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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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과학
박영준 교수의 과학기술과 불교
교황이 선종을 맞이했다. 가톨릭에서는 죽음을 높여서 그렇게 이름 부르는 모양이다. 종교에 관계없이 세계인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노력한 분의 명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이 인상 깊다.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행복하라’고. 몇 달 전 열반하신 숭산 스님은 ‘만고 풍월’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원히 이어지는 깨달은 자의 행복한 경지를 시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리라.

박영준 교수.
죽음 앞에 선 자들의 모습은 수 만년 역사에서 인간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죽음 앞에서 고독하고, 두렵고 외로우며, 생명에 대한 절실한 애착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잘 모른다. 단순한 이유, 즉 죽은 자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경험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음이 신비하고 두려운 이유이다. 종교적 상상력은 죽음 후의 모습을 그려낸다. 죽지 않는 영원한 세계, 윤회의 세계, 그리고 죽은 후의 완전 소멸의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져 왔다.

현대의 과학은 죽음을 세포의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세포 분열을 유한하게 결정짓는 정보가 세포핵에 들어있는 DNA의 마지막 분자 고리인 텔로미어에 있다고 믿고 있다. 사람이 나이 먹어가면서,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고, 어느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세포분열이 정지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체가 죽어야만 생물계(아니 무생물계를 포함해서)가 지속하기에 알맞다는 진화가 만들어낸 오묘한 모습일 것이다.

대승경전의 사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반야심경>에서는 늙고 죽음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늙고 죽음이 없으므로 해결해야 할 고민도 없어진다는 편리하기 짝이 없는 말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획기적인 만큼 받아들이기도 힘든다. 과연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사람, 생물의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직관이 주는 판단을 미루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보자. 죽음이 없다기보다, ‘내’가 죽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을 ‘내’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 전해 주는 가르침은 실로 눈으로 보여주는 실증의 모습이다.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나(유한한 나)’라는 경향성을 극복한 부처님과 조사들이 보여주는 절대 자비의 모습은 눈부시다. 죽음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 불교의 생사관은 참으로 아름답다.

내가 죽어야 남이 산다는, 아니 내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생명은 남의 죽음위에 서 있다는 간단한 관찰이 자연의 아름다운 전체의 모습과 일치한다.

갑자기 죽음이라는 것이 나를 두렵게 만들 때, 가만히 두려움이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인지를 살펴보자. 두려움과 이 두려움을 느끼는 자가 둘 다 실체 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느낌이 부처님의 진리에 한발자국 가까이 가는 길이 되기를 믿어본다.

522호 [2005-04-20]

박영준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
2005-10-05 오후 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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