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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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장, 선의 원류를 찾다 - 천주산 삼조사
3조 승찬 조사 : 설우 스님(청주 법인정사 선원장)


혜국스님과 설우스님(오른쪽)이 승찬스님이 서서 입적했다는 입화탑 앞에 서 있다


흥분되고 설레었다. 그렇게도 와보고 싶었던 천주산(天柱山) 삼조사(三祖寺)가 앞에 있다. 20년 전 육조사를 답사했을 때 미처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이번에 훌훌 털어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삼조사가 어떤 곳인가. 조사선의 근간이자 요체로 꼽히는 <신심명>을 저술한 승찬(僧瓚) 스님(?~606)의 선기가 서려있는 곳이 아닌가.

중국 선종 중요 사찰 답사길의 마지막 하루 전날인 9월 20일, 안휘성 안경시 잠산현의 천주산에 올랐다. 천주산은 옛날 중국을 대표하는 5악 중 한 곳으로 경치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천주산에 오르기 전 안경시를 지나오면서 소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발이 되지 않은 전형적인 시골 풍경의 운치는 또 다른 맛을 풍겼다.

승찬 스님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다. 하북성 출신이라는 것 외에 속성과 출생연도는 현재까지 미상이며, 행적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나병을 앓다가 2조 혜가 스님을 찾아왔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달은 뒤 이곳 천주산에서 수행을 하며 법을 펴다가 열반에 들었다는 기록, 그리고 중도의 법을 설한 <신심명>을 저술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승찬 스님이 실존인물인가에 대한 논란도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승찬 스님이 실존인물임은 분명하다.

설우스님이 삼조굴에 모셔져 있는 승찬 스님의 영정 옆에 서 있다


삼조사는 계단식으로 돼 있는 사찰이다. 반야문 정진문 해탈문 세 개의 문 위에 걸린 건원선사(乾元禪寺)라는 현판이 삼조사를 찾는 방문객들을 맨 먼저 맞는다. 이 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다보면 삼조선사(三祖禪寺)라는 현판이 걸린 입구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오르면 산곡사(山谷寺) 현판을 볼 수 있다.
삼조사의 원래 이름은 산곡사(山谷寺)다. 양무제가 양나라 고승인 보지(寶誌)화상의 요청으로 이곳에 절을 짓고 산곡사라는 현판을 내렸다. 승찬 스님이 산곡사에 머물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00~150년이 지난 뒤다.

산곡사 현판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오르면 승찬 스님이 서서 입적했다는 입화탑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보지화상이 참선을 했던 보공동이라는 동굴이 있고, 인근에 바로 승찬 스님이 수행했다는 삼조굴과 묘탑인 삼조탑이 있다. 삼조탑 벽에는 <육조단경>에 나오는 6조 혜능 스님의 ‘무상송(無相頌)’이 새겨져 있다. 무상송은 불법과 세속법의 일치를 통해 생활불교와 실천불교를 강조한 혜능 스님의 법문이다.

“스님, 어디 계십니까?”
삼조탑 앞에서 승찬 스님을 불렀다. 당 현종 서주 별가(부지사) 이상후가 승찬 스님의 유골을 다비한 뒤 3백과의 사리를 수습해 이중 1백과는 조정으로 보내고, 1백과는 승찬 스님의 생가에 모시고, 나머지 1백과는 사리함에 넣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삼조탑은 이렇게 승찬 스님의 육신이 묻혀있는 곳이다. 삼조탑에서 우리 일행은 도량 마당에 엎드려 절을 하고 기도를 했다.

"몸에 풍질(風疾: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풍질을 앓게 된 저의 죄를 참회케 해 주십시오."
"죄를 가져오너라. 죄를 참회케 해 주겠노라."
"죄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죄는 모두 참회되었느니라. 그저 불법승에 의지해 안주하라."

9월20일 삼조사를 방문한 조계종 선원장 스님들이 3조 승찬스님의 묘탑인 삼조탑을 참배하고 있다


승찬 스님의 대답 대신 승찬 스님이 혜가 스님과 나눈 선문답이 들려왔다. 승찬 스님이 2조 혜가 스님을 찾아가 불쑥 물었던 '죄'를 생각했다. 그때 승찬 스님의 나이가 40세 정도였다고 하니 수명이 길지 않았던 당시,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나병으로 힘든 생활을 했었을 스님의 고통이 느껴졌다. 무슨 죄가 많기에 나병을 앓게 되었느냐며 죄를 참회케 해달라고 했을 때에는 그 병으로 인한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본질적으로 자기성찰이 집요하게 화두로 자리잡았을 터, 혜가 스님을 찾아왔을 때는 절대절명으로 혜가 스님에게 귀의한다는 발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찬 스님의 아픔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나도 한 때 병으로 고통을 받았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마저 포기했을 때 느껴졌던 절망감. <신심명>을 품고 살며 건강을 추스렸던 지난 시절, 나 역시 얼마나 깊은 고뇌와 발심이 있었던가.

승찬 스님은 혜가 스님을 2년 동안 시봉하며 병도 치유하고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모든 병이 일어난다는 것은 욕심과 욕망 때문이며 그 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여겼던 승찬 스님. 나병이 나은 것은 혜가 스님으로부터 정견(正見)을 얻어 본래 업이 없는 이치를 알게 된 때문이다.

우리네 인간사를 떠올려본다. 병의 근원은 정신에서 오는 것이고, 그 정신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본래 없는 자리로 돌아가는 근본을 아는 것이니, 선의 생명은 일정한 틀이 없는 것이다. 종교의 진정한 생(生)의 열기는 사상적 새 삶의 활로이며, 그것은 연기적 삶 그대로 신선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런 가르침을 담고 있는 조사선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삼조사로 들어가는 첫 문앞에서 선원장 스님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법은 이렇게 참으로 인간적이다. 서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편안한 것이다. 법이라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지만 법의 바탕에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함축돼 있다. 사람을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그리고 사람의 본래자리는 해탈돼 있음을 그 옛날 혜가 스님과 승찬 스님은 말한 것이다.

승찬 스님이 수행정진했다는 삼조굴에 들어서니 승찬 스님의 영정이 눈에 들어왔다. 승찬 스님은 많은 행화(포교)를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승찬 스님은 본래 나병을 앓아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어 적두찬(赤頭瓚)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삼조사 기록에는 승찬 스님이 거의 동굴에서 살았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나병으로 인해 변해버린 외모가 포교보다는 선 수행에 매진케 한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삼조굴 바로 앞에는 '해박석(解縛石)'이라고 음각하고 빨간색으로 페인트칠을 해놓은 널따랗고 평평한 바위가 누워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속박을 풀어준 바위'라는 뜻인데, 이곳이 바로 승찬 스님과 승찬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4조 도신 스님(580~651)이 선문답을 주고받은 곳이다.

"청하옵건데 해탈법문으로 이 몸의 속박을 풀어주시옵소서."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는가?"
"저를 묶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이미 자유롭다. 그런데 어찌해 해탈을 구하고 있단 말이냐."

인간 존재의 밑바탕인 자성(自性)은 본래 속박된 일이 없다는 절대적인 자유를 말한 그 유명한 '수박여(誰縛汝)'라는 화두가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우리의 본래 자리는 속박된 적이 없으니 해탈을 구할 필요조차 없이 자성 그대로가 해탈이요 부처임을 일깨워 준 안심법문이다.

삼조사는 꽤 조용하고 깨끗했다. 이곳에는 스님이 20여 명 가량 있다고 한다. 마침 마당을 쓸고 있는 스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이곳 스님들은 승찬 스님의 법을 잇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향객(香客:신도)과 관광객들에게 승찬 스님에 대해 설명을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승찬 스님을 추모하는 의식과 행사도 연다. 이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신심명(信心銘)>이다. 이곳 스님들은 모두가 <신심명> 이야기를 한다. 내게도 <신심명> 책 한 권을 건넸다. 삼조사에서는 승찬 스님은 <신심명>이고 <신심명>은 곧 승찬 스님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至道無難)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唯嫌揀擇)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但莫憎愛)
통연히 명백하리라(洞然明白)

<신심명>은 4언절구로 해서 146구 584자로 되어 있는 간단한 글이지만 선과 교를 막론하고 양변을 여윈 중도(中道)가 불교의 근본 사상임을 표현한 불후의 명저다. 이렇게 짧은 글 속에서 조사선의 요체를 담아냈다는 것은, 승찬 스님의 일생이 스스로 지혜로서 자성을 회광반조하는 생활선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승찬 스님이 나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런 불후의 명저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승찬 스님의 삶은 혜가 스님을 찾아오기 전부터 삶 자체가 수행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신심명> 가운데에서도 정수는 앞의 네 구절이다. 지극한 도는 우리가 본성을 알고자 한다면 그 정체는 어려운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가까운 곳에 현실로 드러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우리가 양변적인 원리, 즉 이원론에서 움직이고, 그 이원론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실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래서 다시 집착이 생기는 것일 뿐이다. <신심명>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은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중생심은 허상이고, 참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님을 <신심명>은 일깨워준다. 본성자리는 본래 부동한 자리에서 인연을 수순하면서 어느 한 곳에 머무르는 자리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정견이고, <신심명>에는 그 정견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信心不二)
둘이 아님은 믿는 마음이니(不二信心)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言語道斷)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로다(非去來今)

<신심명>의 마지막 구절이다. 마음을 믿는 것은 본래 성불을 믿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부처라는 것이다. 본래부처를 믿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면서 확신하라는 것이다.

선방을 다니던 시절 내 걸망 안에는 늘 <육조단경> <채근담>과 함께 <신심명>이 들어있었다. 아침에 <신심명>을 외며 도량석을 한 것도 꽤 오랜 습관이었다. 후학들을 위해 많은 강의를 하고 있지만 그 때마다 꼭 <신심명>을 강조한다. 적어도 수좌라면 <신심명>은 외고 있어야 한다. <신심명>만큼 중도(中道)의 실상을 잘 드러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신심명>은 정견을 바로 서게 하는 힘이 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지극한 도는 본래 갖춰져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볼 수 없는 것은 간택을 했기 때문이다. 없는 것에 의미를 붙이고 이름을 붙이는데서 시비가 생기고 스스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간택심과 분별심을 버려라. 그러면 본래 그대로다. <신심명>이 말하는 본래자성이야말로 수행자가 반드시 마음에 새기고 찾아야 할 좌우명이다.

승찬 스님은 선 채로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입화탑(立化塔) 앞에 서니 승찬 스님의 체취가 느껴진다. 승찬 스님은 이 나무 밑에서 대중설법을 마치고 나서 합장한 채 서서 입적했다. 원만구족하지 못한 형상 때문에 사람들에게 드러나 포교하기가 쉽지 않아, 은자로서 정적인 삶을 사셨다고 전해진다. ‘스님은 정적인 삶 속에서도 항상 동적인 삶을 함께 갖춘 중도의 정신을 보이려고 서서 입적하지 않으셨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입화탑에는 승찬 스님의 그런 인간적인 고뇌와 그 고뇌를 법으로 승화시킨 원력이 담겨 있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삼조사를 나섰다. 삼조사 앞을 흐르는 강 ‘잠하(潛河)’는 여전히 묵묵히 흐르고, 유유자적한 안경시의 시골풍경은 한가로이 하품을 하고 있다. 물이 깊으면 산도 깊은 법. 육조사 중 삼조사가 개발되지 않은 이유는 천주산의 깊이와 천주산의 주인이었던 승찬 스님의 법의 깊이가 그만큼 깊기 때문이리라.
오늘날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 가운데 교육이 미흡하고 제도가 온전치 못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 당연한 지적이다. 그러나 먼저 승가공동체의 근원적인 정신의 활로를 여는 총체적 생명의 물결이 흐를 수 있는 정신적 수행풍토가 일어나기를 발원해 본다.
천주산 자락이 멀어져갔다. 하지만 희미해지는 천주산 자락에서 나는 보았다. 승찬 스님이 설한 대자유인이 되는 길이 거기에 나 있음을.



*설우 스님은


1951년생으로 71년 상주 원적사에서 원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수도암 도성암 등지에서 정진하며 25안거를 성만했다. 조계종 <간화선 수행지침서>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게종 교육원 교육제도개선위원회 위원ㆍ승가고시 위원ㆍ기본선원 교선사를 맡고 있다. 청주 법인정사 선원장으로 있으면서 후학양성에 매진 중이다.
정리=한명우 기자/ 사진제공=전국선원수좌회 |
2005-10-26 오후 2: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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