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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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 잘라 법을 구한 혜가 대사의 가르침
선원장, 선의 원류를 찾다 2- 의정스님(용문선원장)이 본 이조암

소림사 달마굴. 혜가스님의 단비구법의 현장이다.


이조암(二祖庵) 가는 길. 걷고 싶었다. 날씨는 더운 편이었지만, 이조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걷고 싶었다. 10여리 길이라니 걸어서 1시간 반이면 될 듯 했다. 걸으면서 이조 혜가 스님을 생각하고 싶었다. 지금으로부터 1520년 전에 태어나 108세를 살다 갔지만, 후대의 수행자들에게는 단비구법(斷臂求法)의 커다란 가르침으로 영원히 살아 있는 큰 스승을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빠듯한 여행 일정은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케이블카를 타는 편리함을 제공해 주었다.

의정 스님(상원사 용문선원장)의 이조암 답사는 느긋한 걸음이 아닌 케이블카(스키장의 리프트 카처럼 생긴)의 신속함으로 시작됐다. 선의 원류를 더듬어 떠난 여행의 사흘째 되는 날, 9월 10일이었다. 이조암은 소림사 서남쪽의 발우봉(鉢盂奉) 아래 있었다. 소림사에서 달마굴로 오르는 도중에 이조암을 들렀다 가는 코스였다. 케이블카가 위로 오르는 동안 멀리 혹은 가까이 조망되는 경치가 시원스러웠다. 의정 스님은 이조암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설레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현대사회에서 선객으로 사는 일도 예전과는 다르다. 많은 것이 편리해진 만큼, 정신은 나태하고 유약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때 수행자들에게 혜가 스님의 구법의지는 청천의 벽력같은 가르침이 아니고 무엇인가? 면벽을 하고 앉은 스승을 향해 서서 오로지 법을 구하던 대장부, 눈이 내려 무릎을 덮어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구법의 불길을 활활 태워 몸을 덥히고 서 있다가 “천하에 붉은 눈이 내릴 때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스승의 한마디에 팔뚝을 쓰윽 잘라 바치던 초인. 바로 그 혜가 스님의 행적지를 1500년 후의 제자가 찾는 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소림사 입설정. 초조부터 5조까지의 상이 모셔져 있다.


전국 선원을 다니면서 정진에 몰두하던 시절, 어쩌다 몸이 아플 때면 늘 혜가 스님을 생각했었다. 정진이 잘 안되면 의례 혜가 스님의 단비구법 이야기를 떠 올리며 마음을 추스르던 의정스님에게 이조암 답사는 남다른 기대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팔뚝을 잘라 법을 구함. 그렇게 적극적이고 뜨겁게 표현된 구법의지가 또 있을까? 단비구법의 감동이 <본생담>의 설산동자 이야기만큼이나 큰 울림으로 다가 오는 것은 바로 동토(東土)로 전해진 선불교의 정점에 혜가 스님이 있기 때문일 터.

이조암은 아담한 전각 하나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앞에는 원나라 때 축조됐다는 6각 전탑이 뒤에는 당나라 대의 4각 전탑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주변에 눈을 돌릴 겨를도 없이 의정 스님이 먼저 들어 간 곳은 법당. 혜가 스님의 좌상이 모셔져 있었다. 금칠을 한 소상에 다시 옷을 입혔는데 오늘날 중국 법당의 전형이었다. 이조의 소상이 조형성이나 조선 연대, 재료 등을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문화혁명 등을 거치며 피폐할 대로 피폐했던 중국 사찰들이 이렇게나마 복원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조암에 남아있는 혜가 대사의 부조상.


물론 절이 지나치게 관광지화 되어 있는 느낌은 께름칙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 역시 중국 사람들에게 불교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의정 스님의 눈에 보이는 많은 중국 관광객들은 하나 같이 표정이 밝았고 절을 단순한 구경거리로만 보는 것 같지 않아 희망적이었던 것이다. 소림사나 이조암이나 다를 바 없이 절 입구를 장엄하고 앉아 있는 장사꾼들의 행색조차도 절 풍경의 한 구색이라 생각하는 것이 편했던 것이다.

삼배를 올리고 20여 평의 법당 안을 둘러보는 동안 의정 스님은 감개가 무량했다. 이곳이 혜가스님의 수행처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혜가 스님의 우렁찬 법문을 듣고 있는 듯했다.

내가 본래 이 당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를 제도하고자 함이었다.
한 꽃에서 다섯 잎이 피게 되리니
열매는 자연히 맺으리라.

달마 스님이 혜가 스님에게 내린 전법게다. 이 게송으로 스승의 법을 이은 혜가 스님은 다시 제자 승찬 스님에게 게로써 법을 전한다.

꽃과 종자는 땅에서 나고
땅으로부터 종자와 꽃이 나지만
종자를 뿌리는 사람이 없으면
꽃도 땅도 생겨나지 않으리.

이조암 앞에선 조계종 선원장 스님들.


절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사미정(四味井)이다. 단맛, 쓴맛, 신맛, 매운 맛의 네 가지 맛이 나는 물이라는데 지금은 물맛을 볼 수 없을 만치 방치되어 있었다. 키 작은 비석에 큼직하게 새겨진 ‘사미정’이라는 표석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혜가 스님이 이 터에서 수행할 때는 물이 없어 고생스러웠다고 전한다. 이를 안 달마 스님이 찾아와 짚고 있던 지팡이(錫杖)로 땅을 치니 물이 솟아 우물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실제 중국의 사찰에는 이렇게 지팡이로 ‘탁’ 쳐서 우물을 만들었다는 탁석천(卓錫泉)이 많다. 의정 스님은 사미정 앞에 서서 제자를 위해 커다란 석장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땅을 향해 ‘쾅’ 찍어 대는 스승을 생각해 보았다.

스승의 마음... 펄펄 나부끼는 눈발 속에서 팔뚝을 잘라 법을 묻는 제자에게 “불안 한 네 마음을 가져 오느라”는 추궁 보다 큰 사랑이 어디 있으며 물이 없어 고생하는 제자를 위해 지팡이로 땅을 갈라 물길을 여는 그 정성보다 큰 가르침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조암에는 10여명의 스님들이 살고 있었지만 모두가 절을 안내하거나 불사를 안내하는데 매달려 있었다. 물어 보니 소림사 소속이라 했다. 수행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조금 계면쩍은 얼굴로 “각자 알아서 한다”고 답했다. 얼른 듣기에도 그리 체계적인 수행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조암 내부 헤가 대사상 앞에선 의정 스님.


소림사에도 많은 스님들이 있지만 선원은 없는 듯 했다. 선원이라는 건물이 한 동 있지만 그 속에서 스님들이 체계적인 수행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안내원이나 소림사 스님은 수행을 한다고 했지만 막상 보여주지는 않았다.

의정스님은 3년 전 광동성 보림사와 운문사를 답사했을 때가 생각났다. 보림사에는 50여명의 선객들이 모여 정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벽 예불을 올리고 오전에는 정진을 하고 오후에는 일을 했다. 그리고 다시 저녁에 정진을 하는 일과였는데, 의정스님은 실제 그들과 함께 하루 동안 정진을 했었다. 그때의 감격은 참으로 오랫동안 가슴을 채웠었다. 중국에서 불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보림사와 운문사의 선객들은 참으로 개방적이었다. 한국의 객승에게도 자리를 내 주어 함께 정진을 하도록 배려해 주고 함께 포행을 돌며 ‘도반’의 따스한 정을 나누는데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었다.

그에 비해 소림사는 아직 본격적인 선 수행 도량으로서의 골격을 갖추지 못한 느낌이었다. 대신, 오랜 전통의 소림권법을 중심으로 하는 무술학교 수백 개가 소림사 주변에 흩어져 있고 내외국인 수 만 명이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니 그 역시 달마 스님으로부터 전해지는 하나의 ‘맥’이라는 점에서 마음을 달래 주었다.
아무래도 혜가 스님의 체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이조암을 내려와 다시 위로 한 시간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한 달마굴이었다. 그곳이야말로 ‘단비구법’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달마 스님이 양 무제에게 ‘불식(不識)’을 설하고 숭산으로 들어 와 9년 면벽을 했다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의정 스님에게는 ‘단비구법’의 현장이라는 사실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유적지였다.

이조암 앞에선 의정 스님.


오유봉(五乳峰) 중턱에 자리한 달마굴의 내부에도 달마 스님의 소상이 조성되어 있었다. 동굴 입구에는 돌문을 세우고 ‘묵현처(?玄處)’라고 음각으로 표기해 두었고 벽에는 ‘달마동(達磨洞)’이라 새겼다. 달마 스님의 9년 묵언 면벽의 장소라는 것을 그렇게 알리고 있었다. 뒷벽에는 ‘동래조적(東來肇跡)’이라는 음각이 있고 옆면에는 소림권(少林拳)’을 부조해 놓았다. 그러저런 부조들을 둘러보던 의정 스님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바로 ‘팔뚝’이었다. 혜가 스님이 잘라 바쳤을 그 팔뚝을 손가락까지 자세하게 묘사하여 부조한 벽면에 눈이 닿는 순간 섬뜩한 기운마저 온 몸을 싸고돌았던 것이다. 그저 관념적으로만 생각했던 ‘단비구법’의 ‘실제상황’을 보는 순간 의정 스님은 제방 선원을 다니며 결제와 해제를 반복해 온 30여년 세월이 뚝 멈추는 듯 진한 감동이 온몸에 전해졌던 것이다. 의정 스님은 ‘내 팔뚝이 거기 그렇게 피를 철철 흘리며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둡던 동굴 내부가 갑자기 밝아지는 듯했다.

소림사 방장실 위에 있는 입설정(立雪亭)도 혜가 스님을 상징하는 전각이었다. 15평가량 되는 이 전각은 그 이름부터 혜가스님의 일화를 담고 있다. 스승을 찾아가 편치 못한 마음의 정체를 묻던 그 날 혜가 스님은 무릎까지 차 오른 눈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입설정 안에는 단이 있고 단 위에는 초조 달마 스님으로부터 5조 홍인 스님까지 다섯 조사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 정문 기둥의 주련에는 ‘단비구법입설인(斷臂求法立雪人) 선종초조천축승(禪宗初祖天竺僧)’이라고 쓰여 있었다. 역시 달마 스님과 혜가 스님을 설명하는 말이다.

내부 현판에는 ‘설인심주(雪印心珠)’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설인심주, 눈속에 찍힌 붉은 도장이란 다름 아닌 혜가 스님의 피를 말하는 것이다. 팔뚝을 잘라 터져 나온 피가 흰 눈에 도장자국처럼 찍혔음은 바로 그 단단하고 드높은 구법의 의지인 것이다.

의정스님은 입설정에서 다시 한 번 혜가 스님의 붉디붉은 구도의지를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눈 속에 찍힌 붉은 도장처럼 분명한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이 1500년을 거쳐 이어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었을까? 중국 하남성의 최대 불교유적지 소림사. 소림사와 이조암, 달마동, 입설정 이 모든 유적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의정 스님은 소림사 일대 답사를 통해 더 가까운 곳에서 더 준엄한 모습으로 살아 있는 조사들의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역대조사들의 붉고 뜨거운 가르침이 있기에 오늘날의 운수들도 눈 뜨면 그곳이 고향임을 확신했다.



의정스님은


1973년 봉선사에서 운경(雲鏡)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했다.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마친 후 전국 선원을 돌며 정진했다. 2001년 경기도 양평 용문산 상원사를 복원, 용문선원을 열고 선원장 소임을 맡아 정진하고 있다.

정리=임연태기자/ 사진제공=전국선원수좌회 |
2005-10-17 오전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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