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대의 과학은 죽음을 세포의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세포 분열을 유한하게 결정짓는 정보가 세포핵에 들어있는 DNA의 마지막 분자 고리인 텔로미어에 있다고 믿고 있다. 사람이 나이 먹어가면서,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고, 어느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세포분열이 정지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체가 죽어야만 생물계(아니 무생물계를 포함해서)가 지속하기에 알맞다는 진화가 만들어낸 오묘한 모습일 것이다.
대승경전의 사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반야심경>에서는 늙고 죽음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늙고 죽음이 없으므로 해결해야 할 고민도 없어진다는 편리하기 짝이 없는 말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획기적인 만큼 받아들이기도 힘든다. 과연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사람, 생물의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직관이 주는 판단을 미루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보자. 죽음이 없다기보다, ‘내’가 죽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을 ‘내’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 전해 주는 가르침은 실로 눈으로 보여주는 실증의 모습이다.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나(유한한 나)’라는 경향성을 극복한 부처님과 조사들이 보여주는 절대 자비의 모습은 눈부시다. 죽음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 불교의 생사관은 참으로 아름답다.
내가 죽어야 남이 산다는, 아니 내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생명은 남의 죽음위에 서 있다는 간단한 관찰이 자연의 아름다운 전체의 모습과 일치한다.
갑자기 죽음이라는 것이 나를 두렵게 만들 때, 가만히 두려움이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인지를 살펴보자. 두려움과 이 두려움을 느끼는 자가 둘 다 실체 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느낌이 부처님의 진리에 한발자국 가까이 가는 길이 되기를 믿어본다.
522호 [200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