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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게 보면 이 우주엔 수많은 생명 현상이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순환 속에 별과 행성이 탄생하며 비로소 지구와 같은 생명의 푸른 숲이 생기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가 나오고, 무수한 생명현상의 '연기적 집합체'가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되며 생명 현상의 무수한 시공간적 이합집산의 결과가 생명인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 창조도, 에너지 공급이 안 될 땐 미동도 않는 차가운 터미네이터 같은 존재가 인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따뜻한 생명 현상이 곳곳에 넘치는 전(前) 인간적 존재가 신의 은총으로 비로소 생명의 존재로 전환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순리적일 것이다.
현재 문제가 되는 사항은 크게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배아를 파괴하는 것이 곧 바로 생명의 파괴인가? 둘째, 인간 복제의 우려이다. 기독교에서는 생명을 수정 순간으로부터 보기 때문에 배아 파괴는 명백한 살인이라는 것이다.
그럼 과연 불교의 입장은 어떨까? 불교에서는 육신 그 자체를 결코 생명으로 보지는 않는다. 반드시 육신에 마음(識, 일종의 영혼)의 결합이 있어야 하는데, 이 사실은 '송장도 눈이 있는데 왜 못 보느냐?'는 불경의 경구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되는 것은, 과연 마음이 언제 육신에 결합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수정란 자체에는 마음이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수정란 자체는 생명 현상일 뿐이요 생명이 아니다. 따라서 하등의 윤리 문제가 제기될 수 없다. 필자가 알기로 불교에서는 크게 수정 후, 임신 중, 출생 직후의 세 시기에 마음이 육신과 결합하는 것으로 말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 두 가지는, 인간 생명체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불교의 경론은, 첫째, 수정체가 반드시 정자와 난자의 결합일 것, 둘째, 어머니 태중에 안착이 된 상태일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경론이 만들어질 때엔 현대와 같은 복제 상황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가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복제배아는 핵 이식 과정에서 태아로 발달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든가, "복제배아가 성장능력이 없다"는 등의 현대 과학의 연구결과를 보면 인간의 탄생 조건은 보다 엄격한 정자-난자의 결합이 전제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정자-난자의 결합이 아니면 동물은 몰라도 인간은 탄생되지 않는 것이다.
자궁의 착상 여부는 생명의 정의에 대단히 중요한데, 이 역시 경론에는 두 가지 형태로 설명된다. 하나는 인간의 탄생, 성장을 설명할 때 경론은 반드시 태(胎)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점, 또 하나는 무소불위의 영혼이 통과 못하는 장애물로 '부처님 품'과 '어머니 자궁'을 드는 점이다.
실제 시험관 아기의 성공에도 자궁의 착상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수정란의 자궁 착상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우므로 많은 수정란이 필요하며, 일단 착상이 성공하면 남은 수정란은 버려지게 된다(사실 이렇게 폐기되는 수정란이 현재 배아 복제의 주요 공급원이다. 버릴 수정란으로 난치병 치료에 쓰일 배아를 만드는 것임). 수정란 자체가 생명은 아니라는 사실은 유정란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유정란 자체는 생명이 아니며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부화'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닭은 난생(卵生)이므로 부화가 필요한데, 인간 같은 포유류는 태생(胎生)이므로 따라서 자궁의 안착은 필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궁 착상이 일어나기 전에는 마음과 육신이 결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즉, 수정란은 '생명 현상'이지 '생명'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인간 복제에 관해서는 복제가 과연 가능한가 아닌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 세상에 100 % 똑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제한된 시공간과 거시적 세계에서만 겉보기에 비슷하게 보일 뿐, 더 넓은 시공간, 또는 아주 작은 미시적 세계에서는 완전히 같은 것이란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더구나 마음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더 복잡해진다. 어제의 강물이 오늘의 강물이 아니듯, 어제의 내 마음조차 오늘의 내 마음이 아닌데 어찌 복제 인간이 동일 인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불교는 유아 윤회가 아니라 철저히 무아 윤회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무아 윤회를 하는 모든 존재는, 그 상태에서 모두 각각의 절대 존엄을 가진다는 것 역시 불교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이다. 비록 가지치기에서 새 가지가 복제되더라도 그 둘은 분명 다른 것이다. 복사기에서 똑같은 그림이 복제되더라도 낱낱의 그림은 각자의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이 불교의 시각이다.
문명의 이기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문명이 갖는 태생적 한계이다. 그러한 문명의 이기를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쓰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그와 함께 성장하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력으로 극복할 문제이며 인류는 그러한 지혜를 이미 충분히 증명한 바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부정적 부분을 우려하여, 무한한 가능성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끝으로, 윤리 논쟁의 근저에는 생명은 창조주의 영역인데 왜 인간이 도전하느냐는 유신론, 창조론적 사상이 강하게 깔려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우리의 자랑스러운 황우석-안 규리 교수팀이 더 이상 이런 소모성 논쟁에 에너지를 뺏기지 말고, 우리 이웃들의 행복을 위한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끔 우리 모두가 도와 드렸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져봅니다. 아울러 우리 불교계도 보다 더 명확한 논리적 근거로 두 분의 노력을 적극 지원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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