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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만큼 신라인의 시각을 현대에 전해주는 시편이 있을까. 서정주 시인의 그의 1961년 발간한 시집인 <신라초>에서 옛 선인들의 정서를 한국 현대어로 풀어쓰고 있다. ‘꽃밭의 독백’은 신라시조인 박혁거세를 처녀 잉태한 사소가 산 꽃 앞에서 하는 독백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시에서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치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서 기대섰을 뿐이다’고 산신 수행을 떠나는 마음을 읊고 있다. 꽃이 개화하는 것을 천지가 개벽하는 것으로, 이 꽃잎이 열리는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라인, 아니 우리들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꽃을 즐기는 대상, 환경을 장식하는 대상으로 보는 서양인에 비해서 동양인은 꽃에서 우주 자체를 발견하려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꽃잎이 열리는 작은 현상하나에서 우주가 개벽하는 모습을 느끼는 <삼국유사>의 마음은 차라리 화엄적이다.
초등학교 자연시간에 부터 식물이 태양으로부터 빛이라는 파동의 형태로 에너지를 받아서 공기 중의 탄산가스를 영양분으로 만드는 탄소 동화작용은 차라리 마술에 가깝다. 탄산가스로부터 탄소를 추출하고 이를 수소와 결합시켜 녹말과 같은 탄수화물을 만드는 과정은 어떠한 화학공정보다도 정교하고 효율적이다. 식물은 이 영양분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또 사람을 포함하는 동물을 위해서 기꺼이 내놓기도 한다. 포유동물이 바다로부터 나와서 인간으로의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 가장 생존을 도왔던 것이 바로 꽃을 피우는 속씨식물이라고 과학자들은 생각한다. 식물에다 몸을 감추기도 하고, 열매를 따서 먹기도 했을 것이다. 뱀과 같은 파충류로부터 약한 포유동물이 보호 받았던 추억을 우리는 유전자속에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뜰에서 핀 작은 들꽃이 개벽하는 현상과 나라는 개체를 현재 있게 한 인연은 아무리 해도 떨어질 수 없는 오묘한 인연으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봄꽃 소식이 나를 들썩이게 만들 때, 그냥 지나치는 들꽃 옆에서 가만히 꽃잎을 들여다 보자. 꽃잎이 피는 것과 이를 보는 나는 과연 같은가 다른가. 이를 마음으로 느끼다 보면 어느덧, 우리의 슈퍼스타 의상 대사가 법성게에서 하신 말씀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티끌에 우주가 포함됨)’의 경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23호 [2004-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