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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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은 이가 없으니 이미 해탈자 아닌가"
[선원장, 禪의 원류를 찾다]4조 도신-영진 스님


호북성 황매현 쌍봉산에 접어들자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이 낯설지 않았다. 웅장한 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조사(四祖寺)는 30여 년 전 처음 발심하고 들어섰던 금산사와 다름이 없었다. 사천왕문을 지나 대불전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행자시절 예불시간에 맞춰 법당으로 향하는 그 발걸음인 듯했다. 아마도 전생 어느 땐가 여기서 이렇게 걸었던가 보다.

더웠다. 가사를 수하고 나니 땀을 화두삼아 용맹정진 하는 듯했다. 그나마 대불전 뒤편 조사전을 향하는 길은 나은 편이었다. 도량 옆으로 난 오솔길을 오르다보니 탁석천(卓錫泉)이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약수 한 모금으로 열기를 식혔다.

중국 호북성 황매현에 위치한 사조사 앞에 한국의 선원장 스님들이 섰다.
사조사의 옛 이름은 정각선사(正覺禪寺)다. 당 무덕 7년(624) 도신(道信.580-651) 조사가 창건했고, 나라에서 정각선사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창건 당시 사조사는 800칸에 1000명의 수좌들이 수행하던 대찰이었다. 1400년 세월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조사전과 몇몇 석조물만 남았다. 근래 들어 천왕전, 대불전, 관음전, 지장전, 화엄전, 조당, 장경루, 종고루 등 30여개의 전각이 복원되었고, 아직도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조사전 안에는 각종 편액과 도신 스님의 상이 모셔져있다.

“지심귀명례, 머나먼 해동의 제자들이 조사님 전에 예를 올립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동안 도신 스님에 대해서는 단지 ‘조사법맥을 이은 스님’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바랑 메고 수십 년 간 전국의 제방선원을 다니며 ‘참 마음’을 찾았지만 도신 스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식견뿐이었다. 초조 달마와 6조 혜능에 묻혔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 현지에서 만난 도신 스님은 불교 선종사 뿐 아니라 해동의 선불교에 굵직한 획을 그은 매우 중차대한 스승으로 다가왔다.

도신 스님이 법을 펴던 때는 시기적으로 수나라가 멸하고 당나라가 새롭게 들어선 어수선한 때였다. 폐불법란과 전쟁으로 명맥이 쇠약해진 선종 교단은 정각선사(사조사)가 건립되면서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4조 도신 스님을 중심으로 납자들이 모여 집단수행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3조까지만 해도 중국선종은 걸식하며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두타행이 주류를 이루었다.


해동 선불교에 한 획 그어


이번 중국 만행길에서 만난 초조 달마대사의 소림굴도 작은 동굴이었다. 실제 이조, 삼조가 주석했던 사찰도 당시에는 작은 암자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사조사를 참배하면서 대찰의 위엄을 찾을 수 있었다. 대중이 무리를 지어 수행했다는 것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했다는 것을 뜻한다.

도신 스님은 상단법문을 통해 이렇게 설하고 있다.

“노동하면서 좌선하고 좌선을 근본으로 하되 15년은 해야 한 사람이 먹을 것을 얻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느니라.”

이렇듯 도신 스님은 선농일여(禪農一如)를 주창했다. 선원의 청규로 내려오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선사의 청규보다 1백년 앞선 가르침이다.

도신 스님의 속성은 사마(司馬)이다.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에 있는 하내(河內)에서 태어나 동진 출가했다. 어려서 두 분의 스승을 모셨지만 특별히 공부에 진전은 없었다. 아직도 사미로 있던 14살(592)에 천주산에 은거하고 있던 3조 승찬 스님을 만났다.
첫 만남은 달마와 혜가의 만남만큼이나 역사적이다.

“청하옵건데, 자비를 베풀어 해탈 법문을 들려주소서.”

“누가 너를 묶어 놓았단 말인가?”

“저를 묶어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묶은 이가 없으니 이미 해탈인이 아닌가, 어째서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사미 도신은 이 한마디에 크게 깨닫고 승찬 스님 밑에서 좌선수행을 했다.

9년째 되던 해에 가사와 발우를 받고 4조가 됐다. 이후에도 열여섯 해 동안 삼조사에 머물며 후학들을 제접했다.

도신 스님은 강서성 길주를 거쳐 황매현 쌍봉산에 주석하며 30여 년 간 중생교화에 직접 나섰다.

황매산은 사공산, 천주산과 더불어 ‘선의 황금 삼각지’로 불린다. 서로 백여 리 간격을 두고 있는 이 지역에서 2,3,4,5조가 100여 년 간 선을 중흥시켰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도신 스님은 ‘서산(西山) 4조’ 스님으로 불린다. 스님이 주석했던 곳이 황매산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오조 홍인 스님은 황매산 동쪽에 주석했다하여 ‘동산(東山) 스님’으로 불린다.

3조까지 개별적으로 전하던 법은 도신 스님에 이르러 수행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퍼지게 된다.

도신 스님이 길주에 머물 때였다. 어느날 도적들이 성을 포위했다. 성안의 우물도 말라 모두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을 본 도신 스님은 성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에게 ‘반야심경’을 독송토록 했다. 그러자 신병(神兵)들이 나타나 성벽 위에서 도적들을 내려다보았다. 도적들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갔다. 더구나 말랐던 우물에서 물이 솟아 성안의 백성들이 살게 되었다. 이후 민중들은 불법을 생명과 같이 여기며 수지했다.



약서 ‘초목집성’ 저술

도신 스님은 당 태종으로부터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를 받은 의왕(醫王)이기도 하다. 사찰이 건립되고 대중이 모이자 자급자족은 물론 승단의 병(病)도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도신 스님은 직접 산에 나는 약초를 모아 ‘초목집성(草木集成)’이란 약서를 저술했으나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본초강목’에 명저로 소개되고 있어 도신 스님의 의술을 짐작케 한다.

어느날, 당 태종이 병이 났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이때 도신 스님이 약방문을 써서 장안으로 보내 태종의 병을 치료했다. 일찍이 도신 스님의 법력을 들은 태종은 세 번에 걸쳐 법문을 청한 바 있다. 그러나 도신 스님은 병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도신 스님의 약방문으로 병에서 쾌차한 태종은 더욱더 도신 스님과의 만남을 간절히 원했다.

네 번째 도신 스님을 찾은 대신이 “이번에도 스님을 모시지 못하면 목이라도 베어다 황제께 보여드려야겠습니다”며 간청했다. 그러자 도신 스님은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자, 목을 베어가시지요”했다. 대신은 뽑았던 칼을 도로 넣고 돌아가 태종에게 사실대로 알렸다. 태종은 화를 내기는커녕 그 대신을 다시 보내 조사전을 건립해 스님에게 공양토록 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선덕여왕의 부름에 “차라리 하루라도 계(戒)를 지니고 죽을지언정, 백 년을 파계하고 살지 않겠다”며 목을 베라고 했던 신라 자장율사를 보는 듯 하다. 모두가 당당하고 힘찬 수행자의 기상이다.

도신 스님의 진신상이 모셔진 사조탑
세월을 건너뛰어 바로 그 조사전에 서 있다. 흩어진 가사를 추스르니 “수행에 게으르지 말라”며 등신불마냥 앉아있는 조사상이 눈으로 말한다.

사조사에서 도신 스님을 가깝게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성지가 있다. 도신 스님의 진신이 모셔졌다고 전하는 비로탑이다.

비로탑은 사조사를 오른편에 끼고 계단을 따라 30여분을 걸어야 한다. 높이 11m, 사방 11m 단층 정방형으로 된 비로탑은 현존하는 당나라 탑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다고 한다.
내부에는 도신 스님과 좌우로 6명의 수제자 진영이 돌에 음각으로 새겨져있다.

가까이서 비문을 살펴보니 오조 홍인은 물론 우두종의 초조 법융에 이어 ‘신라 법랑(法朗)’이란 글귀가 눈에 띄었다. 뜻밖이었다. 머나먼 중국 땅에서 신라 선인을 만나니 마음이 설랬다. 황급히 한발짝 물러서 합장 배례했다.

법랑 스님은 불교를 공부하고자 당나라로 유학했다. 도신 스님 문하에서 마음공부하고 신라로 돌아가 법을 전했다. 법랑 스님에 의해 신행-준범-혜은-지선 스님으로 이어진 법은 후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암사 희양산문을 열게 된다. 최초의 산문인 가지산문을 연 도의 선사보다 백년가까이 먼저 4조 도신 스님의 법맥이 해동에 전해졌던 것이다.

법랑 스님이 받은 법은 무엇일까? 도신 스님의 가르침 가운데 정수는 ‘하나를 지켜 움직이지 않는다(守一不移)’는 것이다.

도신 스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텅 비고 맑은 눈으로 한 물건을 주의 깊게 바라보아 밤낮으로 끊임없이 오로지하여 항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 마음이 흩어져 달아나려하거든 급히 다시 거두어 껴잡을 것이니, 마치 새의 다리를 잡아매어 날아가려 하면 다시 당겨서 붙드는 것과 같다. 종일토록 쉬지 않고 보면 모든 것이 사라져서 마음은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신라 법랑 스님도 제자

도신 스님은 공부가 익은 수행자뿐 아니라 초심자에 대해서도 자상한 가르침을 폈다.

“처음 좌선하여 마음 보기를 배우는 경우 홀로 한 곳에 앉아 먼저 몸을 단정히 바로 앉을 것이며, 옷과 띠를 헐렁하게 하고 온몸을 느긋이 놓아버리고 몸을 일곱 여덟 번 쓰다듬은 다음, 뱃속의 공기를 토해내 버리면 물이 차오르듯 하여 맑고 비어서, 고요하고 몸과 마음이 잘 조절되어 마음과 정신을 능히 안정시킨다”
비로탑 안의 도신 스님이 좌우에 자리한 제자들에게 법문을 들려주는듯 하다. 그것은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일러주듯, 직접 자리에 앉아 설명하듯 조목조목 상세하고 자애롭다.

비로탑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은 한국의 모악산에서 금산사를 내려다보듯 했다. 산 아래 사조사가 보이고 툭 터진 시야가 시원하다.

그렇지만 사조사로 내려오는 계단 길은 지친 몸만큼이나 마음도 착잡했다. 이번 중국 만행길은 살아있는 4조 도신 스님의 법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문화혁명 때 파괴된 사찰은 천편일률적으로 복원되어 관광지화되고 살아있는 ‘조사가풍’은 찾기 어려웠다.
안내를 맡은 사조사의 젊은 스님에 따르면 “사조사에 30여명의 스님이 하루 4시간씩 정진한다”고 한다.

그 스님은 수행자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듯 했다. 젊은 수좌의 강렬한 눈빛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중국불교의 기상을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인연이 있어 사조사를 다시 참배한다면 그때는 저 수좌와 도반이 되어 다리 꼬고 한 철 나고 싶다.


영진 스님
1972년 김제 금산사에서 현 조계종 포교원장 도영 스님을 은사로 출가. 용봉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석암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출가이후 봉암사 해인사 통도사 백담사 무금선원, 은해사 기기암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에만 몰두해오고 있다. 99년부터 3년간 조계종 기초선원장 겸 동화사 금당선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전국 선원대표자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정리=이준엽 기자ㆍ사진제공=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
2005-11-04 오전 1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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