야 그 병을 떨칠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무거운 병에 걸렸을 때 사람들은 처음에는 씻지 못할 극형이라도 받는 듯 그에 항거하지 못하고 끌려가지만 사람들의 본능은 그 원인을 찾아내고 그 해결책을 찾아다닙니다.

이번 황우석 박사의 개가는 그런 면에서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는 루게릭병 환자인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청년이 있습니다. 평생을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가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 느닷없이 이름도 생소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의식은 또렷한데 육체가 점점 굳어져 오고 말기에는 호흡장애까지 일으켜 죽음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아픔이 얼마나 클지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닥친 그 무서운 병을 그 사람이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말 일이겠습니까? 그 아픔이 나와 내 가족에게 닥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의 전생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서 그렇게 결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1500명이 넘는 루게릭병 환자들이 있으며 이 병에 걸리면 대개 발병 후 5년 내에 사망한다고 하니 루게릭이라는 진단조차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까지 생각해보면 훨씬 많은 숫자의 환자들이 존재하였고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그 청년을 만나 난치병 환자들의 반응을 물어보았습니다. 당장 병을 고칠 수는 없지만 막연하기만 하던 삶에 출구가 보이는 것 같았다고 답하였습니다. 어서 임상실험이 순탄하게 끝나 많은 이들이 무서운 병에서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윤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생명은 신의 영역이기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생명’이 처음에는 선의에서 연구와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가 자칫 악한 의지를 가진 이들로 인해 그 존엄성이 부서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입니다.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하고 그 한계를 열어젖히는 것은 사유를 할 수 있는 생명의 고유권한입니다만 그 고유권한으로 인해 결국 자신의 마지막 가치가 흥정의 대상이 되거나 노리개로 전락해버리면 그 재앙 또한 인간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황우석 교수와 불교생명윤리 부다피아 홈페이지 가기<---이곳을 클릭하세요 ^ ^
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
2005-11-09 오전 10:30:00
 
한마디
근데 이것 다 거짓말이랍니다. 사이언스에서 논문 철회했어요. 조작되어 철회된 논문에 의거한 이런 기사는 이제 뒤로 물려주세요.
(2006-02-23 오후 10:46:13)
71
이세상에 있는 그 무엇 안그런 것 있습니까? 불이 그렇고, 물, 전기, 원자력, 심지어 주방에서 쓰는 칼조차 그렇지만.. 인간은 지혜롭게 사용해왔습니다. 물론 사고도 당하면서..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생명과학 역시 지혜롭게 쓰도록 노력하면 될 것입니다.
(2005-11-28 오후 4: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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