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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으로 채득한 도, 실천이 중요하다
[현대불교신문 연재]길을 묻는 이에게
정기법회 (1994년 10월 16일)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일체제불과 저와 여러 스님들과 더불어 같이 본래 한자리로 돌아갑니다. 더우기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인데도 모두 그냥 “비 오거나 말거나 맞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이렇게 하시는 것을 오늘 역력히 보았습니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상관없다하다가 정히 비가 와서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면 비가 오지 않게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 정성 여하에 달린 자신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는 것도 됩니다. 하여튼 여러분 장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여러분이 스님들보다 더 신심이 돈독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듯이, 과거 현재 미래를 같이 싸 가지고 돌아가는 우주 전체의 그 중심 주처가 우리들의 중심 주처이기도 합니다. 좀 작고 크고 이럴 뿐입니다. 그런데 작은 자기 중심 주처에 그 큰 중심 주처가 둘이 아니게 직결이 돼 있다는 얘깁니다. 항상 얘기해 드리지만, 이것을 잘 아시고 우리가 생활을 한다면 생활하는 그 곳에 바로 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직결이 돼 있구요. 만물만생의 마음 중심 주처,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마음들의 주처가 바로 우리의 마음 주처에 같이 가설이 됐다는 얘깁니다.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일체 만물만생은 보이는 데서나 안 보이는 데서나 서로 뜻으로 통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고, 이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왜 또 이런 얘기가 나오느냐고 하시겠지만 근본으로 말미암아 일체가 다 거론되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도 있듯이 부처님께서는 바다의 소임자를 주해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의 관리인을 주산신이라고 했구요, 풀과 나무들의 관리인을 주림신이라고 했구요. 마음의 중심 주처라는 그 주가 모든 관리를 합니다. 갖가지 천차만별의 이름들이 다 주어져서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소임을 맡아서 해 나가는 것이 바로 주신입니다. 그리고 또 주신들끼리 모여서 회담을 하거나 서로 통하게 하는 소임자를 주주신이라고 합니다. 천체가 이렇게 해서 같이 그 중심 주처에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처에 주인을, 이 몸뚱이가 집이라면 집 안에 주인을 하나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공부하지 않고 내 집이 빈집이라면, 영계성이라든가 세균성이라든가 업보성이라든가 인과성이라든가 윤회성이라든가 이 다섯 가지가 자유롭게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집 안을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거죠. 그런데 내가 주인을 딱 세워 놓는다면, 중심에 주처를 세워 놓는다면 절대 바깥에서의 세균성이나 또는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업식이나 윤회성 업보성 영계성, 모두가 다 감히 그 자리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을 안 세워 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인이 본래 있으나 자기가 생각을 해서 세워 놔야 세워집니다. 우리가 생명은 있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몸이 움죽거려지지 않듯이, 생각이 있어야만 몸이 움죽거리고 작용을 할 수 있듯이 우리는 생각이 없다면 무효입니다. 모두가 생각이 있어야 작용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생각이 없다면 아무리 전력이 태산 같아도 끌어 쓸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중심에 주처가 다 같이 직결이 돼 있고 연결이 돼서 가설이 돼 있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불을 켤 수가 없습니다. 에너지를 끌어다 쓸 수가 없습니다. 작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정사실이며 심성과학이며 철학이며 천체물리학이며, 모두가 종합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림= 최주현.
우리가 생활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상대도 없고 세상도 없습니다.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없는데 무슨 상대가 있고 무슨 부처가 있고 무슨 세상이 있겠습니까? 잘하고 못하고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바로 내가 있기 때문에 모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내 집부터 바로 중심에 주처를 세워 놔라” 하는 겁니다. 누구나가 중심은 다 가지고 있지만 그 중심을 모두 세워 놓지 않고 그냥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위로는 한 우주를 꿰고 아래로는 기둥이 딱 딛고 있어요. 꿰고 있다는 건 직결이 돼 있단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주인공 뿌리, 주처는 움죽거리질 않아요. 움죽거리질 않고 힘만 배출하는 거죠. 힘을 배출한다구요. 축의 힘으로 인해서 수레가 걸림 없이 돌아가듯이 우리도 주처에 기둥을 딱 세워 놓는다면 그 힘으로 인해서 항상 우리 몸뚱이가 작용을 하면서 수레같이 돌아가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인간이, 아니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체들이 살아나가는 데는 상대성이 있습니다. 높고 낮고, 길고 짧고, 넓고 좁고, 크고 작고, 못하고 잘하고 이런 게 상대성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주처, 주인, 주장자가 있습니다. 크고 작은 주장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을 꿴 주장자와 내 주처의 주장자가 둘이 아닌 까닭에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겁니다. 돌아가는 거는 가설이 돼 있고, 위 아래를 받치고 꿴 거는 같이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삼세가 일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주인을 안 세워 놓고 그냥 가는 사람 다르고, 주인을 딱 집에다가 세워 놓고 가는 사람이 다른 겁니다. 항상 걸림 없이 집을 보도록 주인을 세워 놓는다면, 자기 주처를 세워 놓는다면 그게 바로 보현신이며 법신입니다. 자기가 세워 놓은 그 마음 자체가 부처라면 법신을 세워 놓고 화신, 즉 보현신을 세워 놓는다 이겁니다.

마음속에 그렇게 세워 놓음으로써 바깥에서 악행, 즉 말하자면 인과성이나 윤회성이나 세균성이나 업보성이나 영계성, 이러한 잡다한 모든 영계들이나 유전에 의한 것들이나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거기를 범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한다고 주인공에 뿌리를 세워 놓은 것은, 세워져 있는데 내가 생각으로 찾아서 거기 세워 놓은 것은 바로 자기 마음을 거기다가 포함해서 돌리는 작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것도 붙을 수가 없죠. 그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붙을 리가 없어요. 먼지 하나도 거기 붙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하는 분에게는 번뇌도 붙을 자리가 없고 업보도 붙을 자리가 없고, 유전성이나 인과성 윤회성 업보성 영계성까지도 전부 붙을 자리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잘해 보십시오. 만약에 빛으로 간다면 빠르기는 하지만 가는 곳만 보이겠죠. 그리고 빛으로 가다가는 끊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도 점프를 해서 넘어갈 수가 있는 것이 한생각입니다. 빛보다 더 빠른 것이 한생각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빛보다 더 빠른 이 마음은 가고 옴이 없이 땅속이든지 물속이든지 어디든지 그냥 한생각에 두루 한눈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광대한 법을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마는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도록 마음을 넓혀서 지혜롭게 들으세요. 그리고 주인을 세워 놓지 않고 이 공부를 안 하는 분들에 한해서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집이 비었어요! 주인을 세워 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되는 숙명통 자체가 포함된 오신통을 지금 현대 말로 하자면 자동적인 컴퓨터라구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인 컴퓨터에 그대로 입력이 되거든요. 입력이 된다면 그 입력된 대로 가차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악행이 저질러지거나, 윤회성이 저질러지거나, 영계성이라든가 모든 것이 그냥 자동적으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거는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게 말입니다.

그와 같이 지금 몸뚱이 속에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도록 돼 있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도록 돼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집 안에 모든 게 들어 있습니다. 들어 있는 것이 가차 없이 자꾸자꾸 나오는 것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주인을 세워 놓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주의 근본과 직결돼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우리 마음과 더불어 같이 하고 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안 생기고 그러한 일이 없는 것이고 어떠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빨리 대치를 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대치를 못하죠. 그렇게 돼 있는 것이 지금 현상계에서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내 집에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과거의 인과로써 영계가 드는 수도 있고 지금 현재 길에 오다가다가도 드는 수가 있습니다. 차에 치여 죽은 영계가 착을 두고서 그 자릴 떠나지 못해서 드는 수도 있습니다. 저 나무에, 즉 말하자면 목신이 돼 가지고서는 붙어 있다가 들어오는 수도 있습니다. 내 집이 비었으면 그 빈집에 자꾸 드나들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서 나오는 것도 많은데 빈집이 돼서 바깥에서 들어오니까 이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대치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윤회성으로 들어오고 영계성으로 들어오고 인과성으로 들어온 것은 병원에 가도 어렵습니다. 그냥 몸에서 난 병이라야 병원에서도 빨리 치료를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니까요. 유전으로 온다거나 영계성으로 온다거나 또는 바깥에서 들어온다거나 이렇게 해서 내 집이라고 하고 사는 식구들이 한 집안에 둘 셋씩 생긴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사람이 내 집이라고 하며 살 때는 이 소리 하고, 또 딴 사람이 내 집이라 하고 내가 산다 하고 내가 제일이라 하고 살 때는 또 딴 소리 하고,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지면서 자꾸 내가 바꿔지니까 미쳤다고 하죠. 그리고 또 육신이 망가지죠. 첫째 몸이 망가져요, 부지를 못하게 하니까요. 나가라, 들어와라, 앉아라, 나가지 마라, 먹지 마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니까 이거는 견뎌 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하는 그 사람만이 아니라 주위의 식구들까지도 지망년을 당하는 겁니다.

그림=최주현.
그러니 바깥에서 들어오든 안에서 일어나든 살아가면서 유전이 돼서 들어오든, 마음은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거기서 나라고 하면 나라고 곧이듣는 게 인간입니다. 일체가 다 화해서 부모가 됐다 자식이 됐다 이러는데 그렇게 윤회를 하면서 가져온 인과성은 때에 따라서는 삼촌으로도 나오고 할아버지로도 나오고 아버지로도 나오고, 누구도 나오고 누구도 나오고 이러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는 딴 것이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이름을 부르는데도 곧이듣게 돼 있습니다. 보이질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망하고 흥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는데 이 공부를 안 하시면 막고 대치할 수 있는 도리를 도무지 모르기 때문에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생긴 문제는 보이지 않는 데서 해결을 해야 하고, 마음과 마음이 인과성으로 벌어진 것은 마음과 마음으로 해결을 해야 하고, 영계로서 벌어진 거는 영계끼리 해결해야 되는 겁니다. 이 모두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말입니다.
이러니 이 공부를 안 하고서야 어떻게 하겠느냐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부터 알아라. 너부터 알고 너부터 믿고 너부터 그 본래 있는 거를 찾는다면 이 세상 우주 만물이 돌아가는 그 섭류를 네 자신이 잘 알 수 있으리라. 그럼으로써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느니라. 그렇게 자유인이 된다면 네가 바로 부처고 네 한생각에 법신이 되느니라. 네 한생각에 법신이 된다면 바로 그 법에 의해 자유로운 작용이 스스로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볼 때에 “우리가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을 어떻게 헤아리느냐.” 하면서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지금 부처님의 뜻을 따르고 시대가 바뀌는 대로 순응하면서 우리 마음들이 대치할 수 있는 그 방안을 세워야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옛날처럼 화두를 쥐거나 그렇게 해 가지고 될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안방에서 세계를 보는 시대라 화두를 잡으면 아마 그냥 그냥 빈 걸로 돌아갈 겁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출현한 자체가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출현했으면 ‘내가 어디서 왔는가?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고 어디로 가는가?’ 이거부터 알아야죠! 나는 쑥 빼고 ‘부처님, 날 좀 잘되게 해 주십시오. 내 병고 좀 낫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외쳐 봐도, 아무리 이름을 불러 봐도 그거는 끄덕도 하지 않고 통하질 않습니다. 통하는 길은 여기밖에 없어요. 부처님과 통하는 길은 바로 내 마음속의, 내면의 털구멍 한 구멍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공부를 안 하고 주인공 주장자를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주장자를 세워 놓고 거기다가 모든 걸 놓고 굴려서 대치를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 좋지 않은가 이겁니다. 나는 부처님한테 가서 빌고 기도하란 말은 안 합니다. 집에서도 빌고 기도하란 말은 안 합니다. 단, 바로 자기 내면의 뿌리 털구멍, 한 구멍밖에 없으니까 거기다 놓으세요. 마음이 나오는 것도 그 구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냥 내 앞에 닥치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다 거기다가 ‘아, 당신이 다 하는 거니까 당신이 해결해!’ 하고 ‘당신이 대치를 하고 당신이 화목하게 할 수 있어. 지혜롭고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는 것도 당신이야.’ 하고 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 거기다 놓고 꺼낼 때는, 내가 주인공에다 탁 놓고서 그냥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즉 자기 마음이 잘되고 못되고 나쁜 일이고 좋은 일이고, 이럭하면 안 된다 된다를 잘 알기 때문에 나쁜 일을 하게 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한생각이 그냥 법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늘과 땅과 인간을 삼위일체로 꿰어서 한생각을 내던진다면 법이 되는 겁니다. 한데 떨어지지 않는 법! 그대로 실천되는 법! 이 법을 그대로 행해야 세상천지의 갖가지 악행, 갖가지 부조리, 갖가지 병고…, 어떻게 일일이 말로 그 이름을 다 대리까마는, 그렇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지금 다 대치할 수 있습니다.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요거 한마디를 더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과 땅을 꿰고 뚫어서 인간 주처 자체하고 결부된 이 자체를 바로 전력이라 해도 좋고 에너지라고 해도 좋습니다. ‘요걸 어떻게 해야 여러분이 잘 알아들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에너지가 불타고 있듯이 있는데, 그것을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능력을 배출시킬 수 있는 그 무한의 기둥, 불기둥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지 않는 데 이 마음으로써 거기다가 만약에,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병이 났으니 이 병을 너밖에 해결할 수 없다.’ 하면 그 불기둥에서 자연적으로 약사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빈손이 하나 나와서 병이 난 사람한테 결부가 됩니다. 바로 한 찰나에 결부가 돼서 한 찰나에 그 병을 없애 줍니다. 예를 들어서 불기둥에서 나간 거니까 불로다가 그냥 제거시키는 거죠. 어떤 거든지 막론하고 제거가 되는 거죠.

그러면 거기에 빈손들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겠습니까? 빈손이 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다가 ‘명이 짧으니 명 좀 길게 해 주십시오.’ 한다면 칠성부처의 빈손이 나오게 돼 있거든요. 칠성부처라는 그 이름이 빈손에 쓰여 있어요. 허허허…. 그래서 그 칠성부처의 빈손이 나와서 한 찰나에 결부가 돼서 그 명을 다소나마라도 이어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죠. 그것뿐이 아니라 지장보살의 빈손도 있고 산신의 빈손도 있고, 뭐 아까도 얘기했듯이 주해신 주림신 뭐, 모두 우리가 연결할 수 있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내 앞에 닥치는 대로 그 불기둥에 넣으면 자동적으로 빈손의 그 이름이 탁 나오면서 자기와 결부가 되는 거죠. 과학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원자의 그 기둥 안에서 입자가 수만 개가 있는데 그 입자가 나올 때는 바로 입자 하나에 칠성부처니 지장이니 뭐 전부 헤아릴 수가 없이 그렇게 나와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응신이 돼서 찰나에 이끌어 주신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처님의 한생각이 아촉이요 한생각이 아미타요 한생각이 지장이요 한생각이 관세음이요, 한생각이 그렇게 천차만별로 나툽니다. 그거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응해 주는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니 물에서 죽게 됐을 때는, 즉 말하자면 해신으로서 생각을 하게 하면 금방 용신이 돼 버립니다. 용신이라는 것은 작용을 하는 걸 말합니다. 생각만 하고 작용을 안 한다면 무효죠. 그래서 부처님의 한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한생각을 내시지 않는다면 법신이 없고, 법신이 없다면 바로 보현신이 없어요, 작용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대로 우리에게 지금 생명의 근본, 그 뿌리인 근본이 있고, 생각을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법이고 작용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작용하면서 지금 살고 계시는 생활 속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부처님도 계시고 도심도 있고 도도 있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부처님을 찾고 경전을 보기 이전에 내 마음부터 그렇게 단련을 해 가지고 경전을 한번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싱그럽고 광대무변한 것인지를 아실 겁니다. 경이라는 것도 교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다스리면서 배우고 나갈 수 있는 교입니다. 그 경을 보고 배우는 것도 자기의 마음 다스림에 의해서 결부돼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경만 읽으면 잘되는 줄 알아서는 도저히 부처님의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마음대로 못하고 대치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차원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릇으로 비유한다면 종지가 있고 접시가 있고, 조그만 게 있고 큰 게 있고, 사발이 있고 대접이 있고 큰 자배기가 있고 이렇듯이 말입니다. 사람도 종지와 같은 차원의 그릇이라면 간장밖에 담을 수 없습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여러분의 차원이 접시라면 그저 나물 무친 거밖에는 놓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이 바다가 돼라 이 소립니다. ‘그 불기둥에 놔라, 놔라’ 하는 것은 한바다에 물 몇 그릇 붓는다고 두드러지지도 않을 것이고, 물 몇 그릇 퍼낸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맑은 물, 더러운 물, 구정물, 흙물, 핏물, 고름물 할 거 없이 다 들어가도 다 바닷물일 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가라앉혀서 그대로 양식이 돼서 만생을 다 먹이고도 남을 수 있게끔 되는 것이 바다의 이치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넓고 광대무변한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이 마음 하나가 지금도 여러분의 집을 점프해서 갔다가 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밥통에 밥해 놓은 것도 볼 수 있고 자기 가정에 무엇을 해 놨는지 볼 수 있듯이, 공부를 하면 그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무엇을 해 놓고 살고 있고 무엇을 어디다 두고 한 것까지도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보고 계시죠? 그렇다면 빛보다 더 빨리 가서 보고 오신 거 아닙니까? 그러니 말입니다, 이 공부를 하게 되면 그냥 아무 데나 보이는 게 아니라, 내가 그쪽 것을 보고자 해서 그것이 찰나에 봐질 때, 한 귀퉁이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 첨보해서 보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중한 공부입니까?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한 찰나에 전체를 보는 것도 도가 아니다. 한 찰나에 전체를 듣는 것, 바로 천이통도 도가 아니니라. 한 찰나에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간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한 찰나에 수많은 사람의, 아니 곤충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다 안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숙명통,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다 알고 남의 것도 다 안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이 다섯 가지가 다 도가 아니니라.’ 그러셨습니다.

왠 줄 아십니까? 남의 마음을 알면 뭘 하고, 보면 뭘 하고 또 어디서 온 줄 알면 뭘 하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면 뭘 합니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물 한 그릇을 목마른 사람한테 줄 수 없고 내가 목마른데도 (컵을 들어 물을 드시고) 이렇게 먹을 수 없다면 그건 도가 아닌 겁니다. 물그릇이 이렇게 있는 거를 알면서도 내가 실천을 하지 못해서 그걸 갖다 먹을 줄 모른다면 허탕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거를 (컵을 들어 보이시며) 선뜻 집어서 먹일 수 있고 내가 먹을 수 있어야만 도라고 했습니다. 오신통 안에서 벗어나서 오신통을, 다섯 가지를 그냥 자유스럽게 굴려야만 누진에 속합니다. 이름 해서 누진통이라고 그랬는데 누진통이라는 이름조차도 없는 것이 그겁니다. 그러니까 도 아닌 도죠.

그러니 여러분이 비를 맞고 이렇게 왔는데도 뭐 그냥 별것도 아닌 것 같다고 하거나, 그냥 푸대접을 하고 본체만체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나도 한때는 비가 억수같이…, 이거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굵은 장대비가 억수같이 내려와서 그냥 막 물이 이렇게 차서 흘러내리는 숲에 앉아 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즐겁고 좋아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밀짚모자를 썼는데 물이 줄줄 흘러서 그냥 그 밀짚모자가 이렇게 접혀지면서 물이 막 흐르니까 아, 그거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말입니다. 물이 살 속으로도 안 들어가고 뼈 속으로도 안 들어갈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론 전혀 안 들어간다는 점에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한 번쯤은 이런 경험도 하는 것이 우리 공부하는 데에 인내를 기를 수도 있고 참을성도 기를 수가 있고 굳게 다짐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이 모두가 공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얍삽한 마음으로 ‘우리가 부처님 법을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데 비가 안 와야지.’ 한다면 허, 비가 안 오기만 하면 뭘 합니까? 비가 오는 맛도 알아야 하고 안 오는 맛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을 알면 안 되는 것도 알아야 모든 것을 대치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산을 갔다면 갔다가 올 줄도 알아야지, 만약에 차를 타고 갔다면 내릴 줄도 알아야지, 타고 돌아다닐 줄만 안다면 그것은 팡입니다. 그 인생은 아주 팡이에요! 차를 타고 갔으면 내려서 걷기도 하고 또 탈 줄도 알아야 정상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예 비가 오든지 안 오든지 그거와 상관없이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너무 오래 많이 하면 또 엇갈려서 제가 말씀드린 게 그냥 다 수포로 돌아갈는지 모르니까요, 단 하나만 쥐고 모든 것을 잘 기억하셔서 재료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흉내를 내다가 보면 진실이 돼 버립니다. 진짜 부처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줄 아시구요, 될 수 있으면 열심히 하십시오.

대행스님(한마음선원장) |
2005-09-22 오후 7: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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