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나요?
질문: 저는 지금 박사 과정을 거의 마치고 있는 학생인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간, 능력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한꺼번에 할 수 없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야 그런 것들이 문제될 게 없겠지만, 저희 같이 이제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 있어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가르쳐 주십시오.
답변: 기계나 맷돌이 돌아갈 때 중심을 잡아주는 심봉을 꽂지 않는다면 이탈이 되고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마음 중심 심봉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봉은 과거 전생의 영혼 자체가 자기가 살아온 대로 그려서 못났든 잘났든 지금 끌고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공했기 때문에 지금도 찰나찰나 우리는 놓고 가고 있으며, 그 생각을 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자기가, 과거 자기는 씨라고도 볼 수 있겠죠. 수박으로 치면 몸뚱이는 바로 수박이고 씨는 수박씨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자기 깊은 내면세계의 씨는 안 보고 수박이 어떻게 됐나 하고선 바깥에서 찾습니다. 바깥에서 찾으면 찾아지겠습니까? 벌써 수박씨는 심어져서 싹이 돼 가지고 다시 수박이 달려서 익었는데 그 수박덩어리가 바깥에서 어떻게 씨를 찾습니까. 바깥에서 구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자기 씨는 바로 내면 속에 있다는 것을 믿고 내면의 씨를 발견하기 위해서 자기 안으로 추구하고 들어가야 하는데도 밖으로만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가 과거에 살던 인과로 인해서 뭉쳐진 악업 선업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고, 의식은 체가 없는데도 안으로 찾아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헤매면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나를 끌고 다니는 과거의 나는 부(父)가 되고 끌려 다니는 놈은 자(子)가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기 부인 주인공에 내려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내면의 세계에도 헤아릴 수 없는 의식이 한마음으로 돌아가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 속에서 의식이 따라 줍니다. 외부의 모든 것도 다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됐기 때문에 광력 전력 통신력 자력, 이 네 가지가 바로 재료가 돼 가지고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모든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한마음 주인공이라는 건 우리가 지금 재료가 있어서 이렇게 살고 있고 물도 먹고, 즉 말하자면 우리가 지수화풍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런 걸 우리가 먹고 살고 있죠. 지금 과학이 발전되는 것도, 의학을 연구하는 것도, 생물학을 연구하는 것도 다 그런 게 아니라면 연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만 알면 모든 게 거기에서 물리가 터지게 돼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를 않으니 알쏭달쏭이죠. 누가 어느 고깃덩어리를 믿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형상을 믿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허공을 믿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름을 믿으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단 하나, 자기가 지금 이렇게 다닐 수 있게 하는 영원한 자기 생명의 근본, 그 자체를 중심 삼고 자기 근본을 믿으라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달려 있는 의식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한마음 주인공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가 그 도리를 알면 전부 지배인이 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믿고 거기다가 다 맡기고 거기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할 때, 그리고 거기에 감사할 때,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엎드러지면 자기가 일어나듯이 거길 누르고 자동으로 돌아가게 해 놓고 끄는 것도 바로 그 자리를 누르면 꺼집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지금 한마음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기고 감사하고 안되는 것이 나오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되게 할 수 있는 것도 거기서 나온다 하는 것을 진짜로 믿을 때, 간절히 믿을 때 모든 일은 안되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실험해 보지도 않고, 믿어 보지도 않고, 연구해 보지도 않고 자기 사량으로 생각해서 무쪽같이 ‘이건 틀리다’ 이렇게 하는데 그건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겁니다.
불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전체를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이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돌아가는 것을 그대로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를 실험하고, 모든 것이 직결돼 있고 가설이 돼 있으니 나 하나가 물리가 터진다면 우주 전체를 탐험할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데에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두루 할 수도 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자체적으로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법이 된다 이 소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든지 천문학이든지 천체 물리학이든지 생물학이든지 의학이든지 전부 마음으로서 공부해서, 지금 시대는 의학도 정신의학이 아니면 100%를 진행해 나갈 수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인공위성을 띄우고 전파를 통해서 두루 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수소폭탄이니 핵폭탄이니 해 놨다 하더라도 그것도 그 물질이 있기 이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맘대로 자유자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모두를 한 자가발전소에서 통하게 해야만 내가 약하면 기도 넣을 수 있고 또 병이 나면 그 병 난 데서 고칠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 마음이 잘못돼서 잘못 생각을 하면 바로 파워를 일으키고, 내가 잘못 생각을 하고 악하게 생각을 한다면 몸속에 들은 의식이 다 악하게 나갑니다. 그래서 나를 망가뜨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 간에 자기 마음 탓이다 이겁니다. 자기가 한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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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도 그렇고 어떤 일이 잘 안될 때도 그렇고 일체를 그 자리에 다시 돌려놓고 지켜보면서 관하세요. 순간순간 생각에 끄달리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모든 걸 주인공한테 맡기고 찬찬히 생각하다보면, 자꾸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생각이 넓혀지게 되고,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으면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다 받아들이는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현실에서 그것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도 웃으면서 뜻이 있을 거라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모든 걸 진정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절대 이탈되지 않습니다. 학생도 잘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모르는데 어떻게 믿나요?
질문: 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듯이 근본 자리를 믿고 맡기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인공을 믿는다고 다짐을 하고 또 실행을 하고 있지만 내가 아직은 내 근본자리를 모르는데 어떻게 믿느냐는 생각이 자꾸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걸 어떻게 믿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떤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 이런저런 생각들이 올라오는데 그것은 또 왜 그런 것인지요?
답변: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가고오고 먹고 싸는 전부를 어디서 하는 겁니까? 그것을 생각해 보면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전부가 공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이 말이 이해가 갑니까? 그런 생각이 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고 또 그런 생각이 안 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일체가 주인공의 작용인 것입니다.
죽 솥에 죽을 끓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이 끓어서 막 이 방울 저 방울 나와도 한 솥의 죽방울이지 다른 거 아니거든요. 죽방울이 죽 솥에서 끓어서 막 올라오는 걸 보고 주걱으로다가 치면서 요놈도 문수 요놈도 문수 그러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 생각도 주인공, 조 생각도 주인공, 그러다 보면 한 솥에 있는 죽방울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ㆍ집ㆍ멸ㆍ도 사제법이 생긴 겁니다. 고 덩어리 육신이 전자의 인과로 인해서, 인연으로 인해서 만난 바로 친구들인데 그 친구들이 의식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나는 대로 전부 거기서 나오는 거라고 한마음으로 돌려 믿는다면 아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니 무조건 자기 자신을 믿으세요. 자기라는 게 있고 자기라는 게 앞서기 때문에 자기 근본을 믿지 못하지 자기라는 게 없고 고정됨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왜 믿지 못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다리를 못 써서 영 다니지를 못하다가 이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야, 이 몸뚱이는 시자인데, 이 시자 몸뚱이를 이렇게 망가뜨려 놓으면 내가 어떻게 심부름을 해? 이 다릴 걷게 해야 될 거 아냐!’ 하고서는 일어났더랍니다. 그러니깐 벌떡 일어나지더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래서 차라리 둔자는 빨리 깨우칠 수 있지만 아주 약은 사람은 외려 공부가 더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그저 알아도 몰라도 모든 걸 거기다 맡겨 놓고 좀 모자라 보세요.
여러분은 모자라는 공부, 봐도 보지 않는 공부, 들어도 듣지 않는 공부를 하고 가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가야지만 속에서 물리가 터질 테니까요. 그리고 자꾸 의심을 하니까 안 믿어지는 겁니다. 그런데요, 전생이 있다는 것은, 전생이 지금 현생 이 가운데 같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를 발견하는 게 바로 공부입니다. 과거는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에 없고 미래는 가지 않았으니깐 없고 현재는 그렇게 고정됨이 없으니까 공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현재도 무(無)죠. 현재도 없다 이겁니다. 찰나찰나 바꿔지니깐 어떤 거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름해서 부처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다 부처 될 수 있는 겁니다. 전생이 바로 현생이고 현생이 전생이니까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전생이니 후생이니 하지 전생이 따로 있고 후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꼭 있다는 것은, 자기가 지금 이끌고 가는 자체가 바로 전생입니다. 그러니 우리 공했다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지금 모든 일을 보고 듣고 가고오고 하는 것도 전부 고정된 게 없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것 보고 저것 보고, 이것 듣고 저것 듣고, 이것 하고 저것 하고 이러는 것도 모두 공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것 할 때 어떤 것 먹을 때, 어떤 것을 들을 때, 어떤 것 볼 때, 어디를 갈 때 내가 했다고 하고 나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하는 일이 너무 많은데 어떤 일 할 때가 내가 했다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입력됐던 걸 없애려면 어떡해야 없어지겠습니까? 그것을 망상이라고 끊는다고 하지만 그게 물을 끊는 거와 같은데 그게 끊는다고 끊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과거 입력이 됐던 것이 하나하나 솔솔 나오는 거니깐 경계가 다가오는 대로 다시 입력을 되해라 이겁니다. 텔레비전을 켜느라고 리모콘을 눌렀더니 텔레비전이 켜졌습니다. 끄려면 거기 다시 눌러야 합니다. 안 그럴까요? 모든 게 이열치열이에요. 그러니 나오는데다가, 용도에 따라서 우리 앞에 닥치는 거를 입력을 다시 해라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가정에서 생기는 일들도 그렇고 죽 솥에서 죽 끓는 방울이 나오는 것도 잔잔해지죠. 왜냐하면 죽 솥과 같으니까요. 생명, 의식, 모습이 천차만별로 돼 있으면서 인연 지었던 악업이나 선업이 인연에 따라서 다 입력이 되고 다시 인연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못 믿는다를 떠나서 우린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받는 고통을 해결하려면….
질문: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아서 참선 수행을 하고 제 스스로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고 기쁨을 느낄 수 있어서 다 좋은데 다른 사람이 그런 패턴대로 안 하고 그냥 일상생활에 끄달리면서 받는 고통을 보면 제가 괴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괴롭기 때문에 나한테 그런 괴로움이 느껴지는데 그럴 경우 그거를 어떻게 해결해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답변: 여러분이 세상을 넓게 못 보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 자리에서 죽기도 하고 이 자리에서 살아나오기도 하죠. 그러니깐 천당도 이 자리고 지옥도 이 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둘 아닌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회사에 회장이 없으면 사장도 없고 직원도 없습니다. 한쪽만 없어도 회사를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둘이 아닌 평등한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상대를 건져 주지 못하는 거죠. 둘 아닌 도리를 안다면 모두가 나이기 때문에 건져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통할 수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갖는다면 다 건져집니다. 둘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둘 아닌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은 둘 아니게 나투는 도리, 즉 말하자면 내가 저 사람도 되고 저 사람이 나도 될 수 있는 그러한 도리를 배우기 위해서 또 한 번 맡겨 놓고 항상 밑으로나 위로나 평등한 마음으로서 자비롭게 자기를 세우지 말고, 부드럽게 하면서 둘 아니게 살 수 있는 그 길을 밟는다면 우리가 아니 내 몸이,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공부를 그렇게 해서 충만히 했다면 만 명이 와서 ‘나는 이런 것이 이렇게 돼서 이럽니다. 저런 것이 저렇게 돼서 그렇습니다.’ 이래도 그 사람들이 응해 달라는 대로, 즉 말하자면 병이 나서 아파하는 사람에게는 약사가 돼서 도와주고, 살기가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관세음이 돼서 도와주고, 또는 명이 짧아 괴로워하는 사람에겐 칠성이 돼서 도와주고, 이렇게 한 사람 마음속에서 원하는 대로 만 명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루 할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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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가 왜 두루 합니까? 그리고 세계에서 생기는 모든 일들이 세계 곳곳으로 인공위성으로 전파를 통해서 금방금방 신문이 옵디다. 그건 왜 그렇게 됩니까. 그것도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지수화풍의 바탕이 아니라면 이 마음의 요소가 묘법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도 연구해서 나온 겁니다. 이 모두가 지금 발전되고 과학도 연구하고 의학도 연구하는 것도 50% 무의 법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100%를 진행을 못하는 겁니다. 모든 게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발견했지만 너와 둘이 아닌 도리를 모르고 너와 둘이 아니게 나툴 줄을 모르고, 그런 도리를 한번 생각해 보신다면 원자에서 입자가 얼마나 많이 될 수도 있겠습니까? 그 입자가 분자로 화했을 때 헤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도리를 우리가 먼저 알려면 나를 발견하는 도리, 둘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또 놓고 가고 둘 아니게 나투는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 하면, 마음으로다가 ‘이렇게 하겠다!’ 한다면 높은 것은 얕게 하고 얕은 것은 높이고 그렇게 평등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나투는 도리를 알아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첫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그래야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 소리예요.
모두가 둘이 아닌데도 몸이 아파서만 아픔이 아니라 너무 쓰라리게 사는 사람도 많아요.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아요. 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한 번도 내가 거짓 해 본 일도 없고 헛말 한 예도 없고 또는 가난한 사람들한테 돈 받은 일도 없고 또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있는 사람한텐 좀 받아서 없는 사람한텐 주기도 하고, 또 다니는데 노비도 하고 이러죠. 내 몸뚱이도 얼마 안 있으면 벗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무겁게 왜 짊어지고 다닙니까. 편안하게 다니지.
그러니깐 마음의 짐을 짊어지지 말라 이겁니다. 모든 걸 놓고 살라. 모든 걸 맡겨 놓고 살라 이거예요. 어떤 괴로움이 있어도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어.’ 그러곤 그냥 거기다 맡겨 버리면 해결이 나요. ‘이것은 못해. 이것은 정말 그렇게 될까?' 이러니깐 그게 실랑이를 하게 되죠. 모두가 지혜와 아량이 넓어져야 됩니다. 두 팔을 쫙 벌리면 우주 천하가 다 내 품에 들어와야 돼요. 바다를 보면 물 한 모금 마시는 거와 같아야 돼요. 그러니까 갈팡질팡 하지 마시고 마음의 도리를 지극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길 밖에 없는 것인지요?
질문: 스님, 마음의 길을 배우고 닦는 것밖에 저희가 벗어날 방법이 진정 없는 것인지요? 자유스러워지고 싶고 저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구제해 주고 싶은 마음은 절절한데 잡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 이 공부가 무척 어렵고 힘이 듭니다. 이 길밖에 없는 것인지요?
답변: 왜 이 공부를 안 하면 안 되는지 수차 얘기를 했습니다. 기복적으로 수십 년간 공부한 분들도 있고, 경학(經學)으로써 수십 년간 공부한 분들도 있고 그렇겠지만, 마음공부는 글자나 이론으로 배울 수 있는 공부가 아닙니다. 이게 옳고 이게 그르다고 이렇게 분별심을 낸다면 벌써 한 찰나의 살림살이를, 그것은 생각해 보지도 못하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왜 안 하면 안 되는가 하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고집멸도 사제법을 말씀하셨어요. 그랬는데 사람이 몸도 공했다고 하셨는데, 고(苦) 하나만 있겠습니까? ‘고도 공하고 몸도 공하고 물질이 다 공했으니’ 할 때는 고만 하나 없앤다면 집도 없고, 멸도 없고, 도도 없는 겁니다.
여러분 몸속에 수십억 마리가 세포를 통해서 지금 보이지 않게 나고 들고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인연들이, 그 인연들을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중생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수십억 마리가 여러분 몸속에 중생으로 있는데, 여러분의 움죽거리지 않는 근본은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근본이 있기 때문에 인과가 됐고, 인과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겁니다. 처음 인과에 의해서 하나하나 찰나찰나, 자기가 만약에 살생을 했다 한다면 살생을 한 대가로서 인연이 된 인과, 수없는 나날을 거쳐 오면서 미생물에서부터 거쳐 왔으면….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죠? 사생의 그 길을 다 거쳤다는 것을요. 사생이란 뭘 뜻하느냐하면, 화해서 낳는 것, 질척한 데서 낳는 것, 알로 낳는 것, 태로 낳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그 생명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밑에서부터 거쳐 올라올 때 얼마나 죄를 지었겠습니까? ‘안 지었다, 지었다’ 이런 말 할 게 없이 얼마나 쫓고 쫓기면서 인과의 유전과 또는 인연에 따라서 한데 모였겠습니까.
현실의 몸속에서 때에 따라서 화기가 치미는 거는 바로 화탕지옥입니다. 왜 화탕지옥이라고 했느냐하면, 인연에 따라서 그 인연이 돌면, 그 때가 되면 바로 속이 불타게 만들고, 가환이 있게 만들고, 말다툼이 생기게 하고 이렇게 부자연하게 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가환, 질병, 우환, 가난, 내 몸속에 모든 괴로움이라는 것이 다 차례로 돌아가면서 고통을 주니 거기에 속지 말라 이런 겁니다. 왜? 만약에 팔랑개비가 돌아갈 때 대를 잡고 있으면 되지 팔랑개비 돌아가는 데에 거기에 자꾸 말리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거기에 속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색색가지 차원대로 인연에 따라서 닥쳐오는 액운, 고통인데 왜 거기에서 자꾸 끄달리고 받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그걸 다가오는 대로 나온 자리에 다시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몸뚱이 속에 그 중생들이 전부 하나하나 나오면서 여러분을 괴롭힙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속고 거기에 만날 얽매이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깐 윤회에 끄달리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깨닫는다면 윤회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데 말입니다. 또는 여러분이 깨달으면 부처고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이니 이게 엄청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은어가 알 낳는 거 보셨죠? 그렇듯이 보이지 않는 데서 한생각이 잘 돌아가면 보살로 화하게 만들고, 수십억 마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털구녘을 통해서 헤아릴 수 없는 보살이 나고 들 것이고, 그렇지 않고 여러분이 생각을 잘못해서 바깥으로 끄달린다면 하나하나가 전부 악으로서 수없이 털구녘을 드나들면서 악으로만 바깥 경계 안 경계를 끄달리게 하니 어떻게 부처라고 할 수 있으며, 부처라고 하기 이전에 인간 자체 고등 동물이라고 어떻게 할 수 있으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장부라고 할 수 있느냔 얘깁니다. 그 깊은 뜻을 만약에, 한마음을 잘못 쓰면 영령들이 수십 개가 악으로다가 나가고, 마음 하나 잘 쓰면 보살이 수십억 개로다가 나고 듭니다.
그래서 한번 놓으면, 들이고 내는 거 당신이, 또는 죽이고 살리는 것도 당신이 하는 거라고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미생물에서부터 거쳐서 오면서 형성시켰고 수없이 거듭거듭 해 왔는데 자기 주인공을 모른다면 어떡합니까? 그걸 믿지 않는다면 어떡합니까? 왜 그렇게 믿어지지 않습니까? 자기가 있음으로써 자기를 알아야 하고, 자기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상대를 알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우주 천하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없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이론으로만 끄달립니다. 누가 그런 거 보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돈에 끄달리고 물질에 끄달리고 권세에 끄달린단 말입니다. 바깥의 경계에 끄달려서 헤매고 도니까 이익이 뭐 갈 게 있습니까?
주인공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진실하게 갖고 거기다 놓고 수없이 경계가 안에서 오더라도 바깥에서 오더라도 거기에 속지 말자 하는 마음으로서 다그쳐 나가고 관한다면 얼마나 이익이 오는 줄 아십니까? 한번 놓는 데 보살 하나를 화신으로서 만드는 겁니다. 진실히 믿고 한번 내려놓는 데 화신이 된다면 그 화신은 보신도 될 수 있고, 관세음도 될 수 있고, 지장도 될 수 있고 그 어떤 것이 다 될 수 있는 겁니다. 한생각에 만법이 들고 한 생각에 만법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혈을 기울이고 숭상해 주실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시고, 저녁 에 단 10분 동안이라도 관하고 좀 조용히 앉아서 모든 걸 마음에다 둥글려서 ‘주인공! 모든 일체를 들이고 내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소.’ 하고서 관해 보세요. 또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거나 오해가 생기거나, 식구들한테나 주위 아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문제가 생기걸랑 ‘주인공, 저 사람을 통해서 나를 둥글리고 다지게 해 주느라고 이러는구나. 참 저 사람이 감사하구나.’ 이렇게 돌려놓으세요. 증오하기보다 미워하기보다 감사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그 사람이 미워하기 이전에 벌써 금방 달라져 가지곤 이익을 주는 이치가 생기죠. 그러니 그렇게 한다면 미워할 사람도 없고, 증오할 것도 없고 앞뒤가 다 끊어져서 지금 현실도 그렇게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공해서 돌아가니 무엇을 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으니 ‘무(無)’ 했던 겁니다. 그러니 앞뒤도 없고 현실도 무입니다. 시공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이죠.
그러니 이 도리를 진짜로 배워서, 아니 배워서 될 일이 아니죠. 다가오는 대로 한 번 한 번 체험을 해 가면서 자꾸자꾸 용광로에다 모든 걸 넣고 가다보면 헌쇠는 녹고 새 쇠로 재생이 돼서 나오니 또 다른 물건으로서재생된 새 이름을 갖고 새롭게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생명들을, 중생들을 전부 보살로 화하게 만들어서 털구녘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상대를 전부 이익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더불어 벗어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해나가야 만이 모두가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