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자리는 진보의 제일선에 있다.” 평생을 자립적이고 자족적인 삶으로 일관했던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스승이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라 한다. 그는 이 말 다음에 “나는 어떤 사회체제에서든 교사의 역할이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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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할까 한다. 서울 강북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는 모 중학교의 3학년생인 딸아이가 2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학기 초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전자계산기를 들고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설마 싶어 다그치듯 재차 확인했지만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더욱 충격적인 얘기를 털어놓았다.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적당히 얼버무리며 ‘학원에서 다 배웠지’하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학교장이나 교육청에 항의를 할까 하다가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솔직히 우리 아이가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비겁함도 있었지만, 무고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이 취조 받듯이 이곳저곳 불려 다닐지 모를 ‘비교육적’ 상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도 공교육 부실의 공범자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거의 공(空) 교육이 되다시피 한 우리나라 공교육(公敎育)의 현실이다. 교원 단체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사실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대부분의 학부모는 공감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학교와 학원의 주종관계가 역전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른바 명문 학원가와 집값 상승의 상관관계는 또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교원의 전문성을 지금의 몇 배 수준으로 강화하지 않고는 공교육 정상화는 불가능하다. 중?고교 영어 교사의 토익 시험 성적이 대기업 입사 지원자의 평균을 밑돌고 심지어 14%가 중학생, 8%가 초등학생 평균점수 이하인데 어떤 부모가 빚을 얻어서라도 학원에 보내지 않을 것인가. 부모의 형편이 빚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 가난이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 있는 교사는 과연 어떤 종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인가. 초ㆍ중ㆍ고교생 자녀를 가진 교사들이라도 떳떳이 한번 밝혀 보라.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몇 명이나 되는지. 갈수록 이 나라에는 자식들 사교육비 때문에 허리가 휘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고, ‘평준화’의 이상을 실현하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뜨거운 열정을 증명하기 위해서도(이런 것들이 진보의 지향점 아니가) 교원의 자질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 공교육의 지표인 평준화가 하향 평준화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도 교원의 전문성 부족이 주요원인이다. 그럼에도 평준화의 기조를 포기할 수 없는 건 민주주의의 원칙 중 하나인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만약 사교육은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는 아이가 무능한 교사로 인하여 기회의 평등조차도 박탈당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꿈꿀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가르치는 자가 먼저 배워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는 것 없이 스승이 되지 말라’고 했다.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것은 ‘자기 양심을 속이는 일이며, 남을 기만하는 일이고, 나아가서는 많은 사람들을 오도하는 일이므로 그 죄가 크다’고 했다.(범망경)
교원평가제가 교원의 전문성 강화를 100% 보장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현실적 대안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