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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네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편안케 해주겠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느니라.”
달마 스님을 만나 한쪽 팔을 잘라 바치는 신심을 보인 끝에 달마 스님의 제자가 된 혜가 스님은 달마 스님의 이 한마디에 크게 깨달았다. 이 문답은 달마 스님이 중국으로 건너와 동토(東土)에 전한 선(禪)의 실체요 정수이며, 오늘날 한국에까지 전해져 온 선의 도도한 흐름의 첫 줄기요, 중생의 무지(無智)를 일순간에 밝힌 빛이기도 하다.
멀고 먼 길을 따라 중국에 온 달마 스님은 성실한 수행력과 구도심을 갖춘 제자 혜가를 만남으로써 인도 27대조였던 스승 반야다라의 뜻을 받들어 전법의 첫 열매를 맺는다. 달마굴에서 9년의 기다림 끝에 영근 그 열매는 중국의 선맥을 따라 한국까지 건너와 한국 선불교의 옹골찬 결실을 맺었고 수많은 선승을 낳았다.
달마와 혜가의 조우(遭遇)가 이뤄진 이후 다시 1천 4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간 2005년 9월 9일 숭산 소림사 달마굴 앞. 고우 스님(각화사 서암 주석)이 중국 선의 초조(初祖)인 달마 스님을 만나려 하고 있었다. 9월 7일 한국의 선원장 스님 26명과 함께 한국을 출발, 선의 원류를 찾아 나선지 3일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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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간 선지식들이 살던 절을 찾아 그분들이 남기고 간 체취와 흔적을 만나보고 싶어서 중국 선종 사찰을 여러 번 찾았고 이번에도 그 마음으로 답사에 동참했어요. 그리고 한국의 선원장 스님들이 한꺼번에 이렇게 답사를 한다는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라 여겨져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고우 스님이 밝히는 선종 사찰 답사의 목적은 간단명료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조사 스님들의 흔적을 찾아 그분들이 전하고자 했던 마음의 본질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면면히 이어져온 선맥(禪脈)을 올곧게 이어가겠다는 발원을 하기 위함이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로 마음을 바로 깨달아 들어가는 안심법문(安心法問)의 현장인 달마굴에 오르는 길은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 있다. 일행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고우 스님은 달마굴로 오르는 계단에 제일 먼저 접어들었다. 쨍하게 내리쬐는 뜨거운 기온 탓에 땀이 비 오듯 흘러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건만 40분이면 족하다는 달마굴까지 한 시간 여를 더 소요했다. 결국 고우 스님은 출발 때와는 달리 달마굴에 맨 마지막으로 도착하고 말았다. 달마굴은 몹시 좁다. 서너 사람이 들어가면 가득 차 버리는 달마굴은 달마 스님이 9년 면벽하며 선의 씨앗을 뿌릴 때를 기다린 곳이다. 달마굴에 들어서니 어색한 천연색 가사를 입혀 놓은 달마 스님의 등신불이 이제는 벽을 향하지 않고 달마굴을 찾는 수많은 대중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9년 면벽을 통해 만났던 혜가 스님이 그러했듯 다시 곧바로 마음을 깨달아 들어갈 선기(禪器)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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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스님이 처음 중국에 건너와 만났던 양무제와의 대화도 교가 성했던 중국에 ‘나다 너다’하는 주객이 끊어지고 고하, 귀천, 남녀의 시비분별이 끊긴 선의 세계를 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제껏 수많은 절을 세웠고 많은 경전을 사경하고 수많은 승려에게 공양해왔소. 이 모든 것들이 어떤 공덕이 있겠소?”
“전혀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聖)스러운 진리입니까?”
“만법은 공(空)하여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모르겠습니다.(不識)”
양(梁)의 무제(武帝. 464~549)와 달마 스님이 나눈 대화다. ‘공덕이 크다’라는 대답을 기대했으나 ‘무공덕(無功德)’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어떤 고정된 성스러운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깐 물음에는 ‘공(空)’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심이 깊어 불심천자(佛心天子)라 불리며 금강경을 강의할 정도로 불교에 대해 이해를 갖추었던 무제였지만 논리로서 헤아릴 수 없는 문답 끝에 미궁에 빠져버린다. 결국 그는 앞에 앉아있는 달마 스님을 향해 다시 묻는다. “그대는 누구십니까?” 이때, 달마 스님은 ‘나’ ‘너’라는 주객을 떠난 무아(無我)의 세계를 일깨워주기 위해 ‘불식(不識)’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 마저도 무제는 깨닫지 못했고 달마 스님의 소림사행을 재촉하고 만다.
이때부터 달마굴의 9년 면벽이 시작된다. 달마 스님은 벽만 바라보고 묵언한 채 앉아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한 달마 스님의 깊은 묵언과 면벽 속에는 이미 중국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승려들 중에서 제자를 고르는 내밀한 작업이 깃들어 있다. 달마 스님이 깊은 침묵 속에 앉아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달마 스님을 찾아왔지만 그 등을 보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옳다 그르다는 시비분별에 익숙했던 그 당시의 사람들은 ‘허공’같고 ‘벽’같은 달마 스님의 침묵 앞에서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혜가 스님이 찾아왔다. 이미 중국으로 건너오기 전 깨달음을 얻었고 40년 동안이나 스승인 반야다라를 시봉한 달마 스님의 묵언 면벽은 중국 구도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혜가 스님의 발길을 달마굴에 닿게 한 것이다. 혜가 스님은 최고조의 신심을 갖추었고 누구보다 구도 열정이 강했던 순수한 수행자였다. 눈이 내리고 그 눈이 무릎까지 차올라도 꼼짝하지 않고 법을 구했다. 그러나 달마 스님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혜가는 왼쪽 팔을 잘라 눈을 붉은 선혈로 물들였다. 혜가 스님의 붉은 피는 100%의 신심과 발심의 상징이다. 혜가 스님의 단비구법(斷臂求法)은 법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서슴없이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불법의 가치를 바로 아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불안했던 혜가 스님은 안심법문을 통해 마음을 깨닫고 인가를 받게 된다. 100%의 발심이 깨달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다. 그 문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혜가 스님은 평범한 수행승에 불과했다. 그러나 섬광처럼 일어난 ‘유아(有我)’에서 ‘무아(無我)’로의 의식개혁은 혜가 스님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 더 이상의 불안이 없는 절대 평등, 절대 평온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혜가 스님의 의식은 엄청난 혁명을 일으켰다. 달마 스님이 9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려 까다롭게 고른 제자 혜가 스님에게 의식 혁명이 일어난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눈은 여전히 내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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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흔적을 찾아 소림사를 찾은 사람들은 소림사가 무술 수도장처럼 변모해버린 것에 조금은 실망한다. 소림사 주변에 무술을 연마하는 학교가 수백 곳에 달하고 곳곳에서 기합소리가 울리고 있어 중국 선의 초조가 머물렀던 선종의 시원(始原)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소림사엔 선원도 없다. 한국의 선원장 스님들 역시 소림사의 현재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달마굴, 입설정 등 오랜 과거속의 이야기를 형상화, 구체화해 놓고 조사 스님 중심의 불교를 가꿔가는 중국 불교의 특징이 아니었다면 소림사는 선종 사찰로서의 사격(寺格)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선종 사찰을 여러 차례 답사한 고우 스님은 중국불교의 미래가 아주 희망적이라고 전망했다.
“선종 사찰 답사를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현장에 있는 중국 스님들이 과거에 살았던 큰스님들의 행적이나 그분들에 대해서 우리보다 더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황당한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선종사찰뿐 아니고 다른 절도 문화혁명의 피해가 엄청나게 컸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답사했을 때와 비교하면 처음에 선종 사찰에 갔을 때는 별로 스님들이 없었는데 이제는 스님들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젊은 엘리트들이 많이 출가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불교의 희망적인 요소입니다. 이번에 답사했을 때도 20대 미만의 젊은 스님들 30명 정도가 열을 지어 가는 걸 보고 너무 부럽다는 얘기를 스님들끼리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불교가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실감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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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보게 되면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겁니다. 우선 내가 없다, 모든 것은 연기로 존재한다는 정견을 갖추고 정견에 의해서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가치관의 전환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러한 기본 토대위에 화두도 들고 염불도 하고 봉사도 하고 전문 수행을 가미해야 합니다. 정견에 입각한 생활을 100% 해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불교의 수행풍토는 생활은 이기심으로 하고 있으면서 선방에 들어가서 이기심을 극복하고 무아가 되려고 하는 형국입니다. 생활 따로 수행 따로인 한국 불교의 병폐를 하루 빨리 바로잡아야 합니다. 정견에 의해 가치관이 바뀐 후 생활도 무아로 하면서 선방에 들어가서 노력할 때 서로 맞물려 공부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밖으로 구하던 마음을 돌이켜 바로 달마 스님의 침묵, 등돌림, 담벼락(心如障壁)같은 마음으로 들어갈 때라야 달마 스님도 혜가 스님도 부처도 내 마음과 이미 하나로서 완성되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