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은 이웃사랑을 위한 국민의 의무와 책임이 아니라 건강한 이 나라 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한적십자 창설 100주년이 되는 10월 27일을 앞두고 만난 손홍식씨(56). 22년 동안 460회가 넘게 헌혈한 우리나라 최다 헌혈 기록 보유자다. 올해 6월, 30년간의 통계청 공직생활에서 정년퇴임한 후 자칭 헌혈 홍보대사로 나선 손씨가 헌혈을 시작한 것은 만 34세가 되던 해였다. “나는 건강하니까 누군가를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나 자신을 나누자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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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성분헌혈 기법이 도입된 후 손씨는 좀더 자주 할 수 있는 성분헌혈을 시작했다. 성분헌혈은 일반 헌혈과 달리 혈액 가운데 혈소판 또는 혈장만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혈액은 생명입니다. 내가 나눠 주지 않으면 누군가가 목숨을 잃는다는 절박함으로 헌혈합니다. 거기다 혈액은 35일이 지나면 폐기처분됩니다. 지속적으로 헌혈하지 않으면 언제나 혈액 부족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어요.” 손씨가 격주로 해온 헌혈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주인의식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쌓아온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자 실천행이었다.
이렇게 한 번 두 번 하다보니 어느덧 460회가 넘게 주사바늘에 찔려 혈액을 나눠준 그의 혈관은 딱딱하게 굳었다. 헌혈할 때마다 주사바늘 찔린 곳을 찾는데도 한참 걸린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모든 생활의 중심을 ‘헌혈’에 맞췄다.
좀더 건강한 피를 나눠주기 위해 건강유지에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걷기운동을 하며 신체의 균형을 잡았고, 음식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었다. 편식을 하게 되면 영양 균형이 깨져 혈액이 묽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을 만들어 2주에 한 번 헌혈하는 날이 되면 손씨는 만사를 제쳐놓고 헌혈로 하루를 시작한다.
“헌혈하면 피를 뽑아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자기 건강 측정의 척도 역할을 합니다. 헌혈하면 간 기능 수치 혈압 맥박 등 기본 건강검진이 다 되지요. 남도 돕고 내 건강도 챙기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늘 혈액이 부족한 우리나라 상황이 손씨는 안타깝다. 그래서 더더욱 헌혈 홍보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헌혈의 장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생각에 하루 24시간도 부족하다. 부르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가서 ‘헌혈’의 중요성을 알리는 강연을 한다. 초ㆍ중ㆍ고등학교, 각종 관공서, 사회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강연했다. 헌혈의 중요성을 좀더 다양하게 알리기 위해 청소년 카운슬링 자격증도 획득했다.
‘나’를 묵묵히 나눠온 이런 손씨의 삶은 사회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94년 하반기에 ‘신한국인’ 패, 98년 한국전력과 MBC가 주관하는 ‘좋은 한국인’ 대상의 본상, 2003년 ‘광주시민대상’의 사회봉사 부문, 목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헌혈체험수기 공모에도 두 번이나 당선됐다. 이런 수상경력도 손씨에게는 자랑거리 이전에 단지 ‘헌혈 홍보 수단’일 뿐이다.
평소 손씨는 명상을 통해 자신을 컨트롤한다. 헌혈을 하는 30여분동안에도 영락없이 명상에 빠져든다. 헌혈을 하면서 내가 나를 돌아보고 추스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손씨에게 헌혈은 나눔이자 자기 성찰의 기회이다.
손홍식씨가 실천한 나눔은 헌혈뿐이 아니다. 94년에는 신장을 기증했다. 장기 기증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병원 직원들한테도 모자란 사람 취급받았어요. 장기매매는 아닌지 의심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생판 모르는 생면부지 남에게 자신의 신장을 한쪽 떼어 내줬다. 자신의 생명을 나눠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처음 가족에게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을 때는 부인이 이혼을 거론할 정도로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장기기증단체에서 오는 우편물은 다 숨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누고 살아야 한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보호자 사인도 부인이 해주지 않아 스스로 했다. 나중에서야 초등학교 6학년이던 막내아들이 엄마를 설득해 장기기증에 대해 이해시켰다는 것을 알았다.
2002년 간 기증 의사를 밝혔을 때는 부인도 수긍했다. 기증수술 후 큰 딸은 묵묵히 간병을 자청했다. 서울 아산병원 장기이식팀에서 정해준 간경화로 위독했던 중년여인에게 간을 기증했다. 당시 그녀는 사위와 손씨에게 반반씩 간을 기증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지금도 가끔 충주에 사는 수혜자를 만난다. 60대가 된 그녀는 만날 때 마다 손씨의 두 손을 붙들고 눈물을 글썽인다.
투병으로 까맣게 메말랐던 그녀가 건강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큰 보람을 느낀다고 손씨는 즐거워한다.
“골수는 맞을 확률이 2만분의 1이라고 하네요. 맞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기증 못했습니다. 올해가 골수이식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한인데 제 평생 골수이식은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보람을 느끼는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정의한 손홍식씨는 “‘헌혈’과 함께 한 나의 인생은 성공작”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