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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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와 ‘신심명’ 한 구절
박영준 교수의 과학기술과 불교




우주에서는 빛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빛이 있는지 아는 것은 빛이 어떤 물체에 반사돼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고 고공으로 올라가면 하늘이 점점 검어지는 것은 빛을 반사할 수 있는 공기가 없기 때문이다.

박영준 교수.
하늘이 파란 것은 공기에 있는 분자들이 파란 색을 반사해서 우리가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놀이 아름다운 붉은 빛을 띠는 것은 태양의 빛의 각도가 공기 분자에 반사해서 붉은 빛만 우리에게 반사되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공기 분자 하나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이 쓴 글을 접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을 신선하게 만든다. 금강산을 가 보지 못한 사람이 말하는 금강산에서 살아있는 금강산을 느끼지 못하듯이 깨닫지 못한 사람이 쓴 책에서는 항상 어딘지 허망한 구석을 느낀다. 깨달은 스승을 찾아서 수천 리를 마다하지 않은 구도자의 행적은 바로 이 생생한 진리를 느끼기 위해서이다.

이런 면에서 <신심명>을 접하는 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달마대사의 법으로 증손자뻘 되는 분인 3대 조사 승찬 스님이 쓴 글이다. 신심명이라는 말 그대로 믿는 마음의 글이란 뜻이다. 다르게 해석하면 마음이 부처임을 믿는 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진리가 다 들어있다고 다 들어있다고 할 정도로 빼어난 글이다. 이 <신심명>에 ‘능수경멸(能隨境滅) 경축능침(境逐能沈)’이란 글이 있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것이 서로 연관을 맺으며, 주관과 객관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 의존성이 있다는 말이다. ‘나’라는 것이 내가 느끼는 여러 가지 사물을 매개로 해서 드러나는 경계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눈, 코, 귀, 혀, 피부 그리고 뜻으로 느끼는 대상은 결코 그 대상 자체라기보다는 반사한 모습일 뿐이다. 이것이 반사가 가르쳐 주는 과학의 원리이다.

한 예로 ‘우리는 결코 책상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책상을 보기 위해서 빛을 책상에 비추면, 책상의 표면의 원자는 빛에 의해서 변화하면서 표면의 성질에 의해서 또 다른 빛을 내 놓게 되는 데, 이것이 우리가 보는 책상의 모습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상을 본다기보다 책상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자(양자 역학의 원리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다루기로 하자)에게 진리에 대해서 물으면, 과학자는 변화가 진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자꾸 책상을 책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책상의 변화를 지각할 뿐이라는 것이 현대과학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세상살이가 항상 나를 번거롭게 할 때에, 이 번거롭게 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나를 번거롭게 하는 것에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번거롭다고 느끼는 나의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심신명의 진리에 한걸음 가까이 간 것이 될 것이다.

516호 [2005-03-09]
박영준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
2005-10-05 오후 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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