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모의고사를 마치고 우연히 들른 집 근처의 한 사찰. 고즈넉한 분위기에 간간히 들리던 풍경소리가 수험생인 내겐 무척이나 편안하고 신선한 경험이었기에 법당 앞 툇마루에 걸터앉아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당시 교회에 다녔던 나는 사찰이라는 것 자체가 낯설고 뭔지 모를 불경스러운 대상이라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터라 그 날의 일 자체가 파격이었고, 그래서 지금도 더더욱 부처님과의 인연을 실감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 일로 인해 대학에 들어가 군대 제대할 때까지 사찰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불교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던 중 주지스님의 권유로 지금까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단기출가 생활을 전라도 승주 송광사에서 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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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예불이 끝나고 나면 공양간에서 채공과 갱두의 소임을 맡아 아침공양을 준비하고, 아침공양이 끝나면 곧바로 스님들의 교육이 시작되는데 어제 배운 것부터 암기해 시험을 보고나서 당일 교육과정을 진행했다. 교육을 마친 후, 한숨 좀 돌릴까 하면 원주스님은 매일매일 행자들이 지루할까 걱정이 되셨는지 다양한 일거리로 잠시의 쉬는 시간도 울력으로 채워주셨다. 그러다가 다시 점심공양을 준비하고, 또 울력을 하다가 저녁공양을 준비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한번은 아침공양을 마친 후, 가뜩이나 잠도 많은데 잠을 못자다 보니 수면부족으로 제 명에 못살겠다 싶어 절에 찾아오는 불자님들 처소방 옆에 있는 이불방에 숨어들어 이불사이에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점심녘까지 실컷 잠을 잔 기억도 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심하게 혼낼 거라고 생각했던 원주스님이나 다른 행자님들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탈영’을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소개해 주신 주지스님의 얼굴과 “이런 일 조차 이기지 못하면 뭘 하겠냐” 싶은 자존심 때문에 악착같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언젠가 끝은 있겠”지 하면서.
어느덧 한달 정도 시간이 흘러 사회에서 배어들었던 속물근성들이 점점 빠져가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단지 얼마 전 삭발해버린 머리가 계속 눈에 거슬릴 뿐이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번잡하고 복잡하던 머리 속은 실타래가 풀린 양, 명료하고 밝은 느낌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주변 나무의 향기, 바람 내음, 개울의 물 흐르는 소리 등 옛날에는 지나쳐버린 사소한 것들이 나를 즐겁게 했고, 위로가 되기 시작했다. 그때 내 스스로 ‘행자생활도 기도도 경전공부도 제대로 해보자’하는 초발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이후로 나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녘 차디찬 얼음물로 잠을 깨고, 누구보다 간절하게 예불문을 독송하고, 백팔배를 하고 경전을 암송했다. 얼마 전 손끝과 발끝을 얼어붙게 했던 추위는 더 이상 나에게 번뇌와 장애가 아니었다.
아침에 공양을 준비하고 공양을 마친 후 산더미 같은 설거지조차 즐거웠고, 스님께서 일러주시는 경전공부도 소중히 한자 한자 새기면서 울력시간 틈틈이 외우고 새겼다. 또한 계곡 옆 사자루에 모셔진 비로자나부처님께 백팔 배와 기도정진을 했다. 몸은 고단했지만 힘든 줄 몰랐고, 마음은 환희심에 가득 찼다.
주위의 스님들도 그런 나에게 좀더 박차를 가하도록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관음전에서 1000일간 묵언 관음기도를 하셨던 스님이 계셨다. 당시 기도를 시작하신 지 2년째 접어들었는데 매일 ‘사분정근’으로 거의 10시간 정도를 기도에 매진하셨다. 가끔 스님은 겨울철이라 감기몸살에 목이 잠기고 온 몸이 땀에 절어 매우 편찮으신데도 항상 그 모습 그대로 관세음보살님전을 지키셨다. 지금 기억에도 건강이 안 좋으셔서 약을 계속 드시는 것 같았는데, “어디가 많이 안 좋으세요”라고 물으면, “기도가 부족해서, 수행이 부족해서”라고 글을 써 보이면서 더더욱 기도에 몰두하시는 모습이 어린 나에겐 숭고하고 고귀하게 보이기까지 했었다.
“저러다가 쓰러지시면 어쩌려고 저러시나!”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 이틀도 아니고 2년째 하시고 계신 것이 너무나 대단하게 여겨졌다. 분명 그동안 너무나 힘들고 아파서 하루정도 쉬고 싶을 때도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 가슴 한 편이 저리면서, 얼마 전 일이 힘들고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이불방에서 주위를 속이고 게으름을 피운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스님의 천일기도정진으로 송광사 경내는 하루 종일 관음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 소리는 무명업장의 어리석음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에겐 큰 가르침이자 경책의 소리였다. 그래서 가끔은 그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가끔 불자님들이 보시해주는 크림빵이나 과일 등을 남몰래 챙겨 드리거나 가끔 스님을 따라 관음기도에 동참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한 분의 스님이 현봉 스님이시다. 아침공양을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뵙던 스님으로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치셨다. 몇 해 전인가 송광사 주지스님 소임도 맡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지금까지 내가 뵌 스님들 중에서 ‘스님냄새’가 많이 배어나오는 스님 중 한 분이었다. 말씀하시는 것이 항상 구수하고 꾸밈이 없어 하시는 말씀마다 송광사 뒷산인 조계산의 풍광과 참 많이 닮아있었다. 가끔 스님께서 주석하시는 광원암에 찾아뵈면 언제든 녹차를 정성스레 다려주시면서 “열심히 행자생활 잘하라”고 격려해 주시고, 손수 신도들이 가져온 빵이나 과자 등 간식거리까지 챙겨주셔서 친한 행자님들과 나눠 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다른 행자님들과 “현봉 스님이 최고 아니냐” 또는 “너 현봉스님 상좌해라”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행자님들 사이에서도 강훈암과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든 일순위로 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계속됐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