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알리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9월 9일 오후, 경기도 광주 학동리에 위치한 조각가 김영원 교수(58ㆍ홍익대 조소과)의 작업실을 찾았다. 김영원 교수는 10월 7~30일에 열리는 서울 성곡미술관 10주년 기념 초대전을 앞두고 막바지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었다.
이번 전시는 어떤 주제의 작품들을 선보일까. 미리 김영원 교수에게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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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가 만들어낸 ‘인체사실조각’은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 속에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이입해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게 구성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역동감(逆動感)과 실재감(實在感)을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체조각이 가진 공간성과 시간성을 제거해 박제처럼 만들었다. 마치 사진을 오려 공간에 세워놓은 것처럼 시ㆍ공간이 정지된 순간을 조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자연이나 생활에서 ‘회의’를 가졌고 나 외의 누구와도 소통이 불가능함을 느꼈어요. 보는 것도 대상을 통해 내 감정과 욕망을 보는 것이지 대상 자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나 외의 세계와 교감이 불가능한 방해요인은 뭘까 생각했죠. 바로 우리가 매일 갖는 욕망, 생각, 감정이었습니다. 내려놓고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대상과 바로보고 대화할 수 있어요.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김영원 교수가 말하는 ‘바라보다’ 연작이 탄생된 계기이다. 이번 작품들은 인체라는 조각 이미지만 가져오고 인체가 지닌 질서인 ‘입체감’을 거부했다. 평면과 공존하는 반쪽 입체 ‘부조’를 떼어내 입체공간에 세워놓는 것으로 말이다. 인간이란 구체성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감만 남았을 뿐이다. 시공간이 정지된 상태에서 존재만 남은 ‘나’와 ‘내’가 서로 바라보며 마주 선 그 공간은 허무하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것을 포함한 에너지로 충만하다. 이 공간은 한없이 많은 가능성과 자유를 가졌으면서 욕망이 없다.
앞으로 김영원 교수는 있는 그대로의 내 이웃 가족 친구를 만들고 싶은 바람을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만들어도 내 생각 감정이 들어가게 되는데 내 생각과 감정을 배제시키고 진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만들어 보는 것”이 다음 작품의 구상이다.
▲ 1층 전시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바라보다-그림자’등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작품 10점이 전시된다. ‘물결 위의 색’ ‘바람결의 색’ ‘바라보다’ 등은 인체의 왜곡을 통해 현대인의 정신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바라보다-그림자’는 마치 그림자가 길에 드러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운 것이 실재인지 서 있는 것이 실재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 2층 전시실
‘바라보다’라는 제목의 하얀 인체들은 FRP 합성수지로 제작됐다. ‘바라보다’는 총 84개의 개별 조각으로 이루어져있다. 인체의 뒷모습은 입체적으로 앞모습은 부조를 벽면에서 떼어낸 듯 평면이다. 그 평면 부분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조각들이 80cm에서부터 2m까지 크기별로 짝을 이뤄 2층 전시실을 가득 메우게 된다. 부조의 평면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빈 공간의 가득 참을 보여 준다.
▲ 3층 전시실
과거와 현재, 부조와 환조가 혼재된 공간이다. ‘바라보다’를 비롯, 10여점이 전시된다. 1층과 2층을 거쳐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던 긴장감이 편안하게 풀리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인간을 형상화한 작품을 준비했다. 뼈대만 있는 상자로 표현된 상반신과 인체 하반신이 결합된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보여준다. 삶도 죽음도 없이 하나라는 것. 단지 변해갈 따름이다. 눈에 보이는 이 공간이 실체일 수도 있고 보고 있는 내 몸이 환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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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교수(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는 1980년 문예진흥원 미술관에서 제1회 김영원 조각전을 개최한 이래 서울 환미술관, 이목화랑 선화랑 금호미술관 등에서 8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제22회 상파올로 비엔날레, 올림픽 10주년 기념 야외조각 심포지엄, 김포국제조각전 프로젝트, 부산비엔날레 조각 프로젝트, U대회 국제 조각 심포지엄 등에 출품했다.
작품감상 포인트?
김영원 교수가 말하는 감상포인트는 너무도 간단하다.
“선입견을 갖지 말고 보고 느낀 것 그대로 받아들여라.”
내 마음의 편견이 없이 작품을 바라보면 작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감정이 관람객들의 마음에 그대로 흘러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김영원의 작품 세계는?
수시로 변하는 유행사조나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30여년이 넘도록 자신만의 사실주의 인체조각에 천착해온 조각가 김영원 교수. 김 교수가 표현하는 인체는 관념적 표상 혹은 심미적 대상으로서의 인체가 아니라 일반화한 인간의 실제이다. 사실주의에 대한 집착은 인체를 통한 존재에의 끈질긴 모색에서 비롯된다.
평론가 윤범모 교수(경원대 회화과)는 “김영원 교수의 장기는 인체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하는 기량이 탁월하다는 것”이라며 “특히 사실적으로 형상화된 인체로 특정 상황을 잘 표현해 내기 때문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지적한다.
1977년부터 82년 사이에 제작된 ‘중력ㆍ무중력’ 연작들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신체의 기능을 정확한 모델링 기법으로 묘사 포착한 집합체이다. 이후 인체 구조의 변형을 통해서만 문제를 접근하려는 작업에 식상한 김 교수는 83년부터 인간의 육신 속에 꿈틀거리는 잠재적 본성 등을 인간의 실체로 표현해 낸다. 90년대 초부터는 동양의 선(禪) 사상에 심취해 선수행에서 얻어지는 심기(心氣)를 예술작업과 일치시키고자 노력했다.
오원배 교수(동국대 미술학과)는 “스스로 체험한 불교수행의 향기가 작품에 배어나는 작가”라는 말로 김 교수의 작품 세계를 극찬한다. 또한 김영원 교수를 ‘이미지 포교사’라고 묘사한 오 교수는 “불교소재를 불교적인 도상으로 드러내놓고 보여줌으로써 불교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불교사상을 현대적인 조각기법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많이 해왔다”고 덧붙인다.