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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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에는 스님 되게 하소서!
552호 신행수기 下



삽화 문병성.
아직도 현봉 스님하면 기억에 남는 가르침이 있는데, 바로 스님께서 행자들을 가르치실 때 종종 “못나고 굽은 소나무가 산을 지킨다”며 당신 자신을 낮추셨던 말씀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님의 그 말씀이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말씀일 뿐 아니라 ‘중도’의 가르침까지 포함된 화두가 아닌가 싶다. 스님께서도 “너무 곧으면 나무꾼이 베어가고, 너무 무르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곧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병폐가 생기기 마련”이라고 하면서 말씀하셨던 걸로 봐서도 그런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연기’라는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겐 연기라는 말 자체가 낯설 뿐더러, 세상의 모든 현상 및 원리는 모두 연기에서 시작된다는 얘기를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세상의 모든 현상이며 원리인 연기를 알면 불교를 다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기의 의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원인에 의해 결과가 만들어지고, 다시 그 결과가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어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이기에 뭔가 특별한 심오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나에겐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것도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쨌든 스님을 통해서 이 세상은 무상(無常)하며 무상하기에 공(空)한 것이고, 무상이라는 현상의 실체이자 원리는 연기라고 하는 사실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물론 이 두 스님 외에도 가끔 행자실에 들러 힘든 것은 없는지 여쭤보시며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시던 보성 큰스님, 늘 기숙사 사감 같은 느낌의 원주스님, 지금은 돌아가신 공양간 노보살님, 같이 밥 짓고 반찬 만들던 화순댁과 고흥댁 보살님, 지금은 열반하셨지만 어쩌다 가끔씩 먼발치에서 나마 뵐 수 있었던 회광승찬 방장 큰스님 등. 속물 철철 넘치는 나를 조금 철들게 해 주셨던 분들이 지금 뇌리를 스쳐지나 간다. 솔직히 가끔은 그 분들 모두가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불보살님들이 인간 몸으로 현신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도 해볼 정도다.

주위에 너무나 큰 스승들이 많으셨기에 길지 않은 행자생활 속에서 때로는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포기할까 하는 나약한 모습도 보였지만, 결국 3개월간의 과정들을 마칠 수 있었고 그간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나와 접할 계기도 마련했다. 물론 그 모습이 본성인 진정한 나가 아닐지언정 어쨌든 허상일지라도 새로운 나를 계속해서 만나게 되면 언젠가는 진정한 나와 만날 날이 있을 거라는 확신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 송광사를 떠나오던 날 아침, 새벽예불을 마치고 짐을 싼 다음 안개가 걷히지 않은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여러 번 뒤를 돌아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던 그 상황이 눈에 선하다.

벌써 송광사에서의 생활도 15년 전의 일이 되어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물론 지금은 결혼을 해서 남편이자 아빠로, 직장에서는 관리자로 평범하게 소시민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법회에 참석 한번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길가다 문득 마주치는 사찰에서 친정집 같은 편안함을 느끼고, 법당의 부처님께서 세상 그 무엇보다 편안함을 느끼며, 가끔 뉴스에서 불교계에 경사가 나면 같이 기뻐하고, 혹 안타까운 일이 있으면 같이 분개하고 가슴 아파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 자신이고, 나의 스승이며, 나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일들이 나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주위 친구나 동료들에게 가끔 나의 소원을 얘기할 때, “지금은 처자식과 부모님 부양 때문에 어렵지만, 내생에는 꼭 스님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물론 주위의 반응들은 놀랍다는 분위기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 해도 “왜 하필?”하고 생각하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네가 생각하는 불교는 뭐냐? 내가 보기엔 종교는 다 똑 같은 것 같더라” 혹은 “불교 미신 아니냐?, 점이나 보고!” 등등 다양한 반응들을 보인다.

그에 대한 답은 생활 속에서 겪었던 일을 통해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얼마 전 사회적으로 상당한 명예와 부를 얻으신 분을 차로 모실 기회가 있었다. 처음엔 너무나 근엄하게 무게를 잡고 있어서 말 붙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차 안에서 지루한 터라 내가 먼저 말문을 텄다.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말 남 부럽지 않을 만큼 명예와 부를 얻으셔서 행복하시겠어요”하고 묻자, “그런가?”라고 하더니, “그래도 누구나 자기 몫만큼의 과거에 대한 후회와 현재의 외로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가지고 살지 않겠나”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 자신 그 분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에 그 말뜻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결론적으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최고의 가치인양 추가하고 좇아서 결국 구한다 하더라고 자기 본성을 찾아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이상, 누구나 자기의 참다운 삶이 아닌 돈과 명예와 권력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다는 얘기이며, 그러기에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도 가질 수도 없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정말 백년 한평생 동안 한 번도 진면목을 못보고 거짓 자기를 주인공으로 알고 살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불교는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봤던 사람들이 입문해야 하는 종교이다. 왜냐하면 유일신이 있어 무조건 믿 기만 하면 천국행 티켓이 주어지는 종교가 아닌 것이다. 우리 중생들이 과거 수 억겁을 윤회하면서 겪었던 생로병사의 고통을 현재도 되풀이하고 있고, 참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이상, 미래에도 계속적으로 되풀이될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에서 벋어나기 위해서는 사람 몸을 받았을 때에 하루 속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만나 참 본성을 깨우치고, 중생을 위한 보살도를 행하며, 좋은 인연공덕들을 쌓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공’과 ‘무상’ 또한 근기 약한 중생들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만나고도 돈, 명예, 권력 등 허망한 것들에 현혹되어 퇴굴심을 낼까 걱정되어 현상계의 실체를 보이시기 위한 방편설인 것이다.

지금까지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주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나름대로의 체험과 불교관을 글로 표현해 봤으나 아직 공부가 덜되고 어리석어 부족한 점이 많다. 널리 양해부탁드리며 모든 사람들이 성불하길 바란다.
서진석(인천시 남동구 간석1동) |
2005-11-10 오후 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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