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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에서 밀고 오는 어떤 피할 수 없는 힘을 느끼면서 그 사람줄기의 흐름 속에 가만히 서 있었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탄 것처럼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족에게 한마디 건넸다. “누가 뒤에서 불이야 라고 한마디만 외치면 바로 이곳이 지옥일거야” 나는 그런 두려움을 실제로 느끼면서 말 했다. 흐름에 밀려가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내 말에 공감을 했다. 그날 밤 텔레비전에선 상주의 관중 압사사고를 속보로 전하고 있었다.
경북 상주에서 터진 방송 공연 입장객 11명 참사 사고는 안전 불감증이 어떤 비극을 부르는지 다시 한번 절감하게 했다. 아직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로 국민들이 희생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먼저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장례와 부상자 치료, 보상 과정에서 사상자와 그 가족들에게 또 한번 아픔을 주는 일이 없도록 관계자들은 만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언론들은 유사한 사고에 들이대면서 규격화된 보도를 정말 통절한 반성도 없이 쏟아 낸다.
늘 있어온 사건에 많이 들어보던 내용이기도 하려니와 이젠 정례화 된 표준 성명서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날 소래포구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다행히(?) 소래 포구에선 그런 일이 그 시각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위험이 없는 안전지대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이번 참사를 통해 우리 주변을 심도 있게 살펴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지만, 언젠가부터 소 잃고도 절대로 외양간을 고치지 않고 다행히(?)만 믿고 지내는 습관이 생긴 것은 아닌지 말이다.
사고가 생기면 금방 세상이 끝장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사흘이 멀다 하고 기억에서 사라진다. 모든 것을 주먹구구식으로 생각하고 대처하는 습관이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과정을 양해하던 습관 때문이다.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과정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 결과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습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이런 과정의 중요성을 일깨우자면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지자체나 진행하는 당사자 모두 정해진 기준에 의한 약정을 하도록 형식적으로는 되어 있지만 그것은 요식적인 형식일 뿐 실제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습관과 관행이 늘 위험상황을 도출하고 다행과 요행의 줄타기를 하게 된다. 행사의 목적이 좋다고 해서 과정을 무리하게 진행함으로써 원칙을 쉽게 어긴다. 무리한 과정의 진행을 너무 쉽게 용납한다. 무리한 과정을 통해 바라던 결과를 얻게 되면 모두들 유능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한다.
우리는 근본적인 원인 보다는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여러 가지 개인적 친분이나 정서적 문제를 앞세워 참된 원인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 참된 원인에 접근을 하자면 참 ‘나’를 찾는 작업만큼이나 진지하고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대충대충 그리고 속히 불행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인재를 막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적인 사고가 올발라야 한다. 더러는 기초적인 것을 지나치게 이상적인 기준으로 만들어 누구도 실행할 수 없도록 하면서 훌륭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인재를 막자면 기초질서부터 튼튼해야 한다. 이것은 관습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한 우리는 늘 상주의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야 한다.
제발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자. 올바른 기초사고의 확립이 없이는 위험은 언제나 폭발하게 마련이다. 합리적인 기초 사고(思考)에 대한 관행적 습관 그리고 책임, 그것이 외양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