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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의 꿈 이루는 그날 올 때까지...
양주 회암사지 지킴이 방청석씨


20여년간 복원 홍보, 유물보고서 발간 참여, 주변정리 등에 앞장

산불 예방 위해 의용소방대 조직

폐사지 콘서트서 지킴이 1호 선정

학생들 위한 탐방 프로그램 계획


향화(香火)가 끊긴 지 이미 오래다. 사람들 뇌리에는 대가람의 어떤 잔상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기억 속에 잊혀져버린 부처님의 땅. 때맞춰 찾아오는 신도도, 어깨를 스칠 인연도 없어, 지내온 사연을 물을 수가 없다.

폐사지 지킴이 1호로 선정된 방청석씨.
하지만 알아야 했다. 아니 알고 싶었다. 어렸을 때 벌에 쏘이며 뛰어다녔던 그곳이 ‘절터’임을 알게 된 후부터, 더 이상 그곳은 뒷산 돌밭 놀이터가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들의 원력이 내려오는 도량이기 때문이었다.

양주 회암사지를 20년 넘게 지켜온 이 지역 토박이 방청석씨(44). 조선시대 국찰로서 위용을 떨쳤던 회암사지에 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가슴은 벅차오른다. 그래서 일까? 매년 여름에 무거운 제초기를 메고, 함부로 일가를 이룬 달개비 꽃넝쿨과 잡초를 들어내고 베어내는 고된 일이 힘들지 않았다. 1996년부터 회암사지 발굴이 시작될 때, 수시로 발품을 팔며 발굴현황을 꼼꼼히 챙겨도 수고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아침 일찍 안개가 내려앉은 회암사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요. 4백여 년 전, 스님들의 염불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고, 새들이 처마 끝에서 앉아 우는 것 같아요. 스무 해 넘게 회암사지는 그렇게 저를 불러 들였고, 저는 회암사지와 말없이 대화를 했죠.”

방씨와 회암사지의 인연. 1992년 결성된 양주 회천청년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역 청ㆍ장년 일꾼들이 회암사지를 경기 북부지역 주민들의 정신적 귀의처로 조성하겠다는 복원운동을 회천청년회가 펼치면서부터다. 청년회 상임부회장을 맡았던 방씨는 당시 회암사지 복원 홍보 스티커 자체 제작, 유물보고서 발간 참여, 담장 설치, 주변 정비 등의 청년회 활동을 주도했다.

“지역 주민들에게 회암사지는 뒷동산 쉼터였어요. 아예 절터란 개념조차 없었지요. 머리가 깨진 불상의 머리는 돌담 밑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도, 청기와 청화백자들이 부서진 채 땅 바닥을 나뒹굴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죠. 정말로 안타까웠지요. 그래서 지역 행사가 있을 때마다 청년회가 직접 만든 회암사지 영상물을 보여주며 귀중한 문화재임을 알려줬어요.”

늘 작업복 차림으로 회암사지와 양주 지역을 누볐다는 방씨. 사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회암사지의 중요성도 인식하지 못한 주변 사람들은 그를 극구 말렸다. 조그만 꽃집을 운영하는 방씨에게 ‘돈도 되지 않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그렇게 한가하면 어디 가서 품앗이라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겠냐’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방씨는 이런 주위의 눈총에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며 회암사지 복원활동을 했다.

왜 그토록 방씨는 회암사지에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을까?
“폐사지는 조선시대 배불정책이 가져온 불교의 아픔입니다. 어쩌면 현재 불교의 모습일 줄도 모르죠. 그대로 방치한다면 아픈 상처가 되고, 복원하면 그 아픔을 딛고 불교 발전의 터전을 다질 수 있다고 확신해요.”

회암사지에 대한 방씨의 끝없는 애정. 회암사지를 제대로 알고 복원하기 위해 방씨는 역사사료를 뒤지고, 전문가들을 찾아 다녔다. 회암사의 위용을 목은 이색의 <회암사 주조기>를 통해 확인했고, 문화재 가치를 가늠할 안목을 갖으려고 전문서적을 탐독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로 파악된 회암사지 6단지 서승당 구들터의 진가를 알아볼 생각으로, 경남 하동 칠불사 아자방(亞字房)도 답사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오던 10월 21일. 방청석씨는 한창 발굴 중인 회암사지가 눈에 밟혔다. 비 때문에 혹시 기단석 아래 토양이 유실되지 않았는지 발길을 이곳으로 돌려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회암사지의 완벽한 보호를 위해 소방자원봉사 모임인 의용소방대를 조직했다. 회천청년회원들과 조직한 이 단체를 통해 화재로부터 회암사지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자청했다. 방씨의 이런 노력들이 부처님에게도 통했을까? 6년 전 회천군 일대에 일어났던 큰 산불에도 회암사지는 온전했다.

“산불소식을 듣고, 다듬던 꽃다발을 놓고 곧장 회암사지로 달려갔죠. 산불은 회암사지 인근의 소나무를 죄다 삼켜버리고 있었어요. 바람도 장난이 아니었어요. 사방으로 불씨가 날려 보내는데, 행여 회암사지로 불길을 옮길까봐 노심초사했죠. 그런데 산불은 회암사지로 근접도 하지 못했어요. 보이지 않는 회암사지 호법신장들이 불길을 막아낸 것 같아요. 감탄이 절로 났었죠.”

방씨의 이런 활동은 입 소문을 타고 최근 전국의 폐사지복원에 앞장서고 있는 문화복지연대(상임공동대표 김종엽)로부터 ‘회암사지 지킴이’로 위촉받게 했다. 올 10월 16일 회암사지 앞마당에서 열린 ‘전국폐사지 투어콘서트’ 현장에서 첫 번째 ‘1호 폐사지 지킴이’로 선정된 것이다.

“영산재 북 소리와 스님들의 복원 기원에 눈물을 흘렸죠. 3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을밤회암사지에 한꺼번 모여 회암사지 복원의 뜻을 한 마음으로 염원하니까, 그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가더군요. 순간, 상상만 했던 261칸 회암사 가람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다시 회암사지를 깨우는 느낌이랄까요? 벅찬 감동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회암사지에서 ‘텅 빈 충만감’을 경험한다는 방씨. 절터만 남아 있어 무한한 상상을 펼치며 늘 과거 역사와 대화한다는 방씨는 야무진 회암사지 복원 활동 계획을 밝혔다. 우선 회암사지 발굴 과정과 발굴로 인한 2차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모니터링해 문화복지연대 홈페이지(www.jgo.or.kr)에 연재할 생각이다. 또 지역 초ㆍ중ㆍ고 학생들에게 회암사지 탐방 프로그램도 마련해 불교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기회도 줄 계획이다.

태조 이성계가 상왕으로 권좌에 물러나 머물었던 회암사지. 아직도 대가람의 자취는 그대로 남아있다.
양주 회암사지는 어떤 곳?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다. 지공 나옹 무학 등 당대 걸출한 선지식을 비롯해 3천여 명의 스님들이 용맹정진했던 대가람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조 이성계가 상왕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말년에 권력의 무상함을 되새기며 위로받았고, 이 때문에 청기와, 분청사기 등 왕실의 살림살이가 발굴 사지 10만여 평 곳곳에 묻혀 있다. 그래서 회암사지를 일러 ‘노천 자연불교역사박물관’이라 불리고 있다. 사적지정은 1964년에 됐다.

경기 양주/글=김철우ㆍ사진=고영배 기자 |
2005-11-11 오전 9: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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