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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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조계종 총무원장 어떤 자리?(4)
80년대 이후 총무원장들, 25년간 18명 자리 이어와
법난ㆍ분규 겪으며 '개혁' 주체로


‘도전과 응전의 시대.’ 1980년~2005년은 한국불교사에서 격동의 시대였다. 한국불교는 교계 안팎에서 비롯된 법난과 분규란 충격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조계종 총무원장이란 자리는 바로 그 한가운데 위치했다. 종단이 80년 10ㆍ27법난, 94년과 98년 분규를 겪는 동안, 총무원장 자리를 거쳐 간 스님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밀려나거나 민주화 흐름과 함께 집권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 과정 속에서 한국불교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실망‘을 함께 보여주었다. 94년 자체적인 개혁이 시작된 후 한국불교는 사회 속에서 나름의 목소리를 찾아가려고 노력했다. 최근 불교계를 중심으로 활발히 벌어진 환경운동 등 시민운동도 이 연장선 위에 있다.

17. 28대 총무원장 월주 스님.

권한대행 탄성 스님.

18대 성수 스님.

20대 법전 스님.


<조계종사 근현대편> 집필자인 박희승 씨는 “80년대 불교계의 주요화두는 ▲종단 민주화와 자주화 ▲대중적인 참여에 대한 합리적인 수용 등이었고, 90년대 중반 이 문제들은 구체화될 계기를 맞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총무원장은 이런 흐름을 끌어안고 종단 민주화와 자주화, 승가교육체계 정비 등을 위해 노력하길 요구받았다. 박씨는 “90년 후반 불교의 사회참여가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총무원장은 종단의 대표자뿐만 아니라 사회 지도자라는 의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뿌리내리게 됐다”고 덧붙였다.

1980년 초 한국불교는 모처럼 맞은 화해 무드를 만끽했다. 3년 동안 지속된 개운사측과 조계사측의 분규가 극적으로 타결됐다. 그러나 제17대 총무원장(재임 80.04.26~80.11.08)에 선출된 월주 스님은 군사정권에 의한 10ㆍ27법난으로 중도하차했다. 이후 권한대행 탄성(80.11.08~81.01.16), 18대 성수(81.01.16~81.06.10), 19대 덕진(81.06.10~82.01.07), 20대 법전(82.01.07~82.04.06), 21대 진경(82.04.06~83.09.03), 22대 서운(83.09.08~84.01.23), 23대 석주(84.01.23~84.08.01), 24대 녹원(84.08.01~86.08.25), 25대 의현(86.08.25~90.08.26), 26대 의현(90.08.26~94.04.18), 27대 탄성(94.04.18~94.11.25), 28대 월주(94.11.25~98.11.20), 권한대행 도법(98.11.20~98.12.29), 고산(98.12.29~99.10.18), 권한대행 원택(99.10.18~99.11.23), 3대 정대(99.11.23~03.01.15), 권한대행 선용(03.01.15~03.02.24), 31대 법장(03.02.24~05.09.11), 권한대행 현고(05.09.11~) 스님 등 18명 스님들이 1980년 4월부터 25년간 총무원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총무원장의 평균 재임기간은 1년을 조금 넘기고 있다. 재임에 성공했던 의현 스님을 제외하면 녹원ㆍ정대ㆍ법장 스님 등도 4년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10ㆍ27법난과 94년 종단개혁ㆍ98년 종단사태 앞뒤로 임기 1년 미만의 ‘단명 총무원장’의 체제가 7번이나 지속됐다.

24대 녹원 스님.

29대 고산 스님.

30대 정대 스님.

31대 법장 스님.


탄성 스님은 총무원장 권한대행을 두 번이나 맡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2개월과 7개월 간 종무행정을 책임졌지만 조계종의 변화와 개혁에 많은 공헌을 했다. 80년 10ㆍ27법난 직후 수좌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총무원장 중심제 등 종헌종법 개정을 매듭지었으며 94년 종단개혁 직후에는 현행 총무원 포교원 교육원 3원 체제, 교구자치제, 총무원장 선거인단제도 등 제도개혁을 이끌어냈다.
탄성 스님은 소임이 끝나면 수행현장으로 돌아가는 모범을 보였다. 그래서 짧은 재임기간에 비해 오랫동안 불자들의 기억 속에 남는 총무원장이 되고 있다.
횡성 죽림산사 회주 선혜 스님은 “탄성 스님은 종단이 어려울 때마다 총무원장을 맡아 공심으로 종무를 처리했다”고 평가했다. 선혜 스님은 또 “고산 스님은 계율에 밝고 살림을 잘해 종단 안팎의 기대를 받았지만 뜻을 펴보지 못한 채 낙마했다”고 아쉬워했다.
의현 스님과 월주 스님을 80ㆍ90년대 총무원장 지위를 둘러싸고 직ㆍ간접적인 악연(?)을 맺고 있다. 월주 스님이 군사정권에 의해 자리를 빼앗겼다면 의현 스님은 군사정권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사상 첫 총무원장 재임에 성공했다.
두 스님은 또 ‘3선 시도’로 종단사태를 촉발시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의현 스님의 3선 시도는 94년 종단개혁의 촉매가 됐고 월주 스님의 3선 시도는 98년 종단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의현 스님은 불교방송 출범과 중앙승가대 4년제 정규대 승격에 기여했으나 94년때 멸빈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뒤를 이어 월주 스님이 곧바로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월주 스님은 종단 민주화와 불교이미지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깨달음의 사회화’란 슬로건을 내세우고 불교의 사회적 위상 정립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대 스님은 98년 사태 이후 뒤숭숭한 종단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스님은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 종단 안정화에 기여했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건립이 두드러진 성과다.
최근 열반한 법장 스님은 불교복지 활성화와 한국불교 세계화에 원력을 세우고 대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펼쳐 불교위상을 크게 높였다.

조계종 제32대 총무원장 선거 홈페이지 가기
강유신 기자 |
2005-10-24 오전 10:57:00
 
한마디
명주 좋은 하루되세요
(2011-03-03 오전 9:07: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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